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8화
환영을 보는 걸까.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본은 분명 죽었다.
첨탑에서 치열한 몸싸움 끝에 내가 그녀를 탑 아래로 밀어뜨려 무찔렀다.
그런데.
“어, 어떻게…….”
다른 이도 아닌 레일라가, ‘진실의 거울’ 속에서 살아 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대 마법사와 레일라는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움과 의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본의 모습에 의해 바로 풀렸다.
“너…….”
나는 내 허리춤에 겨우 닿는 키의 이본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고작 분홍 머리와 푸른 눈동자만으로도 머리가 하얘져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본이라기엔 퍽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체구를.
“혹시…… 이본 에카르트?”
내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름에 이본, 아니, 분홍 머리를 한 낯선 아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그 모습에 확신했다.
‘레일라가 아니야.’
정확히는 레일라에게 잠식되기 전의 ‘진짜 이본’이었다.
일고여덟 살쯤 먹었을까.
나는 생각보다 너무 어린 아이의 모습에 당황하다가, 이내 주춤주춤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너…… 살아 있었니? 대체 네가 여길 어떻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원작 게임에서는 이런 이야기 따위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내가 빙의된 노멀 모드와 하드 모드의 히든 엔딩에서마저.
그때였다.
우우웅-.
이본에게 한 발짝 다가간 순간, 손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진동했다.
나를 여기로 이끈, 부러진 거울 봉이 빛을 뿜어내며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와 이본의 시선이 동시에 내 손에 들린 손거울을 향해 돌아갔다.
그 순간 아이가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왜…….”
쏟아지는 적나라한 적의에 주춤거릴 무렵.
타악-!
불현듯 이본이 내 손에서 손거울을 낚아챈 후 뒤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 야!”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에 우왕좌왕하던 나는,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저걸 왜 뺏어 가지? 혹시, 이본이 아니라 레일라? 그래서 먼저 선수 친 건가?’
검은 공간 너머로 사라지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따라가는 동안 오만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쪼그만 게 빠르긴 얼마나 빠른지 전속력을 다해 뒤쫓는데도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헉, 헉…… 야! 왜 뛰는 건데! 싸울 거면 여기서 싸워!”
나는 금세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거세게 소리쳤다.
하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작아진 이본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오, 저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유물을 잃고, 몸마저 어려진 이본은 마법 없이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야비하게 도망치는 건가 싶을 때였다.
문득 끝없는 어둠만 펼쳐져 있던 공간 끝에 새하얀 빛을 뿜는 네모난 문이 생겼다.
이본은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그 앞에 멈춰 서서 흘끔 나를 돌아보았다.
“이본! 잠깐, 말로 해! 왜 그러는 건데!”
그러나 내 간절한 외침에도 이본은 이내 훌쩍 환한 빛 너머로 사라졌다.
“안 돼! 갈 거면 내 거울 봉은 주고 가라고! 야-!”
동시에, 네모난 문 모양이 이지러지듯 없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미친, 환장하겠네!’
최근 이토록 격렬하게 움직여 본 적 없는 몸이 삐걱거렸다.
그러나 좁혀지는 거리보다 문이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가까스로 그 안으로 몸을 날리며,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된 이본에게 효과적으로 엿을 먹일 수 있을지 수없이 떠올렸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고요했던 검은 공간은 사라지고 낯선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야. 여기 어디…….’
당황하여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나는, 곧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바로, 공작저 근처의 번화가였다.
‘축제?’
한 번 와 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어떤 상황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문 깜깜한 밤. 평소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어야 할 거리가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줄지어 서 있는 음식점과 잡화상, 허공에 걸린 화려한 장식들.
마치 이클리스를 구하기 전, 망할 에카르트 형제 놈들과 왔을 때처럼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진짜가 아니야.’
하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이곳이 허상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황제의 대관식을 앞두고 수도에 축제 같은 게 개최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방증하듯, 거리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사람들이 휙휙 통과했다.
‘이본은 어디 있지?’
여기서 나가려면 우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발칙한 아이부터 찾아야 했다.
사람들을 통과해 마구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무렵이었다.
“오라버니! 저기 봐!”
“이본! 뛰지 마!”
찾고 있던 이름이 번뜩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이거 봐, 예쁘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본이 어느 잡화점 앞에서 손거울 하나를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원래의 휘황찬란했던 모습과는 달리 장식이 몇 개 사라져 허름했지만, 난 그것이 내 거울 봉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야, 너……!’
그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며 소리 치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거울을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투명인간처럼 이본을 뚫고 넘어갈 뿐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나는 당황했다. 그때, 누군가 헐떡이며 이본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뛰지 말라니까! 사람 많다고 위험하다고 했지!”
‘레널드?’
나는 그를 돌아보고 입을 떡 벌렸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어린 레널드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이러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가 있어.”
“미안해, 오빠…….”
몇 살 많은 오빠의 훈계를 들은 이본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 봐.”
금세 마음이 풀린 건지 레널드가 이본이 들고 있는 손거울을 빼앗아 살펴보았다.
사랑스러운 핑크빛 머리 두 명이 붙어 있자 꼭 쌍둥이 같아 보였다.
“쳇, 이런 게 뭐가 예쁘다고. 널리고 널린 거잖아.”
“조잡하군. 순도 낮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데.”
레널드의 말에 뒤이어 누군가 딱딱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데릭?!’
나는 그야말로 입을 떡 벌렸다.
어린 레널드를 보았을 때보다 더 경악한 이유는, 청소년쯤으로 보이는 데릭의 모습이 퍽 익숙했기 때문이다.
‘미친…… 저거, 마법 팔찌로 변했을 때 내 모습이잖아?’
앳된 과거 데릭의 얼굴에 성인이 된 그를 겹쳐 보며 기막혀할 때였다.
“난 이게 마음에 드는걸……. 잘 봐 봐, 오라버니. 다른 거울에 비해 반짝거리고 예쁘잖아.”
이본이 입을 귀엽게 삐죽대며 말했다. 잡화점 주인이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아가씨의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 이건 보통 거울이 아닙니다요! 저 먼 서방의 고대인들이 쓰던 거울로 신비한 힘이 깃든…….”
“됐어. 여기서 기다려 봐, 이본. 이것보다 훨씬 예쁜 걸로 사다 줄 테니까.”
줄줄 떠들어 대는 주인의 말을 잘라먹은 레널드 놈이 아차 할 새 없이 근처 액세서리 가게로 휙 뛰어갔다.
‘성질머리 하고는……. 어릴 때도 똑같았네.’
한 발짝 떨어진 채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나는 멀어지는 분홍 머리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이 허상이 뭘 나타내고 있는지 감이 잡혔다.
이건 ‘진짜’ 이본을 잃어버린 날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게 갖고 싶어, 이본?”
문득 레널드가 놓고 간 손거울을 가리키며 데릭이 물었다. 이본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봐, 값이 어떻게 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요! 은화 3개만 주십쇼!”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데릭은 군말 없이 값을 치렀다.
상인에게서 거울을 건네받은 데릭이 그것을 이본에게 쥐여 주며 당부했다.
“자, 레이나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니까.”
“와아! 데릭 오빠 최고!”
이본이 기쁜 얼굴로 깡총 뛰며 맞잡은 데릭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그런 동생이 귀여운지 데릭이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내심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로봇처럼 재수 없는 표정만 지을 줄 알던 놈에게, 저렇게 온화하게 웃을 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 순간이었다.
뿌우우, 뿌우우-!
멀찍이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바라보니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들 무리가 거리 한복판을 가득 메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이본, 오빠 손 꼭 잡고 있어.”
데릭이 이본의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내게 내밀어졌던 것과는 달리 한참이나 작은 손이었다.
물론 이본의 손보다는 훨씬 컸지만, 십여 년 전이라는 세월은 숨길 수 없었다.
“레널드 오라버니는?”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오겠지.”
남매 둘은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대로변으로 물러섰다.
그사이 퍼레이드 행렬이 그들과 가까워졌다.
나는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숭숭 통과하는 이 상태로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이미 지나간 과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일이 벌어졌다.
어색해서 대충 붙든 옷자락이 하필 단추였던 나와는 달리, 손을 꼭 맞붙잡고 있었음에도 어린 이본은 인파에 쉽게 휩쓸렸다.
“오, 오라버니……!”
“이본-!”
멀어지는 이본을 보며, 데릭이 절박하게 외쳤다.
“비켜!”
밀려오는 사람들을 헤치며 그는 필사적으로 이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어깨에, 그저 관조하겠다는 생각도 집어 치우고 나 또한 손을 뻗어 잡으려 들었다.
‘안 돼.’
하지만 그대로 통과하고 말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푸른 눈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떡하지?’
사라진 이본을 쫓아 사람들을 숭숭 통과하며 빠르게 걸을 무렵.
툭, 투둑-.
문득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놓친 건지 데릭이 사 준 손거울이자 내 거울 봉이 사람들의 발길에 차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치 지켜보고 있는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그 순간 거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망할 것.’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이 거울을 짓밟기 직전, 가까스로 그것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거울은 통과되지 않고 내 손에 온전히 들렸다.
“제기랄, 이본! 이본…….”
그때,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뒤를 돌아보니, 퍼레이드 행렬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데릭 혼자만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