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40화 (24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9화

부릅뜬 눈과 식은땀으로 절어 있는 얼굴.

그토록 절망스러운 데릭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하긴, 아무리 싫은 놈이래도 가족과 생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통쾌함을 느낄 사람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축제 날, 멀어지는 나를 보고 왜 그토록 절박한 표정을 지었는지 조금쯤 이해가 됐다.

“형!”

그때, 어디선가 레널드가 튀어나왔다.

데릭의 말처럼 혼자 안전한 곳에 잘 피해 있었던 건지, 그의 손엔 여동생에게 줄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이, 이본은?”

혼자 남은 데릭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얼이 나간 형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건지 벌컥 화를 냈다.

“이 멍청아! 여기 가만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찾아야지!”

데릭의 팔을 끌고 레널드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데릭도 덩달아 이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본! 이본, 어디 있어!”

둘은 밤새도록 인근 골목들을 뒤지며 목이 터져라 이본을 찾아 헤맸

그러나 많았던 인파가 서서히 사라지고, 늘어서 있던 잡화상들마저 하나둘 문을 닫아도 여전히 이본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형, 이제 어떡하지?”

불그스름하게 동이 터 오르는 것을 본 레널드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흑……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버지 몰래 나가자는 말만 안 했어도…….”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레널드를 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울지 마, 레널드. 에카르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약한 모습 보이는 거 아니야.”

저 또한 지친 것은 마찬가지면서도, 데릭은 애써 어른스럽게 동생을 달랬다.

“이만 돌아가자. 기사들을 데리고 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버지한테 우리 맞아 죽을 거야…….”

징징거리면서도 레널드는 앞서 돌아가는 제 형을 쫓아갔다.

‘따라가야 하는 건가?’

멀어지는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불현듯 손에 들고 있던 손거울이 진동하더니,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왔다.

허공을 향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빛무리는 마치 어딘가를 가리키는 듯했다.

‘하……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나는 착잡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과거를 보여 줘 봤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뷘터 놈 생사나 확인하러 왔다가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려면 일단 나를 끌고 온 이본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터덜터덜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거울이 시키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희뿌연 여명이 아직 닿지 않은 어두운 골목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제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분홍 머리칼을 발견했다.

우걱우걱, 쩝쩝쩝.

골목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아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이본…….’

그녀에게 다가서던 나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우뚝 멈춰 섰다.

이본의 앞에 있는 것은 음식이 아닌, 사람이었다.

“맛있다, 맛있어! 이거야!”

이본은 이름 모를 남자의 목에 달라붙은 채 정신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우걱우걱. 기괴한 씹는 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그녀의 앞에 널브러져 있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반면에 이본의 작은 몸뚱이 주변에 알 수 없는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미친…….’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안 나는, 소름이 쫙 끼쳤다.

형제들이 찾아 헤매는 사이 이본은 이미 레일라에게 몸을 빼앗긴 것이다.

‘그만해!’

미친 사람처럼 인간을 먹어 치우는 레일라를 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쑥 통과해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식사를 모두 끝낸 건지, 아이가 미라처럼 바싹 말라 버린 시체 곁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아…… 아악!”

그때였다. 방금 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게 거짓말인 것처럼 아이가 경기하듯 비명을 질렀다.

“이, 이게 뭐……! 흑, 오빠! 데릭 오빠!”

정신이 든 걸까. 이본이 엉엉 울며 제 오라비들을 찾기 시작했다.

“데릭 오빠! 레널드 오빠! 아무도 없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레일라에게 몸을 빼앗긴 이본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시끄러워! 아니야! 싫어!”

이본이 갑자기 풀썩 자리에 주저앉더니 제 귀를 마구 내리쳤다.

내겐 들리지 않지만, 필시 몸에 들어간 레일라가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아파! 싫어! 오라버니……! 아빠, 나 아파…….”

몸을 있는 대로 구부린 채, 아이는 괴로워하며 훌쩍였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 같아, 괜히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장면이 반전됐다.

시간이 흐른 건지, 이본은 전보다 조금 자라나 있었다.

그러나 걸인처럼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원래의 형태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옷과 산발이 된 머리로 이본은 어두운 골목만 하염없이 거닐었다.

누가 봐도 정신을 놓은 것 같은 모습에, 종종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런 아이를 뒤쫓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의 안에 숨어 있던 괴물이 튀어나와 인간들을 끔찍하게 잡아먹었다.

배가 부른 괴물은 깊은 잠에 들었다.

그때마다 ‘진짜’ 이본은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억 못 하는 사이 제가 저지른 일을 발견한 그녀는 하염없이 울며 경기했다.

“아빠! 오라버니! 레이나!”

필사적으로 가족을 찾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진실의 거울’이 왜 내게 이것을 보여 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본의 과거를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일라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이제 인간을 먹어 치워도 이본이 정신을 차리는 일은 드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눈에 힘이 들어가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깜빡, 장면이 전환됐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지저분한 페넬로페와.

“페넬로페, 아가. 나와 함께 공작저로 가자꾸나.”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공작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골목에 붙어 선 이본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미의 시체를 뒤에 두고 망설이던 어린 페넬로페는, 이내 구원 같은 그 손을 와락 붙들었다.

공작이 그런 페넬로페를 번쩍 안아들었다.

“……우리 아빠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본이 혼몽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빤데…….”

그러던 그녀가 갑작스레 주저앉아 제 머리를 붙들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또 레일라가 삿된 소리를 지껄이는 듯했다.

나는 계속해 그랬듯 이본의 옆에 같이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진 거야.」

스스스스-. 바람결에 들리는 잡음처럼 섬찟한 소리가 내 귓가에도 스쳤다.

“흑, 아니야! 우리 아빠 맞아! 아빠! 데릭 오빠! 레널드 오빠!”

이본이 발작하며 마구 소리 쳤다. 나는 경직된 채 귀를 기울였다.

이본의 흐느낌과 맞물려 아주 작은 속삭임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넌 버려진 거야.」

‘아.’

머리끝이 쭈뼛 서는 음성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본에게 들리던 속삭임이 마침내 내게도 들렸다.

「넌 버려진 거야. 네 아비도 네 오라비들처럼 널 버린 거야.」

이본이 고개를 저으며 레일라의 저주 같은 속삭임에 저항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우리 아빠는 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했어.”

「멍청한 년.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면 왜 그간 기사 한 명 마주치지 못한 건데? 넌 계속 수도에 있었잖아. 널 찾지도 않았다는 소리야.」

“아니야, 아니…….”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 네가 멍청하고 쓸모없으니까 널 버리고 새 딸을 찾은 거라고. 더 예쁘고, 똑똑한 새 딸! 페넬로페 말이야!」

“흐, 흐으, 으윽…….”

쉴 새 없이 귓가에 쏟아지는 폭력 같은 말에 흐느끼던 이본의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레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의 영혼과 정신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

「이제 에카르트의 하나뿐인 공녀는 네가 아니라 페넬로페야! 페넬로페, 폐넬로페 에카르트! 이름도 어여뻐라, 으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아, 아니…… 으으, 흐으.”

가느다랗게 붙어 있던 이본의 생명이, 숨소리가 기어이 멎는 게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소용 없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본에게 와락 팔을 뻗었다.

“듣지 마.”

지금까지 수없이 만지려 했음에도 그대로 통과하던 내 손이,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아이를 붙들었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나는 두 손으로 이본의 귀를 힘껏 틀어막으며 말했다.

“다 거짓말이야. 네 아버지랑 오라버니들은 단 한 번도 널 잊은 적 없어.”

바들바들 경련하며 숨소리가 잦아 들어가던 이본의 몸이 그 순간, 우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파직, 파지직-!

주변 골목의 장면들이 유리 조각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겪어 본 일이라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파죽지세로 갈라지던 환영들이 얼마 안 가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마침내 이본과 나, 둘만이 검은 공간에 남겨졌다.

“……네가 모든 걸 다 뺏어갔어.”

쭈그려 앉은 채 내게 귀가 틀어막아진 그대로 이본이 원망스럽게 날 올려다보며 훌쩍였다.

“그리고…… 여기 갇혔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