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0화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망할 ‘진실의 거울’이 왜 내게 이본의 과거를 보여 준 것인지.
나는 이본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차분히 읊조렸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
“네 자리를 대신하면서 좋았던 적 단 한 번도 없어.”
차마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죽은 후에 이곳에 영혼이 갇혀 버린 이본과는 달리, 그래도 페넬로페는 리셋되기 전까지 살아 있긴 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
하지만 내 말이 믿기지 않은 건지 이본이 바락 외쳤다.
“아빠랑 우리 오빠들 다 차지했잖아! 우리 집도! 공녀 자리도!”
나는 난처해졌다. 아무리 내가 나잇살 더 먹은 어른이라지만,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덴 재주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나를 잘 봐, 이본.”
“…….”
“너희 가족이 공작가로 날 데리고 온 이유가 뭘 것 같아?”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입에 담을 뿐.
“…….”
이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궁금한 이유이긴 한지, 훌쩍이면서도 나를 빤히 노려보며 답을 찾았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가 입을 벌렸다.
“……모르겠어.”
“내가 너랑 닮아서야.”
“……어?”
“나를 통해서 살아 있는 네 모습을 상상하려고. 그래서 널 잊지 않으려고.”
나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물기 어린 푸른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네가 나랑 어디가 비슷한데?”
이본은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덧붙였다.
“머리 색도, 눈 색도 이렇게 다 다른데…….”
“맞아.”
나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자랄수록 너랑 점점 달라지니까 네 가족들은 날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학대했지.”
“뭐……?”
“그래서 나는 매번 비참하게 죽었단다. 네가 여기서 매번 과거를 되풀이했던 것처럼, 수없이 반복해서 죽었어.”
“…….”
“이제 위로가 좀 돼?”
내 말에 이본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농담이라 치부할 생각은 없었다.
이본의 과거는 진심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넬로페의 죽음이, 아니…….
내 전생의 수없이 반복된 죽음들이, 빈 말이라도 없었던 일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거, 거짓말……. 우리 아빠랑 오빠들이 그럴 리, 그럴 리…….”
이본은 내 말이 믿기지 않은지 울먹거렸다.
제게는 그토록 상냥하던 가족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믿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본의 충격이 가라앉길 잠잠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혼란을 조금 추슬렀는지 이본이 물었다.
“……넌 여기 왜 왔어? 나처럼 너도 죽어서 갇혔어?”
“아니, 난 살아 있지.”
“그럼…….”
“뷘터 베르단디를 데리러 왔어. 그래야 너도, 나도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뷘터……?”
내 말에 푸른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물었다.
“어디 있는지 알지?”
“……말 안 할 거야!”
그러나 아이가 심통 난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아저씨는 너 때문에 죽을 거라 그랬단 말이야!”
“…….”
“저, 정확히는 네가 성공 못 하면 죽을 거라 하긴 했는데…….”
대꾸 없이 빤히 바라보자, 이본은 먼저 알아서 슬그머니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더니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뭘 성공 못 해?”
나는 그 물음에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좀 레널드 같은 기질이 있군.’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좀 소름끼쳤다.
나는 얄밉게 구는 이본에게서 고개를 팩 돌렸다.
“너도 말 안 해 주는 걸, 내가 왜 말해 줘야 돼?”
“그, 그건…….”
“아, 몰라. 믿기지 않으면 너도 나처럼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고 오든지.”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왜 나만 남의 죽음을 관전하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그도 모자라 애까지 달래야 하는 건가.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대화가 끊기자, 자연히 걱정이 몰려왔다.
‘……칼리스토는 돌아왔으려나?’
아마 돌아왔을 것이다.
이 안에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궁을 나설 때만 해도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내가 사라진 걸 알고 난리를 칠 칼리스토 생각에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거울을 훔쳐 간 이본을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되리란 예상이 빗나간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불공평해.”
문득 방만하게 드러누운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이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죽었는데, 왜 넌 살아 있어?”
나는 슬쩍 눈을 떠 옆을 바라보았다.
“나도, 우리 아빠 보고 싶어. 데릭 오빠도, 레널드 오빠도…….”
아이는 아이인 건지, 이본이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울지 마.”
난 별로 안 보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일단 여기서 나가야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겠니?”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는데?”
“글쎄. 나도 잘 몰라. 우선 자꾸 시간을 돌리는 뷘터 놈을 멈추게 하는 수밖에.”
“…….”
아이를 자극해 봤자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통한 건지, 다행히 이본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서늘한 감촉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오른손을 감쌌다.
“……이리 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시무룩한 얼굴로 내 손을 슬며시 잡아끄는 아이가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본의 손에 이끌려 검은 공간을 얼마쯤 걷자, 아까 마주했던 것과 비슷한 하얀 문이 생겼다.
이본은 내 손을 놓고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을 앞에 두고 조금 주춤했다.
괜히 넘었다가 아까와 같이 무력한 상황이 반복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뭐 해? 빨리 와!”
그러나 하얀 빛 안쪽에서 들리는 말간 목소리에 용기를 냈다.
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낯익은 곳이 나를 맞이했다.
해골이 잔뜩 쌓인 계단 아래 바닥,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광활한 공간은 레일라의 무덤이었다.
나는 흠칫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모습의 ‘진실의 거울’이 보였다. 이본을 따라 들어온 문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저기.”
먼저 앞장섰던 이본이 쪼르르 달려와, 멍하니 뒤를 바라보고 있는 내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뷘터……!’
드디어 찾았다. 나는 그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전에 한 번 보았던 거대한 마법진이 여전히 선명하게 제단의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더는 불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그 한가운데 있는 뷘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작님!”
나는 마법진을 가로질러 한달음에 뷘터에게로 달려갔다.
산 채로 불타오르는 일이 고단했는지, 못 본 새에 그의 얼굴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설마…… 죽은 거 아냐?’
부름에도 답하지 않은 그를 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후작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그의 가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거멓게 탄 마법진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손을 뻗어 그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뷘터는 맥없이 흔들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평소라면 숨을 쉬는지 코 밑에 손가락을 대 확인했겠지만,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짝-!
“후작님!”
그래서 무작정 그의 뺨을 두드렸다.
“후작님, 제발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후작님!”
“으, 으음…….”
천만 다행히도 두어 번 더 내리치자 정신이 드는지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놈을 찾기 위해 조금 전 겪었던 개고생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하여 뷘터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짝! 짝, 짜악-!
“후작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후작님!”
“정신 차렸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이본의 말은 애써 무시했다. 그때였다.
“으…… 레이디?”
“후작님, 정신이 좀 드셨어요?”
나는 번쩍 쳐들었던 손을 허겁지겁 내렸다.
가물가물 눈을 깜빡이던 그가 물었다.
“제가…… 벌써 죽었습니까? 혹시 세계가 멸망하고, 다 같이 천국에 온 건지…….”
“안 되겠어요. 몇 대 더 맞으셔야 정신을 차리시려나 보네요.”
“아닙니다!”
그제야 뷘터 놈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지 나를 연신 훑어보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레이디, 대체 여긴 어떻게…….”
그러던 중 문득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더듬더듬 제 몸을 만졌다.
“마법진이…… 발동을 멈췄군요.”
그의 움직임을 따라 재 가루들이 부스스 흩날렸다.
그것을 충격 어린 얼굴로 바라보던 뷘터가 마침내 떨리는 군청색 눈을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설마…… 성공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