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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242화 (24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1화

나는 시큰둥한 음성으로 답했다.

“성공한 게 안타깝다는 투로 들리는데요.”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애석하게도, 이본을 죽인 지는 꽤 됐어요. 즉 후작님을 속박하고 있던 마법진이 발동을 멈춘 것도 꽤 됐을 거란 소리죠.”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퍼질러 잠이나 자고 있었냐,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뷘터를 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빨리 안 일어나고 뭐 해요! 후작님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미적거리던 뷘터가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꽤 오랜 시간 상황을 파악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고 토로했다.

“……실패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식을 기다렸습니다.”

왜 알아서 먼저 기어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전에 답을 하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까마득한 허공 너머를 헤매던 뷘터의 눈이 내 옆에 서 있던 이본에게 스르륵 옮겨갔다.

“어느 순간부터 이 아이가 눈에 어른거리기에…….”

“…….”

“죄책감에 보는 과거의 환영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다 됐다고 여겼는데…….”

그래서 마법진이 멈춘 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누워 있었단 소리였다.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가까스로 넘겼다.

어쨌든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 게임과는 연관 없는 진정한 미래의 첫발을 떼었기에.

“……이 애는 ‘진짜’ 이본이에요.”

“아.”

“레일라에게 몸을 빼앗긴 후에 줄곧 시공간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뷘터에게 우선 이본의 정체부터 설명했다.

말하다 보니 문득, 어쩌면 시스템을 빙자한 고대 마법사들이 어린 이본의 영혼을 붙들어 놓은 것일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각조각 부스러진 페넬로페의 영혼을 그러모으다 못해 다른 차원으로 튕겨 나간 나까지 데리고 온 것처럼.

‘그래서 이본 없이 레일라만 회귀한 거구나.’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레일라에게 매 순간 영혼이 말살당하는 것을 어린 이본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알아들었다는 듯 뷘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이 이렇게 된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어떻게 나가요?”

“글쎄요. 제가 볼 땐…… 저 ‘진실의 거울’이 바깥과 연결된 통로일 듯합니다.”

뷘터가 내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올 때도 복원 중이던 거울을 통해 왔으니,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이본 하나였다. 나는 아이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나가기 전에 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봐요.”

뷘터 놈이 살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스템도 모두 사라진 지금, 그라면 뭔가 해결할 방안이 있을 테니까.

이왕이면 모두가 해피엔딩인 편이 좋지 않은가.

나는 이본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 가능하다면 원래 가족에게로 돌려보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물끄러미 이본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방법이 없습니다.”

“왜요?”

“레일라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면, 영혼이 돌아갈 육체가 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말문이 막혔다.

마냥 마법으로 어떻게 될 줄만 알았지, 그런 현실적인 문제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를 사이에 두고 우리 둘이 심각한 얼굴로 두런거리자, 이본이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뒤늦게 애 앞에서 못할 소리를 했다 싶어 얼른 손을 뻗어 이본의 귀를 틀어막았다.

“넌 알 필요 없어.”

“씨, 내 얘긴데 왜 알 필요가 없어? 놔아!”

“스읍, 혼나요.”

내 손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이본을 저지하며 나는 뷘터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따로 찾아보진 않았지만, 공작가에서 유골을 수거해 갔을 거예요.”

“…….”

“그걸로…… 어떻게 할 순 없어요?”

“……레이디.”

“이대로 여기 계속 갇히게 둘 순 없어요. 계속 자기가 죽는 순간만 봤을 텐데…….”

그걸 보고, 어떻게 두고 간단 말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속삭이는 내 말에 뷘터 또한 덩달아 안색을 굳혔다.

그때였다.

“바보, 귀신이 귀 막는다고 안 들리는 게 어디 있어?”

불현듯 좀 떨어진 곳에서 맹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느 틈에 빠져나간 건지 뷘터의 등 뒤에서 내게 혀를 쏙 내밀고 있는 분홍 머리가 보였다.

“이게, 어디서 어른을 놀리고…….”

“나 여기서 나가는 방법 알아.”

한마디 하려던 나는, 이어지는 이본의 말에 멈칫했다.

“뭐? ……어떻게?”

“가끔 이상한 네모 창이 떠서 물었어. 수락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새로 태어날 수 있대.”

“수락……?”

나는 멍하니 이본을 바라보았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이가 시스템 창을 봤다는 것은 참 기이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조금 전 지레 짐작했던 것들이 사실이 되었다.

‘역시…… 고대 마법사들이 수를 쓴 거였어.’

새로 태어난 것이라면 나처럼 다른 차원으로 환생하는 것일까.

복잡한 표정으로 이본을 응시하던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수락하지 않았어?”

그러자 아이의 얼굴이 삐죽삐죽 허물어졌다.

“가기 싫었어.”

“…….”

“가서, 우리 아빠랑 오빠들 다신 못 보면 어떡해…….”

나는 터져 나오는 탄식을 가까스로 삼켰다.

고대 마법사들의 제안에도 이본이 왜 이 컴컴한 공간에 홀로 남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끔찍한 죽음이 되풀이되는 환영이어도, 그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겐 그런 고통을 감수할 만큼의 애정이 없어서, 그런 이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이 없는 내 눈치를 보며 이본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꼭 가야 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레이디.”

내 딱딱한 대답에 뷘터가 놀란 듯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이해시키는 대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본에게 건넸다.

“자, 네 거울.”

내 거울 봉, 아니, 데릭에게 선물 받은 이본의 손거울이었다.

“내가 주웠어. 이제 잃어버리지 마.”

아이는 놀란 얼굴로 손거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푸른 눈에 물기가 넘실넘실 차올랐다.

“……흑.”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다.

“네 아버지와 오라비들, 잘 지내.”

그 인간들이 친딸을 찾아 헤매며 어떻게 지내 왔는지 따위, 내 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본에겐 둘도 없이 절절한 가족들이겠지만, 페넬로페에게는 자신을 수없이 비참하게 죽도록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친딸이 돌아오면 공작저에서 쫓겨날까 봐, 페넬로페는 내내 불안에 쫓기듯 살았고 그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행동했다.

‘그런데, 뭐가 예쁘다고 근황까지 전달해 줘?’

하지만 그런 걸로 심술을 부리기엔 나는 너무 성장한 후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없어도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사랑해 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되새기며 나는 덤덤하게 읊조렸다.

“……매년 널 잃어버린 시기만 되면 널 그리워하느라 힘들어해. 그래도 다들 내색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혹시라도 네가 알면, 슬퍼할까 봐.”

“…….”

“특히 네 아버지…… 공작님은, 네가 어디 있는 항상 행복하고 편안하길 매일같이 기도하셔.”

“흐, 흐흑…….”

무표정한 나와 달리 이본의 여린 뺨을 타고 굵직한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애를 설득하기 위해 묵묵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네가 아직도 여기 이러고 있으면 내가 돌아가서 네 소식을 전할 수가 없어.”

“너는…….”

이본이 물먹은 숨을 헐떡이며 되물었다.

“……너는 내가 안 미워?”

“내가 널 왜 미워해?”

“우리 가족들이…… 나 때문에 널 죽게 만들었다며.”

“네가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니니, 넌 관계없는 일이지.”

나는 다소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리고 곧이어 덧붙였다.

“그리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야.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 해도, 너같이 사랑스러운 동생을…….”

“…….”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축제 마지막 날, 고작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다락방에 올랐다는 이유로 나를 헐뜯었던 레널드.

이본의 자리를 차지한 내가 아니꼬워서 사사건건 페넬로페를 깎아내리던 데릭과 매번 말없이 관조만 하던 공작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제 자리를 차지한 내가 저를 미워할까 걱정이나 하는, 이렇게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코앞에서 잃어버렸다면.

나 또한 미쳐 날뛰지 않았을까.

“아…….”

작고 여린 두 손으로 하염없이 뺨을 닦아 내던 이본이, 문득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 눈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시스템 창이 떠올랐음을.

“여기 남을지 말지, 선택하는 건 네 자유야.”

물기 어린 이본의 푸른 눈이 내게로 옮겨졌다.

꽤 오랜 시간 입을 벙긋대던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빠랑 오빠들한테…….”

“…….”

“나 잘 있다고…… 내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 줄 수 있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도 이본에게 놈들의 근황을 전달해 준 마당에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데릭 오라버니한테 손거울 사 줘서 고맙다고, 잃어버려서 미안하다고도 말해 줘.”

“그래, 그렇게 할게.”

“그럼…… 그럼 나, 나 갈게.”

내가 건넨 손거울을 끝내 받지 않은 채, 이본이 마침내 작별 인사를 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행동에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얼마 안 가 작은 몸이 환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본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 행위를 멈춘 것은, 뷘터가 다가서며 말을 걸었을 때였다.

나는 텅 빈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저는 항상 레이디의 웃는 얼굴보단 눈물을 흘리는 얼굴만 마주하는군요.”

그의 말에 나는 뒤늦게 손을 올려 얼굴을 쓸었다.

어느 순간 이렇게 된 걸까. 손가락에 흥건한 물기가 묻어났다.

나는 낭패 어린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손수건을 드리고 싶은데, 죄송하게도 상태가 이 모양인지라…….”

“괜찮아요.”

퍽 미안한 얼굴인 뷘터에게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손으로 닦으면 되죠.”

그리고 주섬주섬 얼굴을 훔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괜히 들킨 것 같아서 좀 민망해졌다.

그런 내 행동에 잠시 말이 없던 뷘터가 문득 혼잣말처럼 고요히 중얼거렸다.

“……이젠 눈물을 닦아 줄…… 아니.”

“…….”

“예전처럼 위로를 해 드릴 자격조차 제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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