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외전 12화
“……후작님.”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뷘터의 말에 난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뷘터가 그런 나를 담담하게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도, 당신은 언제나 슬픈 얼굴이었지요.”
“…….”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레일라와 연관되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순간에도. 차마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사이 많이 야윈 그의 얼굴에 애처로운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더 이상은 그래 보이시지 않는군요.”
나는 그의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천천히 되물었다.
“이제…… 어때 보이는데요?”
“후련해 보입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게 티가 났던 건가. 나는 내심 놀랐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챈 건지 뷘터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겠지요.”
“…….”
그러고 보니, 이본 때문에 뷘터가 이곳에 내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 내고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레일라를 처치하고, 진짜 이본의 영혼까지 타계시킨 레이디께 한없이 죄송하고 감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갇혀 있던 저를 구하러 온 것이 너무…….”
“…….”
“너무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군청색 눈동자에 뜨끔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제야 나는 그가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게임이 끝났음에도 남주 중 한 명이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정말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이젠 정말 현실이구나.’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뷘터에게는 꽤 가혹한 일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번 내 앞가림하기도 바빠 그가 지닌 마음 같은 건, 깊게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뷘터는 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이제 그도 ‘나’라는 미련을 끊고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후작님.”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황태자 전하 좋아해요.”
“…….”
“생각보다 많이요. 레일라에게서 도망치려던 걸 포기할 만큼.”
“…….”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천천히 흐려지는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는 시선을 내렸다.
문득 후회가 들었다. 그때 이렇게 명확히 거절했다면, 그가 나를 좀 더 쉽게 털어 낼 수 있었을까.
- ……관심이 있다고만 하시지 않으셨어요?
- 죄송하지만, 저는 못 받아드려요.
그 당시엔 솔직히 뷘터를 상처 입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레일라도 모자라 이본을 죽이려 드는 악녀로 의심하는 게 괘씸했다.
그래 놓고 좋아한다는 말이, 날 위해서 평생을 지켜오던 신념을 저버렸다는 말이, 그리도 우스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가 밉지도, 우습지도 않았다.
미리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거절하는 것이 정말로 미안하진 않았다.
그저,
뷘터 또한 이제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그랬군요.”
내 말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예상…… 못 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때도 전하께서 계신 북방으로 간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
“레이디께서 공작가를 출타하셨을 적, 황태자 전하께서 제 저택에 세 번이나 방문했었습니다.”
“……네? 후작님의 저택에 왜…….”
그 순간이었다.
- 그대가 공작저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황궁 마법사를 족쳐서 미친놈처럼 수도로 달려갔다.
- 그래도 그 악령 씐 놈이랑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후작가에서 그놈 면상을 보는 순간, 내가……! 내가…….
아르키나 제도로 가는 배 위에서 재회했을 때.
성난 얼굴로 버럭 소리치던 황태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미친. 그럼 그 말이…….’
나는 뜨악한 얼굴로 뷘터를 돌아보았다.
그가 좋게 ‘방문’이라 포장했지만 나를 찾으러 후작가에 쳐들어간 칼리스토 놈이 얼마나 패악을 부렸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후작님. 그 미친…… 아, 아니, 전하를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나는 ‘돌아가서 보자’고 속으로 되뇌며 허둥지둥 뷘터에게 사과했다. 그때였다.
“……다행입니다.”
머리맡에 나직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이제, 레이디를 웃음 짓게 할 사람이 곁에 있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심인지, 뷘터는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의 시선이 못 박힌 뺨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분명 칼리스토 놈의 만행에 찌푸리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어느덧 한결 풀어진 얼굴 근육이 느껴졌다.
민망한 기분에 잠시 시선을 피하던 나는, 이윽고 뷘터를 마주 보며 읊조렸다.
“저 이제 후작님 신뢰해요. 그러니…….”
“…….”
“후작님도 더 이상 제게 죄책감 갖지 마세요.”
뷘터는 내 말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붉게 젖어 드는 것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나는 그가 치밀어 오른 감정을 삭이기를 잠잠히 기다렸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여기서 나가면, 계약은 변동 사항 없이 철저히 이행될 겁니다.”
문득 내 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그 어느 곳보다 가장 순도 높은 마력을 보석에 새겨 유통할 자신 있습니다.”
“…….”
“저희 상단을 신뢰하여 맡겨 주신 일 아닙니까.”
한발 늦게 상단의 주인으로서 내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당연하죠.”
나는 그제야 덩달아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저한테 목숨도 빚지셨어요. 제가 또 셈 하나는 철저한 거 아시죠?”
“이런.”
뷘터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신음했다.
나는 그를 흘끔 흘겨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 빚 다 갚으려면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나는 그와 악수한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머릿속에 바이엔 왕국은 물론, 세계로 뻗어나가는 내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 그려졌다.
뷘터가 짓궂은 내 말에 졌다는 양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요.”
미련 없이 잡은 손을 놓고 돌아섰다.
뷘터가 우두커니 제 손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 ‘진실의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시공간 저편의 부서진 것과는 달리 멀쩡한 거울 앞에 서자, 비로소 끝이 실감 났다.
이제 더는 이 망할 거울을 마주할 일이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나는 싱숭생숭한 심정으로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고대 마법사 영혼들에게 중얼거렸다.
“나가는 동안 다른 시공간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번거롭겠지만 제 손을 꼭 잡고 계십시오.”
그때, 문득 옆에 다가와 선 뷘터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우리 둘은 동시에 거울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얀빛이 눈앞에서 점멸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어…….”
작업 현장에 빽빽하게 가득 찬 무장한 기사들의 모습과.
“……전하?”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일그러진 얼굴로 우뚝 서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찾았는지, 내가 침실에 꽁꽁 숨겨 둔 검을 당장이라도 거울에 내리칠 것처럼 치켜들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그것을 내렸다.
그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덜컥 드는 걱정에,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그의 시선이 스르륵 어딘가를 향해 내려갔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불현듯 그가 무척이나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시뻘건 눈이 희번덕거렸다.
‘X 됐다.’
뷘터와 맞붙잡고 있던 내 손에 못 박혀 있는 반쯤 돌아간 시선을 깨닫자, 오싹 한기가 들었다.
“아, 전하. 이건, 그러니까…… 잠시 제 말 좀…….”
헐레벌떡 뷘터의 손을 털어 내며 그에게 설명하려 들었지만.
“포박하라.”
나지막한 음성이 더 앞섰다.
그의 친위대는 황태자의 명령에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곧장 뷘터를 둘러싸고 얇은 밧줄로 그의 두 팔을 묶었다.
전에 나도 한 번 묶여 본 적 있는 마도구였다.
“후, 후작님!”
뷘터는 딱히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버벅이며 그 꼴을 바라보다, 휙 몸을 돌려 따져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방금 탈출한 사람한테 무슨……!”
“뭣들 하고 있지? 에카르트 공녀도 포박하지 않고.”
그러나 내 말을 싸늘히 끊으며 황태자가 읊조렸다.
“……전하.”
‘난 왜요?’
내 근처에서 주춤거리던 친위대에게 포박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내 손에 묶인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이 망나니는 내가 직접 호송하지.”
밧줄의 끝을 기사에게서 당당하게 넘겨받은 칼리스토가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지껄였다.
나는 그렇게 포박된 채 황태자에 의해 친히 궁까지 압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