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화
프롤로그
게임 속 세상은 불합리하다.
고작 박진감을 전해주기 위하여, 플레이어의 즐거움을 위하여.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죽어나간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
내게는 이제 비극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잘부탁드립니다.
제 1화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사는 세상은 군인에게 각박했고, 장애인에겐 가혹했다.
전역한 다리병신인 나한텐 특별히 더 가혹했고.
그러니 내가 술담배에 찌든 게임 폐인이 되었더라도 그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막상 이 꼴이 난 걸 보면 내 잘못같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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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르님...!"
방 너머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반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뭐하는 놈이길래 이리 소리를 질러대는 거야.
새벽까지 게임하는 폐인들 인권도 좀 생각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밤새 퍼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가 뇌를 부여잡고 흔들어대는 것 같아 토할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다.
마시고 잠들고, 일어나 후회하고.
그리고 다시 잠들기 전까지 마시고.
얼굴을 온통 뒤덮은 머리카락이 짜증스럽게 코끝을 간질였다.
나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적당히 걷어내었다.
긴 머리칼 몇 가닥이 손끝에 얽혀, 따끔한 통증을 남기며 뽑혀나갔다.
잠깐만,
긴 머리...?
"뭐야 시발...?"
목소리 뭐야.
튀어나온 목소리에 경악하여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머리카락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담배에 찌들어 거칠고 탁해진 남자 목소리 대신, 술 취한 여자 목소리가 목구멍 너머로 흘러나왔으니까.
심지어 한국어도 아니었다. 무슨 뜻인지 자연스럽게 이해되긴 했지만, 명백하게 이질적인 발음이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에 변해 버린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몸.
누구라도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해하며 소란을 피울 법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침착해져야 하는 법이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상황을 확인한다.
일단 머리카락, 색은 여전히 검은색이지만 관리하지 않아 떡진 더벅머리 개털에서 허리까지 닿는 긴 장발로 변했다.
팔, 여전히 근육은 붙어 있지만 놀랍도록 매끄럽고 가늘어진 데다가, 피부색도 상당히 밝아졌다. 어딜 봐도 운동 좀 한 여자 팔이다.
가슴, 크다.
내려다본 몸뚱이는 명백히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다리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조심스레 허리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있다.
다리가, 붙어 있다.
탄탄한 허벅지부터 종아리를 거쳐 발끝까지.
아름다울 정도로 건강미 넘치는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하, 하하..."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리 사이는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예전에 쓸 만큼 썼으니 이제 이별할 때도 되었지.
아무튼 이쯤 되니 대충 알겠다.
이건 5,700자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 속 TS빙의가 틀림없었다.
5,700자는커녕 57자도 쓴 적 없지만.
세 번째 다리는 잃어버렸다지만, 다리 하나를 대가로 다리 둘을 되찾았으니 이 정도면 등가교환 아닐까?
거울이 없으니 얼굴은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몸도 나름 건강미 넘치고 멋진 몸인 거 같으니.
그렇겠지?
이제 와 둘러보니 방도 내가 살던 방이 아니었다.
콘크리트에 곰팡이 핀 벽지를 처바른 좁아터진 원룸 대신, 널찍한 천막에 가죽을 덧댄 듯한 공간.
내가 누워 있던 가구도 침대가 아니라 밀짚같은걸 털가죽으로 덮어놓은 매트리스였다.
전체적으로 한 500년쯤 전에나 썼을 법한 유목민풍 인테리어에, 머리맡에는 긴 장검까지.
보아하니 인방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현대물은 아닌 거 같고, 아무래도 게임이나 소설 빙의 같은데. 잘 모르겠다.
"하샬르님, 일어나셨습니까?"
잠을 깨웠던 사내의 목소리가 천막 밖에서 다시 들려왔다.
하샬르라, 그게 내 이름인 건가? 역시 누군지 모르겠네.
아무튼 옷부터 입어야겠다.
저 사람에게는 일단 기다리라 말해야겠지.
반말로 대답해야 하나? 내 이름에 존칭을 붙여 부르는 걸 보면 아마도 아랫사람이겠지?
"잠시 기다리거라. 지금 막 깨어난 참이니."
"예!"
적당히 대답할 말을 떠올려 말해 보니 이 몸에 밴 듯한 언어와 말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빙의자 보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말버릇으로 의심 살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네.
나무 옷걸이에 늘어져 있는 옷을 입으려 침상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적 없던 부위를 움직이는 것이라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다행히 다리는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었다.
왼 다리를 침상 아래로 내려놓고, 오른 다리를 마저 내려놓고.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키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대로 일어선다.
일어섰다.
마침내.
발끝에서부터 치밀어오른 저릿한 박동이 심장을 두들겨 깨웠다.
희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게 누구의 몸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갑자기 여자로 변해 버린 몸뚱이가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다시 다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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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일어서고 나니 그 뒤는 손쉬웠다.
옷걸이로 보이는 가구로 걸어가, 걸쳐진 옷들을 확인해 보았다.
얇은 천 쪼가리 두 개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듯한 바지.
무릎 근처까지 올라오는 가죽신. 제법 두터운 천으로 만든 상의.
두터운 털가죽 위에 금속인지 동물 비늘인지 모를 은빛 찰편들을 엮어 덧댄 갑옷.
상당히 오랫동안 입었던 옷들인지 죄다 땀 냄새가 좀 배어 있었다.
아무튼 이 천 쪼가리들은 형태나 냄새를 보아하니 속옷 같고...나머지는 그 위에 걸치는 옷이겠지.
작은 천 쪼가리를 아래에 대고 양 끄트머리를 묶어 팬티처럼 만들고, 큰 천 쪼가리를 적당히 가슴에 감아 묶었다.
가슴이나 음부에 손이 닿는 감각은 생소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지 딱히 자극적인 느낌은 없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가죽으로 된 바지는 생각보다 유연했고 반대로 신발은 무기로 써도 될 만큼 단단했다.
그 와중에 상의는 이 세상이 게임이나 소설 속 세상임을 증명하듯, 배와 팔을 훤히 드러낸 탱크탑 디자인의 천옷이었다.
...솔직히 상의만 이모양이니 좀 어이가 없긴 한데.
갑옷은 총 다섯 종류였다.
숄 형태의 짧은 망토와 긴 스커트, 정강이에 덧대는 듯한 철판과 마찬가지로 철판을 덧댄 장갑 한 쌍.
그리고 등과 가슴어림을 덮는 미늘 조끼까지.
다행히도 혼자 입기 어려운 구조의 갑옷들은 아니네.
적당히 갑옷들을 걸치고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던 검까지 허리에 매달았다.
신기하게도, 꽤 묵직해 보이는 갑옷들인데도 전혀 무겁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몸뚱이는 내 생각보다도 힘이 훨씬 강한 것 같다. 반가운 일이지.
적당히 무장을 갖춰 입은 뒤, 안쪽에 놓인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밖에 있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파악하려면 만나 봐야 한다.
"하아아아..."
가슴을 옥죄는 갑갑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로 긴장되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괜찮겠지. 말투 자체는 자연스럽게 번역되는 것 같으니.
행동만 조심한다면 의심을 사진 않을 거야.
"되었다. 들어와도 좋다."
"예. 실례하겠습니다."
곧바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천막 입구의 가죽을 들쳐올리며 들어왔다.
180cm는 되어 보이는 큰 키에 두툼한 가죽 갑옷을 걸친 거구의 동양인이었다.
옷 너머로도 근육이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단련된 몸.
군데군데 드러난 살갗에는 베이고 찢긴 흉터가 빼곡했다.
거기에 사람을 산 채로 씹어먹을 것처럼 생긴 흉악한 면상까지.
그야말로 몽고의 초원을 달리는 마적떼마냥 생겨 먹은 남자였다.
군인 시절에도 저렇게 살벌하게 생긴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5배쯤 강해졌다.
저 주먹에 얻어맞았다간 두개골이 그대로 함몰될 거 같으니까.
사람 몸에서 함몰되어도 괜찮은 부위는 유두 뿐이야.
남자가 한 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말이라도 걸어 보자.
이름을 물어보고 싶은데, 저 남자가 내 측근이거나 그렇다면 이름을 물어보는 순간 의심을 사겠지.
그러니 그건 포기하고.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어제 붙잡은 포로들을 어찌할지 아직 명을 내리지 않으셔서..."
"......포로?"
"예. 어린 놈들 스무 마리에 계집이 서른 둘입니다. 젊은 계집들은 명하신대로 전사들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만, 역시 말도 못 타는 계집들을 하사받길 원하는 전사들은 없었습니다. 전부 노예로 팔아버리면 되겠습니까?"
세상에.
아니 이 새끼들 진짜 마적떼 같은 건가? 내가 마적떼 두목이고?
어질어질하네.
"...그것들을 굳이 노예로 팔아버릴 필요가 있느냐?"
"예? 하, 하오나 그건 좀..."
노예로 팔아버리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서 물어봤더니 남자가 갑자기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야 노예로 팔면 돈이야 되겠지 아마.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빙의하자마자 하는 일이 여자들과 애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이라니.
그런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필요, 없겠지?"
"...예, 필요 없습니다!"
적당히 말을 끊으며 압박하자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동의했다.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거지? 내가 무섭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래도 내 지위가 생각보다 훨씬 높았나 보다.
남자의 태도 때문인지 어느새 처음 느꼈던 압박감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래. 그냥 그놈들 가족 곁으로 보내주거라. 노예는 필요 없으니."
"가족 곁으로...? 아, 알겠습니다. 전사들에게 그리하라 전하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내려다본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땀이 많은 체질인가?
"그것 말고 다른 용건은 없는 거겠지?"
"예...어제 명하신대로 회군을 준비 중이니, 곧 하샬르 님의 게르를 정리할 시종들이 올 겁니다."
"그래. 그럼 그만 나가보도록."
"실례했습니다."
남자가 천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몸에 힘이 탁 풀리며 두통이 밀려왔다.
관자놀이가 지끈지끈해 왼손으로 지그시 짓눌렀다.
빙의한 순간의 당황스러움도, 두 다리로 일어섰던 순간의 희열도 사그라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충격적인 현실에 그저 막막함만이 남아버렸다.
마적떼 여두목...? 뭐야 이게.
내가 읽었던 소설이나 플레이한 게임 중에 그런 주인공은 없었는데.
애초에 사람들을 습격해 노예로 팔아버리는 역할이면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이겠지.
그리고 악역들은 보통 주인공에게 도살당하기 마련이다.
......미녀 악역이라면 그것보다 더 처참할 수도 있고.
일단, 어떻게든 의심을 사지 않는 선에서 여기가 어딘지 확실히 알아내야 한다.
정말 운이 좋아서 내가 아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 정도야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그러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답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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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뭐지, 그러고 보니 회군을 준비한다고 했던가. 시종을 보내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아아아아악!"
"살, 살려주세요 제발...!"
"엄마! 엄마아아! 엄,"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려주신다고 했잖아요! 어째서...?!"
소음이,아니야.
전신의 피가 발끝으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했다.
비명, 그것도 도살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나도 모르게 검을 움켜쥐고 천막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눈앞에 도살장이 펼쳐져 있었다.
갑옷을 걸친 남자들이, 묶여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창에 꿰뚫린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휘젓고, 칼에 베여 엎어진 어린아이가 꿈틀대며 어미를 찾는다.
목이 잘린 시체들이 움찔거리며 핏덩이를 토해냈다.
흙바닥을 적시다 못해 넘쳐흐른 피 웅덩이 위로 도살당한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남자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묵묵히 사람들을 도축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
뭐냐. 이 미친 광경은.
등줄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지고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피와 배설물이 뒤섞인 역겨운 악취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메스껍다. 이를 악물고 구역질이 밀려오는걸 필사적으로 참아낸다.
여기서 토하기라도 했다간, 들킬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짜라는 걸.
이 짐승들 눈앞에서.
그러면, 어떻게 되지...?
"하샬르 님?"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볼이 움푹 패여 음울한 인상의 사내가 의아한 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뒤로는 시종처럼 보이는 행색의 여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직 피로가 덜 풀리셨는지요."
퍽 담담한 말투였다.
내가 저 참상에 경악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듯.
"아니...괜찮다. 그보다, 저건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네? 그야 명하신대로 포로들을 정리중입니다."
"...내가 저런 짓을 명령했다고?"
아니 시발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가족들에게 보내주라고 했다고.
"마을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전부 참하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한 백호장이 그렇게 전했습니다만...?"
아. 그러니까 저 사람 가족들은 이 미친 마적떼들이 진작 다 죽여놨었다 이 말이네.
아까 그 커다란 남자, 그러니까 자한 백호장이라는 남자가 당황했던 이유도, 내 말을 전부 죽이란 소리로 알아들어서 그런 거고.
그럼 이게 다 내 책임인가?
아니. 아니야. 난 몰랐다고.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떨림을 감추려 왼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말리려고 해 봐야 이미 늦었다. 피바다에 엎어져 버르적대던 포로들은 어느새 전부 죽어 버렸으니까.
따질 수도 없다. 내 말을 듣자마자 이런 짓을 벌인걸 보면 이놈들에겐 이게 당연한 일일 테니까.
이제 와서 뭐라 한들 의심만 살 뿐이다.
"아니...자한의 말이 맞다. 내가 그렇게 명했었지...아무래도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야."
"어젯밤에 그 독한 술을 다섯 동이나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하샬르 님이시라도 피로하실 만 하지요."
남자는 그제야 의문이 풀린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피폐물 아닙니다! 초반만 좀 이런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