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2화 (2/100)

제 2화

이런 빙의는 감당할 수 없어

살육을 끝낸 남자들은 무기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뿔뿔이 흩어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 천막 역시 시녀들이 정리하려 하기에, 혹여 꺼내올 물건이 더 있을까 해서 다시 들어왔다.

...딱히 특별한 물건은 없네.

천막 안을 둘러보며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눈을 감아도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뇌리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도무지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딱히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본 건 아니다. 군인이었으니까.

눈앞에서 민간인 수십 명을 베어죽이는 모습이 처음이었을 뿐.

생각하지 말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들키지 않고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적응해야 할 일일 테니.

자꾸만 떠오르는 비명 소리를 무시하고 억지로 생각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래서, 여긴 어디일까. 내가 소설이나 게임 속에 빙의한 건 맞는 걸까.

아, 일단 시대에 맞지 않게 여성성을 강조하는 이 탱크탑같은 웃옷을 보면 빙의물은 맞는 거겠지.

일단 아까 그 덩치 큰 남자, 이름이 자한이라 했던가? 자한 백호장.

백호장이란 건 아마 부하가 백명인 장수라는 뜻이겠지.

자한, 자한...어디서 들어 본 이름같긴 한데.

목에 걸리는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확 떠오르질 않는다.

단서가 뭐라도 하나만 더 있다면 생각날 것 같은데. 답답함에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이샨기오르 공녀님. 뭔가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흠?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 볼 테니 정리해 둬라.

내가 철거해야 할 천막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질 않아서인지, 시종 한 명이 허리를 숙인 채 들어와 있었다.

아이샨기오르? 그게 내 성인가?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아,

생각났다.

자한. 아이샨기오르. 하샬르......헤르셀라.

드디어 여기가 어딘지, 이 몸이 누구의 몸인지 깨달았다.

대전사 자한.

광기의 헤르셀라.

-내가 했던 게임의 보스몹들이었다.

----

'워 오브 렘넌트(WOR)'

한때 그럭저럭 인기를 끌었던 성인용 전략 RPG 육성게임으로, 나 또한 200시간 정도 가볍게 플레이했던 기억이 있다.

영웅 육성기관 '렘넌트 아카데미'에 입학한 주인공이 수많은 훈련과 전투를 통해 영웅으로 성장해, 마침내 세상을 구한다는 뻔하다면 뻔한 스토리의 고전 게임.

뻔한 스토리와 달리 게임성 자체는 꽤 충실했다.

플레이어가 선택한 육성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하는 주인공의 전투방식.

선택지에 따라 적도 동료도 될 수 있는 서브 캐릭터들.

일러스트레이터를 갈아넣은 듯한 패배 능욕씬.

일정 숫자 이상의 동료가 사망하거나 70턴 안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게임오버라는 제한까지.

아무튼 개인적으론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만약 내가 주인공이나 동료 캐릭터로 빙의했던 거라면 기분이 좀 나았을텐데.

"하아아아..."

적당한 상자에 걸터앉아 한창 정리중인 천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벌써 이게 몇 번째 한숨일까. 정말이지 줄담배라도 피고 싶은 기분이다.

WOR의 메인 스토리는 다섯 챕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챕터마다 중간보스와 메인보스가 존재한다.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게임상에선 아이샨기오르 헤르셀라라 불리던 이 캐릭터는 3챕터의 메인보스였다.

대전사 자한은 중간보스 역할이었고.

광기의 헤르셀라.

동양 기마민족들을 모티브로 삼은 야만족 카`하르의 여군주.

카`하르를 힘으로 통일하고, 그대로 제국을 침공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여제.

작중에선 수많은 도시를 초토화시켜 이후 게임 난이도를 급상승시키는 주범이다.

본명은 아마 하샬르가 맞을 테고, 그 이름을 제국식으로 표기해 헤르셀라라 불린 거겠지.

사나운 인상과 야성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외모 덕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나름 인기가 높았다.

다른 카`하르인과 달리, 밝은 피부와 푸른 눈동자 때문에 혼혈이 아닐까 하는 뇌피셜도 있었고.

어릴 적에 어머니가 죽었다는 설정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보스전 때문에, 보통 애미 없는 헤르셀라라고 불렸지만.

문제는 이 캐릭터에겐 미래가 없다는 거지.

주인공에게 패배하여 붙잡힐 경우, 그녀는 제국의 포로가 되어 광장에 알몸으로 묶여 죽을 때까지 능욕당한다.

붙잡히지 않았다 해도, 그녀의 힘을 불신하게 된 부하들의 배신으로 팔다리를 잃고 그들의 노리개가 된다.

심지어 주인공이 패배하는 배드엔딩에서도 그녀의 처지는 달라지진 않는다.

주인공이 패배하면, 그녀는 수많은 나라를 초토화하고 한동안 여제로 군림하긴 한다.

얼마 안 가 최종 보스에게 패해 멸망하고, 그녀 역시 마물들의 출산 노예가 되니까 문제지.

솔직히 그 능욕씬들이 엄청 꼴리긴 하는데, 그거야 감상하는 입장일 때 이야기지.

당사자가 되어 버리면 그건 그냥 참극이다.

지금 난 당사자가 될 예정이고.

세상 시발.

죽은 민간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해병대도 아니고, 남자로 태어나 출산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어떻게든 원작전개만은 피해야 한다.

자진해서 매춘굴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사실 내가 원작의 하샬르처럼 싸울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가만히 있어도 원작전개에서 벗어날 것 같긴 한데.

그랬다간 한번 진 것만으로도 배신해 버리는 이 야만족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문제는 하샬르의 배경 스토리를 내가 거의 모른다는 점이다.

인게임에선 보스몹의 배경설정까지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거든.

공략 사이트에서도 아이템 설명에 나온 정보들이랑 뇌피셜들로 유추한 내용들밖에 없었고.

일단 대전사 자한이 아직 일개 백호장에 불과한 것.

그리고 이들이 나를 공녀님이라 불렀던 걸 생각하면, 적어도 원작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겠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최대한 이 야만인들 사이에서 적응하도록 노력해 봐야 하나?

내가 과연 의심받지 않고 아이샨기오르 하샬르를 연기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이는데. 일단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자꾸만 비관적으로 치달으려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일어섰다.

마침 자한이 건장한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안장을 쓰기는 하는 문화인지 말등에는 가죽 안장이 씌워져 있었다.

"하샬르 님. 슬슬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출발...해야겠지. 알았다."

어딜 가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걸 물어볼 수도 없고.

최소한 안장이 있으니 말을 탈 수는 있겠지...?

말고삐를 붙잡고 안장에 발을 건 채 뛰어올랐다.

가볍게 발을 굴렀는데도 몸이 말등 높이까지 확 치솟았다. 놀라운걸.

일단 말등에 올라타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늘상 해 오던 일들은 몸이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게 맞는 말이었나보다.

다른 이들도 모두 준비를 마쳤는지 슬슬 내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전사로 추정되는 남자들은 모두 무장을 갖춘 채 자신들의 말을 타고 있었고, 여시종들은 분해한 천막들을 쌓아둔 짐마차의 빈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전사들은 얼추 보아하니 한 이백 명쯤 되는 듯했고 시종은 서른 명 정도였다.

스무 명의 전사들이 내 앞에 자리 잡았고, 자한 백호장과 아까 말을 걸어왔던 음울한 사내가 내 양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이 남자도 백호장인 걸까. 백호장이 둘이라 전사가 이백명인 것이고?

전사들 한가운데에 갇힌 꼴이 되니 긴장감에 허리가 뻣뻣해졌다.

고삐를 움켜쥔 손아귀에 식은땀이 배어들어 축축했다.

적어도 내가 선두가 아니란 점만은 다행이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출발하기라도 했다가는 오해를 살 지도 모르니.

그래도 출발 명령은 아마 내가 내려야겠지?

"다들 준비는 끝났겠지? 가자!"

"예!"

일제히 대답한 전사들이 선두부터 서서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기에 별문제없이 따라갈 수 있을 듯했다.

고삐를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리쬐는 주홍빛 햇볕이 눈부셔 오른쪽 눈을 찡그렸다.

북동쪽이라.

이제부터 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여기보단 나은 곳이길.

등 뒤에 펼쳐진 내 죄의 흔적을 애써 외면한 채 나아갔다.

적어도 드리워진 그림자가 시쳇더미를 감추어 주길 바라며.

그래.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앞으로는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할 테니까.

그렇게 다짐했다.

----

이 병신들과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

이 새끼들은 사람이 아니다. 9일, 고작 9일 만에 몇 명이 죽었는지 아는가?

"마을이군. 오늘은 저곳에서 쉬도록 할까."

"예!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기마대 전원 돌격!"

마을 하나가 비명 속에 사라졌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오늘따라 입맛이 없군."

요리를 담당했던 시종이 산 채로 찢겨죽었다.

"하샬르 님?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밖이 소란스러워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지?"

야밤에 떠들던 전사 셋이 참수되었다.

내가 뭔 말을 할 때마다, 사람이 죽는다.

이놈들이 미친 것인지, 원본 하샬르가 그만큼 미친 살인광이었는지.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일단 전부 도륙하라는 명령 쯤으로 알아듣는 것 같다.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굶주린 메뚜기떼가 이러했을까.

이놈들은 초원을 달리며 마주하는 행인들마다 도살하고 보이는 마을마다 약탈한다.

말릴 수도 없었다.

나도 나름 처음에는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었고, 마을을 약탈하려는걸 한번 말려보긴 했다.

그랬더니 내가 노예들처럼 나약해졌다며 다섯 놈이 밤중에 나를 죽이려 들더라.

왠지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더니, 시커먼 사내놈들이 칼을 치켜들고 있던 때의 충격이란.

예상조차 못 했던 암습이었기에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했다.

내 몸의 반사신경이 예상 이상으로 뛰어났던 덕분에 살았지.

배신했던 놈들은 뛰어들어 온 자한의 손에 모조리 토막났지만, 자한 역시 내가 이런 놈들을 바로 해치우지 못한걸 의아하게 여겼다.

어째서 피하기만 하고 있었느냐고 내게 물어볼 땐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을 약탈하는 전사들을 오히려 독려하고, 나 역시 싸움에 참여해야 했다.

사람을 베어죽이는 감촉은 역겨웠다.

그저, 도망치지 않고 덤벼드는 적들만을 상대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위안할 뿐이었다.

그래도 하샬르의 신체 능력 덕분에 난생처음 써 보는 검으로도 싸우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아직 전성기에 도달하기 전인지 게임상에서 보여줬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한 손으로 휘두른 검이 갑옷을 찌그러트리고, 걷어차인 사람은 터진 축구공마냥 날아간다.

전사조차 아닌 자들의 공격은 하품이 날 정도로 느렸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찔러오는 무기들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를 아흐레. 전사 열 명이 죽을 동안 살해한 사람의 숫자는 삼백 명에 가까웠다.

승리한 전사들이 마을 여자들을 겁탈하는 광경은 끔찍했다.

빙의 첫날의 참상을 교훈삼아 그 후로는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으라 명령했다.

그러니 정말 죽이지만 않더라.

노예들이 마차에 손목을 묶인 채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지만, 매일 밤 겁탈당하고 노예로 팔려 가는 삶이 내가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자비의 한계였다.

한 번, 포로가 된 여자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헤지고 찢겨져 너덜거리는 옷. 흙먼지에 뒤덮여 떡진 머리카락. 밧줄에 쓸려 피 흘리는 손목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퀭한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원한이나 독기마저도 폭력 속에 으깨져 버린,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몰골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홀린 것처럼 그 눈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힘겹게 감추고.

깨달았다.

이런 짓들에 익숙해져선 안 된다는 걸.

이들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나 역시 괴물이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문장마다 그냥 한 칸씩 띄어쓰는 편이 보기 좋을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