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좋은 말로 할 때 문 열어
칼 로스.
800년 전, 열두 기사와 함께 인간들을 이끌고 다섯 왕국을 정복한 기사왕의 나라.
대륙의 패권을 다투던 수인과 요정, 난쟁이와 용인을 모조리 몰아내고 대륙 중앙을 인간의 땅으로 만든 위대한 영웅.
카롤루스가 이룩한 대제국의 이름이었다.
그 뒤로 수백 년이 흘렀음에도 칼 로스는 여전히 대륙 최강을 자랑하는 강대한 국가였다.
대륙 외곽으로 밀려난 이종족들은 힘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굴욕적인 화평을 선택했다.
이제는 오직 북부 설원의 수인들과 동부의 카`하르만이 제국을 적대하고 있었다.
특히, 동부의 카`하르는 제국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이었다.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대군이 넘나들기 어려운 북부와는 달리, 동부국경은 넓은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기병대를 이끌고 몰려와 국경지대를 습격하고, 토벌군이 오기 전에 바람처럼 퇴각해버리는 흉폭한 약탈자들.
대군을 편성해 아예 밀어버리려 했더니, 궁기병대가 집요하게 강습과 후퇴를 반복하며 진군을 방해하는 사이 다른 기병대가 사방으로 흩어져 제국의 도시들을 불태웠다.
이도저도 못하고 카`하르에 시달리던 제국은 고심 끝에 국경을 아예 어마어마한 길이의 성벽으로 막아버렸다.
그것이 바로 동부의 대장벽, 베렝게리아였다.
----
진짜 크네...
30m쯤 되어 보이는 드높은 성벽이 지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끝없는 장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걸 만화에서 본 적 있던 것 같은데.
제국은 거인의 습격이라도 막으려 한 건가.
천천히 말을 몰아 성벽 가까이 다가갔다.
날 발견한 성벽 위의 병사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몇몇 병사들은 이미 나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설마 다짜고짜 활을 쏘진 않겠지?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해둔 흰 깃발을 들어 올렸다.
백기를 본 병사들이 당황한 듯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뭐라 떠들었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한껏 숨을 들이마신 뒤 성벽 위까지 들리도록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듣고 있느냐-! 아이샨기오르의 딸, 하샬르가 여기 있다ㅡ!"
쩌렁쩌렁 울려 퍼진 고함소리에 놀란 듯, 성벽의 바윗돌들이 몸을 떨며 진동했다.
몇몇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풀썩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세르 칸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날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보거라!"
화평 사자치고는 조금 강하게 나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정도가 딱 좋겠지.
제국인들 입장에서 카`하르는 위험한 야만족에 불과하다.
저자세로 일관해봐야 얕보이기만 할 터.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최대한 나를 강해 보이도록 포장해야 한다.
사람이란 본래 상대가 순순하게 굴면 가벼이 여기고 이를 드러내야 존중을 표하는 법이니.
꼬리를 흔드는 개는 서슴없이 걷어차지만 으르렁대는 늑대를 만나면 두려워하며 피하듯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렸다.
거 봐 확실하지. 계획대로야.
그리고 랜스를 거머쥔 십수 명의 기사들과 수백의 병사들이 개떼처럼 쏟아져나왔다.
어,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도망쳐야 하나?
아니. 여기서 도망쳐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오연한 자세로 기다렸다.
덤벼들기만 해 봐라.
전성기보다 어린 시절이라 해도 하샬르의 육체인데 기사들 몇 명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저걸 다 상대하진 못하겠지만.
이윽고 10m쯤 되어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온 기사들이 랜스를 겨눈 채 정지했다.
당장 달려들 생각은 없나 보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유지했다.
뒤따라온 병사들이 날 포위하려는 듯 좌우로 펼쳐져 다가오려 하기에 매섭게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포위당하면 너무 위험하지.
내 눈빛을 마주한 병사들의 낯빛이 공포로 희게 질렸다.
날 두려워하는군.
좋은 징조야.
슬며서 혀로 윗입술을 훑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문제없이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려움은,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 있다.
선두의 기사가 왼손을 옆으로 뻗자 병사들이 물러나 기사들 뒤에 도열했다.
기사가 열셋. 창을 든 병사가 어림잡아 이백.
날카로운 창날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물결처럼 반짝였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려나.
"날 맞이하러 온 거냐. 아니면, 덤벼 볼 테냐?"
허리에 찬 검을 왼손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태연해 보이게. 이백 명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러자 선두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Pourquoi as-tu osé venir ici, Sauvage."
아니 시발, 언어가 달랐어?!
----
먼 옛날.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오해와 다툼 없이, 한뜻으로 통일된 인류는 하늘에 닿을 정도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런 인류가 영 보기 아니꼬웠던 신께서 손수 나서 사람들의 언어를 수백 개로 나누었고.
그 후,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분열되어 영원토록 다투었다고 한다.
그야 지옥 같은 외국어 공부에 노력을 쏟느니, 차라리 상대를 쳐죽이는 편이 쉽고 빠르긴 했겠지.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말이 안 통하면 칼을 꺼낸다는 것이다.
그래. 말이 안 통하니 내가 아까 소리친 것도 전령이 아니라 위협인 줄 알았겠지.
하지만 인류는 언어만으로 소통하지 않는 법.
"우리 말을 모르느냐? 그렇다면 눈으로 보아라. 세르 칸의 전언이다."
안장에 꽂아놨던 백기를 꺼내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시 나를 한 번 가리킨 뒤, 오르한의 서신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명백하게 비적대적인 제스쳐에 기사와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선두의 기사가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고 눈매를 좁혀 서신을 바라보더니, 옆의 기사에게 뭐라고 명령했다.
명령받은 기사가 말을 뒤로 몰아 성 쪽으로 달려갔다.
한참 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하던 중, 달려갔던 기사가 등 뒤에 누군가를 태운 채 돌아왔다.
로브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섰다.
마법사인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카`하르에는 전사밖에 없었으니.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기묘하고 불쾌한 기운이 내 주위를 감쌌다.
놈이 사술을 쓴다!
전신의 감각이 확 날카로워졌다.
반사적으로 화살을 뽑아 내던지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침착하자. 전투를 벌이려 했다면 굳이 마법사를 데려오느니 진작에 기사와 병사들이 달려들었겠지.
그러니 공격 마법은 아닐 테고, 설마 이 상황에 뜬금없이 석화 마법이나 세뇌 마법 같은 게 날아오기야 하겠어.
아마 통역 마법이나 뭐 그런 거겠지.
"Colloquium!"
남자가 정체 모를 단어를 외친 순간 불쾌한 기운이 내 머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으엑.
어지러워. 토할 것 같은 기분이야.
설마 진짜 세뇌 마법이야 이거?
"내 말 알아듣겠나 야만인?"
통역 마법 맞네.
선두의 기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전히 모르는 언어였지만, 그 뜻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신기하네.
-꽤나 무례하구나. 나는 세르 칸의 네 번째 자식. 아이샨기오르의 하샬르다. 문명인이라 자부하고 싶다면 마땅한 예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무례하다. 나, 세르 칸의 넷째.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예의를 보여라 문명인."
뭔데.
긴 어휘까지 완벽하게 번역해주진 않는 건가.
"하샬르......? 설마, 카하르의 창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인가!"
"지금, 뭐라 했느냐?"
아직 처녀야 개새끼야!
거칠게 검을 뽑아들었다.
카`하르의 전사는 모욕을 참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겨누었다.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선두의 기사가 황급히 이들을 만류했다.
"그만, 그만! 일단 멈춰라!"
"하오나 셰인 경...!"
"멈추래도!"
셰인 경이라 불린 기사의 단호한 명령에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이 날 겨누던 창끝을 위쪽으로 치웠다.
"...그쪽도 검을 거두어주시오. 내 실언을 사과할 테니. 보아하니 서로 죽이러 찾아온 건 아니잖소?"
"그리하지."
예의를 차리랬더니 바로 존대어가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양식은 있는 기사 같네.
뽑아든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서, 카하르의 왕녀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홀로 찾아온 것이오?"
제국인들은 세르 칸 오르한을 카`하르의 왕이라 여기는 건가.
하긴 아이샨 부족이 동부국경 전체와 맞닿아 있으니 이놈들은 카`하르라곤 아이샨 부족밖에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얘기가 꽤 빨라지겠는데.
-내 부친이자 우리 일족의 세르 칸, 오르한 님의 전령으로 찾아왔다. 그분께서 제국과의 화친을 원하시기에.
"내 아버지, 우리 왕 오르한의 편지 가져왔다. 우리 평화 원한다.
"평화라 했소?"
셰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믿었겠지.
-그래. 화친의 증표로 내가 직접 너희 제국의 렘넌트 아카데미에 적을 두고자 찾아왔다. 특례입학제도라는 것이 있지 않았나?
"그래. 대신 내가 들어간다. 너희 렘넌트 아카데미. 특별입학."
아무래도 제국에서 살려면 이 언어장벽을 어떻게든 해야겠는데.
통역 마법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네.
"렘넌트 아카데미?......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로군. 후작님께 말씀드려보겠소."
"후작?"
대장벽을 지키던 장군을 말하는 건가. 이름이 뭐였더라.
"베렝게리아 장벽의 수호자. 국경도시 란덴부르크를 통치하시는 변경백. 루드비히 후작님. 내 주군이신 분이오."
-후작에게 타국과의 화평교섭을 결정할 정도의 외교적 재량권이 있는 것이냐?
"후작이 혼자 평화를 결정하는 건가?"
"그럴 리가. 후작님께선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뒤 황제 폐하께 이를 알리실 것이오.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히 황제 폐하이시고."
하긴 고위귀족이 멋대로 타국과 외교를 벌이는 건 반역자라 의심받기 딱 좋은 짓이겠지.
그자가 강한 군사력을 지닌 변경백이라면 더욱이.
"이해했다."
"그러면 후작님의 성까지 안내해 드리지. 따라오시오."
셰인의 안내에 따라, 호위 겸 감시 역할인지 내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과 함께 도개교를 건너 장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제국인가.
정말이지 기나긴 여정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Pourquoi as-tu osé venir ici, Sauvage."
-감히 이곳에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야만인.
----------------
마침내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인 하샬르.
아카데미는 대체 언제 도착할 것인가...!
슬슬 이 소설에 아카데미 태그를 붙인 게 사기처럼 느껴지는 기분이네요!
[TMI]
통역 마법은 말이 길어지고 어휘가 복잡할수록 급격히 정확성이 떨어집니다. 번역기랑 똑같네요.
셰인이 황급히 기사들을 말린 것과 말투가 급격하게 하오체로 바뀐 건
하샬르가 말을 타고 내달리며 유격전을 벌이면
이들 중 절반은 죽이고 도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랍니다
----
왜 업로드만 하면 문장 사이 빈 칸이 제 멋대로 늘어나는 걸까요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