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화
외전) 자한. 9년 전
하샬르 공녀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갓 전사가 된 내가 한창 철없는 자만심에 부풀어있던 시절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거세게 퍼붓는 차가운 겨울비가 바닥을 적셨다.
세르 칸의 세 번째 아내이자 금화궁의 주인이었던 여인.
아이멜라 님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금화궁의 시녀들과 스무 명의 전사들만이 자리한 가운데, 투박한 나무관이 조심스럽게 무덤 안쪽에 안치되었다.
칸의 비, 금화궁주의 장례식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볼품없는 무덤이었다.
아이샨의 혈족은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았다.
세르 칸, 아이샨기오르 오르한 님조차.
나는 폐 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매서운 추위에 진저리치며, 왜 하필 내가 이곳에 배치된 거냐며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시녀들이 주저앉아 통곡하는 매장터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소녀가 바닥에 놓인 아이멜라님의 관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겨울비에 푹 젖은 흰 천 옷이, 불쌍해 보일 정도로 깡마른 몸 위에 들러붙어 있었다.
시녀들이 기름 먹인 가죽 천으로 비를 막아주려 했지만, 소녀는 이를 거절한 채 머리를 적시는 빗줄기를 그저 묵묵히 받아내었다.
창백하게 질린 손끝만을 가늘게 떨면서.
저분이 아이멜라 님의 따님, 하샬르 님인가.
이제 고작 아홉 살이라 들었는데. 참을성이 대단한걸.
한창때의 전사들조차 견디기 어려운 추위인데.
빼빼 마른 몸뚱이를 보아하니 전사는 못 되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그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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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겨울비는 열흘이 지나서야 마침내 그쳤다.
전사들 사이에서, 하샬르 님에 관한 소문이 입에서 입을 타고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듣기로는, 아이멜라님의 묘를 바라보며 열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다고 했던가.
나는 헛소문이라 생각해 피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사람에게, 하물며 어린 소녀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늦은 밤.
어째서였을까. 술에 취해 비틀대던 발걸음이 아이멜라님의 무덤가로 향했다.
아마 그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부대의 전사들에게 자랑이라도 할 생각이었겠지.
일개 전사가 아이샨의 친족이 묻힌 무덤가에 멋대로 발을 들이다니.
발견되면 그 즉시 목이 베일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도시의 북동쪽 구석에 세워진 투박한 묘지는 버려진 폐가마냥 조용했다.
심지어 무덤을 지킬 경비병조차 없었다.
아무리 서부인이라지만 그래도 칸의 부인이시던 분의 묘소일 텐데, 이건 지나친 모욕이 아닌가.
어째서 세르 칸께서는 이를 내버려두시는 거지.
머리속에 떠오른 불충한 의문을 무시하며 묘소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분이 계셨다.
두려움을 닮은 경악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취기가 단번에 날아가는 걸 느끼며 나도 모르게 무릎 꿇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카락과 옷은 얼어붙어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몸뚱이엔 뼈와 가죽만이 간신히 남아있었다.
마치 선 채로 얼어붙은 시체와도 같은 몰골이었다.
기적을 목도했다는 감격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무언가를 마주한 기분에 등골이 떨려왔다.
"......무어냐."
끊어질 듯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쪽을 돌아본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해골에 얇은 천 한 장만을 덮어둔 듯한 모습이었다.
움푹 들어간 창백한 뺨이 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푹 꺼진 눈두덩이 너머로 도깨비불 같은 푸른 빛이 일렁였다.
열흘이 아니라 석 달을 굶주린다 해도 이런 형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었다.
나는 무어라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그저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시녀들이나 전사들이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 누구라도 이런 것과 마주한다면 공포에 질려 달아났을 터이니.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도망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대답할 생각이 없느냐."
그것이 나를 재촉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세, 세르 칸 님의 전사대, 자한입니다."
"......아아, 그래. 기억났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사들 중, 유독 몸집이 큰 사내 하나가 있었지. 너로구나."
그때의 전사들은 자발적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라, 나처럼 경계병으로 배치된 자들이었다.
나 역시 명령이 아니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
아이멜라 님은 유약한 성격 탓에 시녀들이라면 모를까 전사들에겐 지지받지 못하는 여인이었고.
제국인 노예 출신이라는 꼬리표까지 항상 따라다녔으니.
"......어머니를 찾아와주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었군."
한 조각 온기가 섞인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그것을 다시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귀신과도 같이 일렁이던 푸른 눈빛이 조금은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제서야 새삼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이 기이한 괴물이 아니라, 얼어붙고 굶주려 죽기 직전인 어린아이라는 사실이.
생소한 감정이 가슴을 무겁게 옥죄었다.
그것이 동정과 죄책감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하샬르 공녀님.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랫것들과 같은 소리를 하려 하느냐. 그것들이 칭얼거리는 것조차 지겨워 모조리 내쫓아버렸거늘."
하샬르 공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초라한 무덤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빛에 방향 모를 증오와 짙은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공녀님의 몸을 좀 보십시오. 지금 바로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목숨을 내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어떤 기적도 어떤 괴이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
공녀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이적조차,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 터였다.
"공녀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나는 어떻게든 공녀를 설득해보려 했다.
"-이해한다고? 내 심정을? 우습구나."
공녀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너는 모른다."
으르렁대듯 내뱉는 목소리였다.
"아니. 그 누구도 모를 것이야!"
메마르고 갈라진 목구멍에서 핏줄기를 토해내며, 하샬르 공녀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흉포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샬르 공녀에 대해서도, 아이멜라님에 대해서도 사실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한참동안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하샬르 공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되었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어차피 닷새 후에는 돌아갈 것이니라."
"닷새 말입니까? 어째서 굳이..?"
어차피 돌아갈 것이라면 지금 돌아가도 되는 일 아닌가.
닷새는커녕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데.
"어머니께선 보름을 고통받다 돌아가셨으니까. 그러니 나 역시 이대로 보름 동안 이곳을 지키리라."
말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일개 전사에 불과한 내가 말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그래서 그저, 매일 이곳을 찾아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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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정말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 생각하진 않으셨는지, 공녀님은 한동안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공녀님과 함께 무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긴 침묵이 머쓱했기에, 억지로 입을 열어 공녀님께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보았다.
시시콜콜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
내가 살아온 삶. 주워들은 소문이나 민담까지.
"너는 생각보다 말이 많구나."
가만히 듣고 계시던 공녀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조용히 시간을 때울 방법을 뭐라도 생각해봐야겠다
단련이라도 할까.
이튿날.
공녀님의 몸 상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젠 오히려 그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묘소의 한켠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두꺼운 몽둥이를 휘두르며 몸을 단련했다.
공녀님께서 가끔씩 내 쪽을 흥미롭게 바라보셨다.
사흗날.
늑대의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공녀님께 건네 드렸다.
공녀님께선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외투를 받아들고 어깨에 걸치셨다.
"......어머니께서 이런 옷을 만들어주신 적 있었지. 망토라고 하셨던가."
추억 속 온기를 그리워하듯, 공녀님께서 외투 자락을 잡아당겨 몸을 감싸 덮었다.
그리고 나흘 째.
"뭐냐 네놈은."
달갑잖은 방문객이 묘소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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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키에 절반에도 채 닿지 않는 사내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옷을 걸친 아이였다.
금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작달막한 몸 여기저기서 반짝였다.
허리춤에는 꼴에 단검 한 자루까지 차고 있었다.
뒤쪽엔 호위병으로 보이는 전사 두 명이 난감하다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누구야 이거.
"내가 묻고 있잖아. 귀먹었어?"
아이가 단검을 툭툭 쳐대며 밉살스럽게 비아냥댔다.
걷어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공녀님의 어머니가 잠들어계신 곳에서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으니.
"...자한이라 합니다."
"내가 지금 그딴 걸 물어본 것 같아? 뭔데 일개 전사 놈이 여기 있는 거냐고. 난 그 튀기 년을 보러 온 건데."
상상 이상의 폭언에 할 말을 잊었다.
튀기? 설마 하샬르 공녀님을 그리 부른 것인가?
"아민 공자님. 밖에서는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도 반은 같은 혈족이지 않습니까."
뒤에 서 있던 호위가 망나니 꼬마 놈에게 충고했다.
내 쪽을 보면서 말하는 걸 보면 사실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본데.
같은 혈족이라. 그렇다면 이놈이 아이샨기오로 아민인가.
세르 칸 님의 셋째 아들.
성질대로 걷어찼다가는 큰 일이 날 뻔했다.
"그럼 그걸 뭐라 불러? 반이라도 같으니 천것이 아니라 튀기라고 불러준 거라고."
아민이 짜증 난다는 듯 투덜거리다 이내 내 쪽을 돌아보며 삿대질했다.
"그래서, 뭐냐고 너. 아이샨기오르 친족도 아닌 놈이 왜 친족의 무덤을 기웃거려?"
난감해졌다.
확실히, 여태껏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발각되면 처형당할 짓을 계속 저지르고 있었으니.
"아버지께 허락받은 놈은 아닌 것 같고...멋대로 우리 친족의 무덤을 돌아다녔으니까, 죽어도 할 말 없지?"
아민이 단검을 뽑아들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애송이를 시체로 만드는 데는 일격이면 충분했다. 호위병 역시 두 놈이 동시에 덤벼도 이길 만했다.
문제는 세르 칸의 직계혈족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고향마을째 몰살당하고도 남는다는 것.
셋 다 죽이고 파묻어버려도, 세르칸의 혈족이 사라진 이상 도시를 뒤집어엎어서라도 범인을 찾아내려 들 것이다.
화려한 옷 때문에 이놈의 행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결국 이곳에서 아민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얼마 못 가 들통 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아민이 단검을 치켜들었다.
역시, 일단 죽여놓고 생각해봐야 하나.
"...멈춰, 아민."
아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공녀님께서 걸어오셨다.
김이 샜다는 듯 실실대며 단검을 집어넣은 아민이, 공녀님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뭐야, 이 년. 귀신이냐?"
"너 따위랑 농담할 생각 없어. 여긴 뭘 하러 온 거야."
공녀님이 아민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시체나 다름없는 섬뜩한 모습에 오히려 기가 질려버린 것인지, 아민의 입가가 경련했다.
"튀, 튀기년 면상이나 구경하러 왔는데, 상상 이상이네. 그래, 웃기는 몰골이야."
아민이 억지로 허세를 부렸다.
"봤으면 돌아가. 얼쩡거리지 말고. 기분 나쁘니까."
경멸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공녀님이 썩 꺼지라는 듯 턱짓했다.
"이 튀기 년이 아까부터...! "
굴욕감이 공포감을 이긴 것인지, 아민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공녀님은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아민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어딜 가려고!"
"너랑 할 말 없다고 했지. 그리고 자한은 내가 부른 호위이니 간섭하지 마."
"호위라고? 웃기네. 네깟 튀기가 무슨 권한으로?"
공녀님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자한, 따라오거라."
아민 쪽을 흘끗 바라본 뒤 공녀님의 뒤를 따라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이를 갈던 아민이 침을 튀기며 소리질렀다.
"네 애미 무덤 앞에서 뭘 하나 했더니, 그동안 사내새끼랑 붙어먹고 있었나 보지?"
공녀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모습을 본 아민이 기가 살아 연달아 비아냥거렸다.
"어미가 천한 노예년이니 그 딸이라고 다를까. 몸 굴리는 법 하나는 네 어미에게 제대로 배웠나 봐?"
몸을 돌린 공녀님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천천히 아민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것인지, 아민의 호위병들이 얼굴을 굳혔다.
아민은 공녀님을 향해 계속 모욕적인 말을 쏟아부었다.
"아버지를 홀릴 정도였으니, 그 짓거리 하나는 창녀들보다도 잘했겠지? 나도 한번 구경해봤어야 했는데!"
공녀님이 아민의 눈앞까지 다가갔다.
아민의 호위병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몸을 긴장시키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민."
공녀님이 입을 열었다.
"왜, 네가 직접 보여주기라도 하게? 남자 하나론 좀 부족해 보이는데, 내 부하들이라도 빌려줄까?"
"역시 처음은, 네가 좋겠어."
억눌려왔던 증오가, 흉폭한 살의와 함께 마침내 터져나왔다.
아민의 눈이 뜯겨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 내용은 하샬르 과거편 외전입니다.
본편 내용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라 이 시점에 쓰려 했는데
기획했을 때는 4천자 쯤으로 예상했던 내용이 막상 써보니 절반만에 4천자가 되어버렸네요...
본편과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건 그 때문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