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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14화 (14/100)

제 14화

얘가 사람은 참 착하긴 한데...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거의 완치되었네요. 슬슬 어깨랑 다리를 제외한 붕대 정도는 풀어도 되겠어요."

내 다리의 상태를 확인해보던 중년의 여사제가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에 절은 거뭇거뭇한 눈가와 입술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흉터 때문인지, 그다지 안심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정갈한 백색 사제복은 미처 세탁할 틈조차 없었는지 군데군데에 검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사제의 이마를 감싼 흰 천 끝에 매달린 성표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반원이 위아래로 맞붙어있는 금빛 장식.

11주신의 하나, 태양과 생명의 여신 샤울리테의 표식이었다.

나는 한층 나아진 몸 상태를 감사하며 끄덕였다.

찢어진 걸레 조각 같은 몰골이 되어 병상에 누운 지도 어느덧 이틀째.

두 차례에 걸친 치유의 축복이 내 겉모습을 그럭저럭 돌려놓은 상태였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회복속도.

일반적인 축복의 능력을 한참 초월해 있었다.

군종 사제라고 했던가?

아무리봐도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 주교급은 되어 보이는데.

하긴, 이 정도 부상을 빠르게 고치려면 평범한 사제로는 어림도 없었겠지.

아마 변경백의 종군 사제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거나, 뭐 그렇지 않을까?

"다만, 저런 짓은 금물이에요."

여사제가 내 건너편 침상을 가리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젤이 물구나무를 선 채 한쪽 팔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구슬땀이 그녀의 이마에 맺혀있다가, 팔을 굽힐 때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부풀어오른 팔 근육이 몸 주인에게 욕설을 토해내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달아오른 몸이 하얀 증기를 스멀스멀 피워올린다.

습기어린 후끈한 열기가 내 쪽까지 전해졌다.

그제까지만 해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제국의 기사는 죄다 저런 괴물인가.

단 하루 만에 붕대를 풀어헤치더니 어제부터 저러고 있었다.

사제의 축복에 포션의 효과까지 더해졌던 만큼, 나랑 달리 단 하루 만에 저런 짓을 할 수준까지 회복된 것이다.

어제 역시 잠시 방문했던 루드비히 후작도 저 꼴을 보고는 기막혀했다.

뭐라 한마디 하려 하다가, 그냥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이 상당히 우스웠다.

후작의 깊은 미간 주름에는 아마 나이젤의 지분도 꽤 있지 않을까.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도 않았는데...하긴 나이젤 경이 저러는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려봐야 소용없겠죠."

여사제가 그녀를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는지, 나이젤은 묵묵히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저걸 군인다운 꿋꿋한 자세라 해야 하나, 아니면 눈치 없고 고집이 세다고 해야 하나.

하긴 군인 중에선 저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긴 하다.

나쁜 사람은 아니고 개인 능력도 출중한데, 매사에 너무 진지한데다 자기 원칙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사람들.

상관으로 만나면 몸이 피곤해지고 부하로 만나면 머리가 피곤해지는, 솔직히 속 터지게 답답한 타입인데.

나이젤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 난 앞으로 머리가 피곤해지게 되겠구나.

마음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마치 신병의 군생활처럼.

...그나마 상관이 명령하면 잘 따르기라도 하니까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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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를 풀고 뻐근한 턱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좋아. 잘 움직이네.

잘려나간 귓가는 새 살이 돋아나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아직 안쪽까지 채워진 것은 아닌지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움푹 들어가 깜짝 놀랐다.

그러면 뜯겨나간 왼쪽 어깨나 파여나간 오른쪽 다리도 마찬가지인 상태겠네.

진단을 마친 여사제가 돌아가며 했던 충고를 다시 떠올렸다.

단면부를 다시 잇기만 하면 되는 베이거나 금 간 상처와 달리, 아예 떨어져 나가 손실된 부위를 재생시키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었지.

이래서야 걸어 다니는 건 아직 무리겠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하샬르 님?"

어느새 운동을 끝마친 나이젤이 땀에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말을 걸어왔다.

"어제보단 낫네. 시체나 다름없던 그저께보단 훨씬 낫고. 참 다행이지. 안 그래?"

나는 아직도 침상에 누워있어야 하는데, 태연스레 운동까지 하고 있는 나이젤의 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네 오해 때문에 죽을 뻔한 사람이, 어떻게든 회복하고 있으니 너로서는 다행인 일 아니겠느냐고 은근히 비꼬아보았다.

"그렇습니다. 부상 때문에 황실의 답변을 받고도 시간이 꽤 지체될 뻔했으니 말입니다."

못알아듣는구나.

나이젤이 안심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가 사람은 참 성실하긴 한데...뭐라 할 말이 없네......

"그렇다면 제국어 공부를 바로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하샬르 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 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해야 했었지.

하기 싫다......

이 몸 상태로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까지 공부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긴 해야겠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야만인 소리를 듣고 살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일이니까.

"그래, 교재 가져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문명의 짐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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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수업은 꽤나 가혹했다.

나는 어린 시절 외국어 수업을 등한시했던 대가를 온몸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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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 아침, 드디어 몸 상태가 그럭저럭 회복되었다.

붕대를 풀고 어깨를 돌려보니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별문제 없이 잘 움직였다.

이 정도면 전투는 힘들더라도 일상생활엔 아무 지장이 없을 것 같네.

나이젤은 아예 완전히 회복된 것인지, 이미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내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기본적으론 전과 마찬가지로 견갑과 흉갑이 달린 진홍색 코트 차림이었지만, 몇 군데 추가적인 갑옷이 덧붙어있었다.

손목 위쪽부터 팔꿈치까지 긴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양쪽 허리 아래를 감싸는 두 장의 판금 스커트가 코트 자락을 가볍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흉갑 역시 위아래로 판금을 덧대어 복부와 목 아래를 보호할 수 있도록 바뀌어 있었다.

...뭔가 나한테 당한 부위만 집중적으로 보강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왠지 모를 찜찜함에 쳐다보고 있었더니, 나이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샬르 님? 뭔가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 갑옷은 뭐야? 저번이랑은 좀 다른데."

"아, 그때 입었던 갑옷은 대련용 경갑입니다. 손상이 심해 파기했습니다. 이쪽이 제가 본래 사용하던 갑옷입니다."

"그거 대련용이었구나. 어쩐지 방어되는 부위가 별로 없다 싶더라니."

어깨랑 가슴팍 정도만 금속이었으니까.

"...그때 일에 관해서인데,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애초에 그땐 아주 대놓고 반말을 했었잖아?"

그것도 꽤 살벌한 말투로 말이야.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나이젤이 고개를 숙이며 해명했다.

"지금은 하샬르님의 수행원이지만, 그때는 기사로서 적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리하였습니다."

"성실하다 못해 괴상한 성격이네. 뭐 좋아. 물어보던가."

뭘 물어보려고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내용이라면야 대답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제국 검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제국 검술?"

"그, 검이 부러지셨을 때 제 찌르기를 맞받아 흘려냈던 검술 말입니다. 긴 날밑을 활용해 상대의 공격을 얽어 흘려내는 방어법,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틀림없이 제국 기사단 제식 검술이었습니다."

확실히 전투 중간에 그런 짓을 했었지. 그런데 나도 어떻게 썼는지는 잘 몰라.

고민해도 알 수 없는 문제라 그러려니 했는데, 하필 그걸 물어볼 줄이야.

"장검을 지니고 다니신다기에 대련에도 장검을 드렸습니다만, 본래 카하르는 날밑이 짧은 휘어진 칼을 주로 사용한다 들었습니다. 날밑을 활용하는 검술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인데...그 검도 그렇고, 모친분이 제국인이시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혹시 기사셨습니까?"

글쎄...?

그건 오르한에게 물어봐야겠지?

섣불리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하샬르의 모친, 아이멜라라고 했던가.

기사가 맞다고 대답했는데 사실은 기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과연 어느 쪽일까.

어머니가 기사라서 배웠다기엔 나이젤의 말대로 동작이 좀 어설펐지.

그렇다고 기사가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애매한 게, 하샬르가 카`하르의 칼 대신 굳이 제국식 장검을 무기로 사용하던 점이 마음에 걸려.

어느 쪽이든 오답을 내는 건 곤란한데.

나중에 나이젤이 루드비히 후작에게 오늘의 대화에 관해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게 잘못된 정보라면 문제가 좀 생기겠지.

내게 들려주지 않으려 제국어로 대화했지만, 루드비히 후작과 셰인은 아이멜라를 아는 듯한 눈치였으니.

그 이후가 워낙 다사다난했던 탓에, 그때 두 사람이 뭐라고 말했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기 어머니의 직업에 대한 질문에 오답을 내는 놈이 세상에 있을 리 없으니, 루드비히 후작은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 후로는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한 이유를 계속 의심할 테고.

하지만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의심이니, 아무리 고민해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 없다.

결국, 이것저것 괜한 의혹만 눈덩이처럼 커져갈 뿐이다.

...역시 여기선 모르쇠로 일관하는 편이 낫겠네.

아는 듯이 대답했다가 오답으로 밝혀져 의심을 사느니, 처음부터 모른다고 우기면 자기들이 어쩌겠어.

"어머니가 기사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르신 적은 없거든."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국 검술은 대체-"

"그냥 너 휘두르는 거 보고 따라 했는데."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병실 침상에서 나이젤이 휘두르던 검술을 매일 밤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되새겨봤으니.

아마 이젠 한두 동작쯤 따라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그러니 아무튼 나이젤의 검술을 보고 따라 익힌 게 맞는 거지.

"한 번 보고 구사할 정도로 간단한 기술이 아닌데......아무래도 하샬르 님은 제국 검술에도 출중한 재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나중에 한번 배워보기라도 할까. 카`하르인에게 검을 가르쳐줄 제국 기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슬쩍 운을 띄워보았다.

나이젤의 성격대로라면 내가 원하는 답을 해 줄 테지?

"원하신다면 제가 틈틈이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후작님께 허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후작님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역시나.

우리 나이젤이 참 착해.

다시 한번 나이젤이 검을 휘두르던 모습을 떠올렸다.

익혀두면 반드시 도움이 될 테지.

하샬르의 본능에 몸을 전부 맡기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이성을 전부 태워버리며, 몸을 아끼지도 않고 재가 될 때까지 날뛰려 드는 흉폭한 충동.

사나운 늑대에게 가느다란 목줄을 걸고 채찍질하며 명령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한 치만 삐끗해도 오히려 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정 위험한 상황엔 어쩔 수 없겠지만, 가급적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다친 상태인데도 더 싸울 수 있다며 날 충동질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나이젤의 검술은 이상적이었다.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장검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적의 공격을 흘려내고 반격하는 정교한 기술.

결국 내 공격에 돌파되긴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샬르의 본능에 의존한 결과고.

나 자신은 검술의 기본도 모르다 보니 완전히 농락당했었으니까.

"그러면 슬슬 별실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오늘 중이면 황실에서도 답신이 돌아올 테니, 제도로 떠날 채비를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채비라고 해도 애초에 무기랑 돈이 될 만한 패물 몇 개 말고는 가져온 게 없긴 한데."

그러고보니 아카데미엔 뭘 가져가야 하지?

루드비히 후작이 지원해준다고 했으니 그 정도는 알아서 준비해주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군대도 다나까로 말 끝마쳐야 하는 규칙은 없어졌다고 하니

슬슬 나이젤에게 요 자를 쓰게 해 줘도 될 것 같긴 하네요

새벽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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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신]

대륙 전반에 퍼져 있는 종교관.

다양한 문화권의 종교집단들이 서로 충돌한 끝에, 최종적으로 열 한개의 교단만이 남았다.

살아남은 교단들은 서로 협의하여 각자의 교리를 통합해, 마침내 열 하나의 신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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