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다짐
눈동자들이 깜빡인다.
첫 깜빡임에 의문을, 두 번째 깜빡임에 이해를. 세 번째 깜빡임에...
-증오와도 같은 깊은 혐오를.
일그러진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봤다.
그 표정은 경멸과 분노와 의혹과 불신이 뒤섞여, 그저 일그러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형상이 되어있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호흡이 가빠왔다.
사람의 시선이란, 의외로 물리적인 힘을 동반하는 법이다.
저들이 날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래.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막막한 불안감이 밀려드는 것이다.
담뱃불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잔상을 남긴다.
전신을 찌르는 듯한 시선의 압박감에 입꼬리가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려는 다리를 억지로 멈춰 세운다.
여기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내가 쉽게 뜯어먹을 수 있을 먹이가 아니라, 건드려선 안 되는 맹수임을 모두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 애초에 이미 이 정도는 각오했었지.
이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이었다.
물러나선 안돼. 망설이지 마.
두려워하지 마.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노려보고 욕하는 것 뿐.
이 정도야 매일 밤 꿈꾸는 악몽 속, 날 잡아 뜯는 망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젠 낡은 사진처럼 흐릿해져 버린 옛 기억을 돌이킨다.
두 다리를 잃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좁은 방에 틀어박혀 미래를 외면하며, 천천히 썩어가던 그 비참한 모습을.
그 때의 무력감에 비하면 지금은......
그래, 훨씬 나은 셈이지.
적어도 이제 나에겐 다리가 있으니.
그러니,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야만 한다.
이미 발걸음은 시작되었다.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어.
물러서면 그대로 추락할 것이고, 망설이면 결국 죽을 뿐이니까.
......떨림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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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과 함께, 당당한 발걸음으로 아카데미 교정을 가로질렀다.
가로막던 인파가 좌우로 갈라졌다.
내 쪽을 노려보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일일이 눈을 마주쳐주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숙이거나 옆으로 틀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래. 결국은, 이 정도의 것들이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어쩌면 오늘 이후로 볼 일 조차 없을 것들.
귓가를 스치는 웅성임은 귀를 기울일 가치조차 없어 무시했다.
딱 봐도 내 욕을 하거나 카`하르 욕을 하거나 하는 거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적이 드문 좁은 복도까지 걸어왔을 때쯤, 나이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까 그놈들 말이야? 신경 안 써. 별것들도 아니던데. 칼을 뽑고 달려드는 멍청한 놈들이 한둘쯤은 있을 거라 기대했건만."
태연하게 허세를 부렸다.
사실 정말 달려드는 놈들이 있었으면 곤란했지.
제압하기만 한다 해도, 그걸로 도화선이 터지듯 날 향한 증오심이 터져 나올 수 있었으니까.
"애초에 노려보는 정도야 뭐, 내가 한 짓이 있으니 당연한 거지. 오히려, 나로서는 너나 루드비히 후작이 나를 이렇게 친절히 대접해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인걸. 내 소문은 너도 들어본 적 있지 않아?"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기사다운 모습에 집착에 가까운 성실함을 보이는 나이젤이, 어째서 나에게는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동안 계속 의문이었다.
데인의 민간인들을 습격해 살육하고, 약자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던 헤르셀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고 있을 터인데.
...첫날에 적의를 보이며 서로 칼부림을 하긴 했는데, 그건 오해 때문이었으니까 넘어가고.
"확실히 소문은 흉흉하기 짝이 없더군요. 삼천 명에 가까운 데인인들을 웃으며 살육했다든가, 아녀자를 노예로 팔아버리고 어린아이를 산 채로 뜯어먹는다든가."
"......애들 뜯어먹진 않았어."
생각보다 훨씬 미친 소문이었다.
살육이나 노예매매는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아무리 헤르셀라라도 설마 식인은 안 했겠지.
"그러나 결국 소문은 소문일 뿐. 그런 소문에 휘둘려 선입견을 품는 건 기사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완전히 잘못된 소문은 아닌데도?"
"적어도, 제가 직접 만나본 하샬르 님은 그 정도의 광인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하샬르 님이 그러셨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나이젤이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눈이 부시게,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후작님께서도 하샬르 님을 받아주셨지 않습니까. 후작님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 걸까...?"
후작이 왜 그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카`하르가 가족의 원수라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호의가 찜찜하기만 했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나이젤과 달리, 후작은 내심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
"그리고 어차피 데인은 잠정적국입니다. 같은 인류이니 일단 제국과 불가침조약은 맺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신민은 아니니까요."
아니 그런 논리야?
방금 전 까지는 멋져 보였는데, 감동이 좀 식는 것 같았다.
하기야 데인은 제국에 저항해 독립한 나라니까, 제국의 기사인 나이젤에겐 적국에 가깝긴 하겠지.
이런 부분에서까지 기사다운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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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행정실에 지원서류를 제출한 뒤, 혹시 입학시험을 구경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입학시험을 관람하고 싶으시다고요...? 어, 음. 그게, 저. 안되는 건 아닌데...!"
난감해하던 담당 여직원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며 제 상사를 향해 달려갔다.
내 얼굴을 볼 때부터 덜덜 떨더니, 이젠 숫제 눈물마저 흘릴 표정이던데.
"그, 관람요청이 허가되셨습니다. 시험장 2층에 특례생 전용 관람석이 있다고 해요!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래, 수고해."
뭐라 더 말을 걸었다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라,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일어나 행정실에서 걸어나왔다.
"...저 꼴보다는 차라리 노려보는 놈들 쪽이 낫겠어."
노려보는 놈들이야 같이 노려보거나 비웃거나 무시하겠는데,
숫제 잡아먹힐 것처럼 울면서 덜덜 떨어대니 상대하기 너무 부담스럽다.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저런 쪽이 경계할 필요가 적다 보니 오히려 편하더군요."
하긴 나이젤은 일단은 내 호위 역할이니까.
날 노려보는 놈들 중, 혹시 분을 참지 못하고 덤벼드는 자가 있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학시험장에 도착했다.
사각형의 넓은 실내 강당에, 벽 쪽에 계단 형태의 좌석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계단형 좌석 제일 위쪽에, 층을 구분하듯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고, 난간 뒤편에는 보다 고급스러운 좌석 몇 개가 놓여있었다.
저기가 특례생 전용 관람석인가.
거의 텅 비어있는 좌석에는 단 세 명만이 앉아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학시험을 구경하고 있었다.
빡빡 민 대머리에 양쪽 관자놀이엔 날카로운 뿔이 우뚝 솟아있는 용인 남성.
등 뒤에 커다란 금속 가방을 멘 드워프 여자.
덥지도 않은지 두꺼운 모피 코트를 망토처럼 걸친 은발의 여성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캐릭터들이었다.
=======[루드비히]========
"후작님. 굳이 그녀를 받아주신 이유가 뭡니까?"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시작되기로부터 열이틀 전.
셰인은 루드비히 후작의 집무실 한쪽 창가에 선 채, 나이젤과 하샬르를 태운 마차가 후작성 밖으로 떠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해 루드비히 후작에게 물어보았다.
"그게 그리 궁금했던가? 셰인 경 자네가 내 결정에 굳이 이유까지 물어볼 정도로 말이야."
오랜 친우의 질문에, 루드비히 후작은 이제는 물고 있지 않을 때가 더 어색한 마력초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눈을 감고 회상했다.
이유라.
그래. 처음에는 적당히 속아 넘어간 척해 주다가 그대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머리를 굴려가며 거짓 설득을 늘어놓는 모습이 퍽 우스웠지.
그러다가 마음이 변해서, 그녀의 거짓을 밝혀버리고 진짜 속셈을 물어보기로 했던가.
"...정치적 책임까지 감수하시며 카하르인의 후견인이 되신데다가, 나이젤 경까지 붙여주시고, 심지어는 가문의 훈련실까지 허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그녀를 후계자로 삼기라도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아무리 메디안 영애의 자식이라지만, 그녀는 카하르입니다."
"카하르 '혼혈'이지. 그 차이는 매우 크다네. 적어도, 제국의 입장에선 말일세."
순혈 카하르였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황실 역시 납득하지 않았었겠지.
그러나 그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의 핏줄을 흐르는 피의 절반은 제국의 것이다.
후계자를 잃고 완전히 몰락해버린 메디안 가의, 단 하나뿐인 직계 혈통.
그것으로 황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제국 황실은 여전히 열두 기사의 가문을 잊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그녀는 내 희망일세."
"희망이라, 하셨습니까.....?"
재떨이 위에 올려진 마력초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타버린 끄트머리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재떨이 안쪽에 무너져 내렸다.
루드비히 후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삶을 돌이켰다.
그의 신념을. 그의 명예를. 그의 자부심을.
사랑을, 희망을, 대견함을, 긍지를.
찾아든 절망과. 그 끝을 알 수 없이 끓어오르던 아득한 증오와 격정을.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끝내 지쳐 사그라진 무력감을.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예상할 수조차 없었던 기회를.
그래. 그녀는 희망이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굳어버린, 이미 전부 불타버린 잿더미와 같았던 내 마음에 마침내 찾아온.
이룰 수 없던 복수의 희망.
"그녀는 카하르를, 제 아비를 경멸하고 있었네. 증오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녀가 제국의......아니, 내 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 둘은 어쩔 수 없이 충돌하게 되겠지."
카하르를 배신하고 제국의 중요인물이 된 자신의 딸을 좌시할 수 없을 테니까.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휘하 전사들의 여론에 떠밀려서라도 마침내 그놈이 이 장벽에 찾아올 것이다.
그를 위해 준비한 무덤에.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겠나? 오르한이, 그 저주스러운 오르한이 제 딸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죽는, 그 꼴을 볼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네. 어떠한 대가가 필요하더라도, 기꺼이 바칠 것이야!"
루드비히 후작이 이를 갈며, 희열에 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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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잠시 그려봤던 러프로 표지를 바꿨더니, 갑자기 조회수가 천 개는 늘었네요ㄷㄷ
이것이 표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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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글 내용이, 감성 위주의 서술이 되었네요.
후반에는 잠시 시점을 바꿔서, 루드비히 후작에 대해 설명해 보았답니다.
너무 대책없이 퍼주는 것 같았지만, 다 이유가 있었죠.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착한 사람도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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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길길님, 이번에도 소중한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