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23화 (23/100)

제 23화

어머님이 누구니

서로의 전력을 담아 격돌한 대검과 도끼가, 마침내 한계를 맞이하며 최후의 비명을 토해냈다.

으깨지는 강철이 번뜩임을 남기고, 흙먼지가 파도처럼 솟구쳤다.

파편들이 안개처럼 내려앉으며 두 사람의 모습을 슬며시 감추었다.

그 탓인지, 관중에선 과연 승자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관중들은 침묵에 잠긴 채,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들이 가라앉기를 손에 땀을 쥐며 기다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흙먼지 사이를 꿰뚫어보려는 마냥 노려보았다.

흐릿한 황색 베일 너머로, 점차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끌어안는 것처럼 가까이 붙은 채 정지해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데미안이 반으로 부러진 대검을 크누트의 목에 갖다대었고, 크누트의 도끼는 데미안의 허리 어림에 멈춰있었다.

대검의 파편들에 스친 것인지 데미안의 누비 갑옷은 나뭇조각과 쇳조각이 박혀 너덜너덜해져 있었지만, 둘 다 겉으로 보이는 큰 부상은 없다시피 했다.

데미안은 조금 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크누트는 싸우기 전과 마찬가지로 무뚝뚝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전사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것치고는, 이 결과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상당히 초연한 태도였다.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처럼.

"그야말로 동귀어진이로군. 훌륭하다 해야 할지..."

"저러면 누가 이긴 거에요?"

칼릭스가 턱에 주먹을 갖다 댄 채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흠...본래대로라면 무기가 부서진 시점에서 패한 것으로 간주하오. 허나, 저 소협의 대검은 반으로 조각난 상태로도 평범한 검 수준의 길이이니, 실전이었다면 그대로 목을 날려버렸을 터. 판정하기 꽤나 모호하겠소."

하긴, 실전이었다면 데미안의 허리가 잘려나가는 대신 크누트 역시 목을 잃었을 테니까.

시험을 감독하던 감독관들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곧바로 판정을 내리지 않고 한참을 서로 논의하고 있었다.

이윽고 감독관 하나가 둘 모두에게 승리를 의미하는 푸른 천을 건넸다.

무승부라는 건가.

확실히, 둘 다 섣불리 놓치기 아까운 인재일 테니 굳이 패배로 판정할 이유가 없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있어서도 그럭저럭 최선의 결과였다.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무기가 부서진 데미안의 패배였을 테니까.

설마 한 번 패한다고 데미안이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기야 하겠느냐만, 이미 크누트라는 변수가 발생한 이상, 혹시 모르잖아?

천을 받아든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부서진 무기를 감독관에게 건네고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전투를 보여 준 두 사람을 찬양하듯, 퇴장하는 그들의 등 뒤로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무승부인가, 드문 일이로군. 뭐 이미 확실한 자질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는 인재들이니, 아카데미도 욕심이 났나 보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릭스가 가볍게 웃었다.

"저러면 둘 다 합격하겠네요?

아샤는 두 사람의 전투를 보고 신선한 발상이라도 한가득 떠오른 것인지, 벌써부터 신 난 기색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오, 아샤 공. 저들이 다른 참가자들에게 패할 것 같진 않으니."

"저 데인인은 나중에 북부로 데려가고 싶은걸. 수인 놈들 상대로 아주 잘 싸우겠어. 아버지께 한번 말씀드려볼까."

프리데는 흡족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눈에 들어온 인물은 대공의 힘을 써서라도 최전방으로 보내버리려 하다니, 실로 악녀다운 잔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나같이 저 둘의 입학이 달가운 기색이었다.

나는 심란하기 그지없는데.

데미안의 실력은 예상보다 뛰어난 편이었다.

나야 전투를 보는 안목 자체는 부족한 편이지만, 칼릭스의 말을 들어보니 저 정도면 기사급 내에서도 상위의 실력이라 했으니.

아카데미에서 훈련하다 보면 아마도 최소한 2년 안에는 달인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달인의 경지는 통과점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대검 하나만으로 저 정도 실력이라는 건데.

그 말은 결국 대검전투 한 가지만 아주 몰두해가며 파고들었다는 소리잖아.

본래 데미안의 가장 큰 장점은 전술의 다양성에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육성하느냐에 따라 순수 근접직 이외에도 마검사나 정령검사, 심지어 성기사나 암살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전투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성장성.

보통 재능이 한 가지 분야에만 특화되어 있는 다른 npc 캐릭터들과 달리, 플레이어 캐릭터다운 자유도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설정이었지.

그래서 보통 초반에 얼마나 효율적인 빌드를 계획해 육성하느냐가 이후 난이도를 결정하는 편인데...

순수 대검 전사는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범용성이 너무 낮아서 추천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친해진 뒤에, '대검도 좋지만, 마법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 번 배워보는 건 어때?' 따위의 설득이라도 해 봐야 하려나.

데미안 스스로가 결정한 전투 방식일 텐데, 내가 몇 마디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플레이어의 명령대로 불만없이 행동해주던 게임 속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르겠지.

이들은 현실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

그 후의 입학시험은 특별한 이변 없이 진행되었다.

나흘의 시험을 학부별로 나누어 진행한다고 했었나, 어쩐지 전부 근접 전투직밖에 없더라.

데미안과 크누트 급의 강자는 없었지만, 원작에서 본 캐릭터들도 몇몇 등장했기에 일단 기억해두었다.

시험이 끝난 뒤 그 둘을 찾아보려 했지만, 둘 다 이미 자신들의 숙소로 떠난 것인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밤에는 저택으로 돌아와 나이젤과 검술을 수련했다.

물론 목검으로.

점차 나이젤이 휘둘러오는 검도 본능에 의존하지 않은 채 의식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제국 검술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익숙해져 가는 듯했다.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듯이.

역시, 헤르셀라는 원래부터 제국 검술을 알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언제, 누구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에 평소 지니고 있던 장검을 뽑아 살펴보았다.

그나마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라면 역시 이 검이겠지.

빙의 당시부터 지니고 있었던, 제국식의 은빛 장검.

그러고보니 이 검을 뽑아든 건 오래간만이네.

나이젤과의 첫 대련은 연무실에 비치된 장검을 사용했었고, 그 뒤로는 목검만을 사용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뽑아들었던 것이 아마 장벽에서 셰인을 만났을 때였던가.

장검을 왼손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두 손으로 휘두를 것을 전제로 한 긴 칼자루 끝에, 마름모꼴의 날카로운 금속 장식이 붙어 있었다.

한 뼘 반에 달하는 날밑 가운데엔 작은 사파이어가 박혀 반짝였다.

90cm쯤 되어 보이는 검신은 어딘지 모르게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돌았고, 검신 안쪽에 음각으로 긴 제국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L'une des douze épées qui défendent l'humanité. Médiane'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검의 하나. 메디안'

메디안이라.

확실히, 셰인이 내 어머니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 후작과 몰래 나눈 대화 중에 그런 단어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이게 헤르셀라의 어머니, 아이멜라의 성이려나.

아이멜라 메디안.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열두 검이라 하면 혹시 카롤루스 대제의 12기사를 의미하는 건가?

베렝게리아 장벽이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을 따 왔다고 짧게 언급될 뿐, 설정상 그다지 중요시되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만약 아이멜라 메디안이 12기사의 후손이거나 그런 것이라면, 제국 입장에선 아마 꽤 중요한 혈통이라는 건 확실하겠지.

일단 이 사실은 비밀로 해 두는 편이 좋겠어.

다른 이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메디안 가의 아이멜라.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따로 찾아봐야겠다.

루드비히 후작이 아이멜라에 대한 사실을 내게 감추려 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지,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

이튿날의 마법 시험은 대련이 아니라, 환영 마법으로 만들어낸 표적을 파괴하며 마력량과 시전속도 등을 측정하는 시험이었다.

눈에 띄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입학시험을 4위로 통과한, 적발의 여 마법사.

금실로 끝자락을 수놓은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 위에, 어깨를 가리는 검은 숄을 걸친 장신의 미인이었다.

허리춤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단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고, 팔을 덮는 실크 장갑 끝으로 미려한 손가락이 쭉 뻗어있었다.

메인 캐릭터의 하나.

시그밀러스 백작가의 둘째 영애, 오필리아 반 시그밀러스였다.

표적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적당히 휘두른 손짓에, 여덟 개의 표적이 동시에 산산이 조각난다.

탐스러울 정도로 풍성한 적발이 쇄골 어림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특별한 전조나 이질적인 현상을 동반하지 않은 채, 오직 결과만이 눈에 드러나는 형태의 공격마법.

전형적인 바람 속성 마법의 특징이었다.

합격을 선고받은 오필리아는 긴 마력초 하나를 꺼내물고 연기를 내뱉으며 시험장을 떠나갔다.

실력은 좋은데 영 불성실해 보인다며, 칼릭스가 짤막하게 읊조렸다.

셋째 날의 전투종교학 시험은 비공개로 진행된다고 하여 관람하지 못했다.

역시 종교 카르텔이라 이건가.

사제나 성기사 지망생들의 능력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꽤 궁금했었는데. 솔직히 좀 아쉽네.

결국 나이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제도 시내를 돌아다니며, 얼추 필요할 물품들을 구매하며 하루를 보냈다.

옷 몇 벌과 마력초 열 상자를 샀을 뿐인데, 후작이 마련해준 생활비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담배 좀 적당히 피우라는 듯, 나이젤이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미동 없이 날 쳐다보는 어두운 눈초리에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딴청을 피웠다.

...진짜 모험가 길드라도 나중에 찾아가봐야 하려나. 그럴 시간이 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마지막 날의 전술학 시험은 필기시험이라기에, 아예 저택에서 하루종일 검술을 연마하며 보냈다.

제국 검술이 완전히 손에 익기 시작했다.

아직 나이젤 수준의 유려한 검 놀림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기술들의 핵심 요체 정도는 재현할 수 있었다.

"훌륭합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앞으로는 실전을 통해 스스로 단련하셔도 될 것 같군요."

나이젤이 감탄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검을 내려놓았다.

뿌듯함에 뺨이 간질거렸다.

그날은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

"하샬르 님,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마침내 입학식 하루 전.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전입해야 할 날이 찾아왔다.

특별관이라 했었지.

아카데미의 네 기숙사, 특별관과 일반관, 신학관과 별관 중 크기는 가장 작지만, 거주 편의성 하나만큼은 최상인 특례입학생 전용 기숙사.

이 저택에도 나름 익숙해진 상태였는데. 그 점만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 끝났어. 나이젤 너야말로 짐은 다 챙겼겠지?"

"예. 의복 일곱 벌과 그 마력초 아홉 상자. 무구와 소모품, 신분증명서까지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력초라는 단어를 좀 힘주어 말하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저택 하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다시 아카데미로 향했다.

마차의 경우 앞으로는 특별관의 주차 공간에 보관해두면 된다나.

사실상 내게 반영구적으로 대여해준 셈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덕인지, 아카데미 정문 앞은 다행스럽게도 한산했다.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벽에 등을 기댄 채,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를 몰고 다가간 나이젤이 기사들에게 신분증명서를 보여주자, 기사들이 정문을 열고 우리를 통과시켰다.

나는 정문 위쪽 장식을 흘끗 본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라를 지키는 요람이라.

다리를 다시 생기게만 해 준다면 기꺼이 재입대라도 할 수 있을 거라 말하고 다니긴 했었지만, 그게 이런 형태로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는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ㅠㅠ

드디어 시작되는 아카데미? 생활.

과연 하샬르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짧은 등장과 함께 사라진 크누트의 목적은 대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선작이 어느덧 400분을 넘었네요! 다들 정말 감사드려요!

다음화는 자정 전에 올라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