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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27화 (27/100)

제 27화

첫 수업

렘넌트 아카데미의 중심부에는 실제 강의를 담당하는 본관이 위치해 있다.

본관은 'ㄷ'자 형태로 배치된 세 채의 주 강의실과 드넓은 야외 연병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 강의실들은 각기 마법학과 기사 전투, 공통과목에 관한 이론교육을 실시하며, 그 앞의 야외 연병장에선 대련 및 실전훈련이 시행된다.

오늘은 입학 첫날이기에, 오전은 신입생 공동으로 실력 확인을 겸한 간단한 자유대련이 실시된다고 들었다.

오후에는 학부별로 나뉘어 각 학부의 기초 강의를 시작할 예정이고.

나이젤과 함께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연병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드넓은 연병장의 사열대 앞에, 제복을 입은 크고 작은 신입생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제복 위에 가벼운 보호구를 걸치고, 창이나 도끼, 검 등을 차고 있는 기사학부생이 60명.

동일한 검은 제복 어깨에 자색의 짧은 망토를 두르고, 단검이나 작은 지팡이 따위를 들고 있는 마법학부생 60명.

거기에 각 교단의 성표가 그려진 흰색 예복을 덧입은 종교학부생이 30명.

총 150명에 달하는 인원이 드넓은 연병장 가운데에 모여,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였다.

나는 아샤와 함께 기사학부생들이 모여있는 곳 제일 뒷줄로 향했다.

웅성거리던 신입생들이, 우리를 눈치채고는 일제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학시험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눈초리들이 나를 찔러왔다.

혐오, 경멸, 불쾌감, 거부, 의심, 공포.

...생각보다 견딜 만하네.

이미 각오했던 덕분인지 그럭저럭 넘길 만한 시선들이었다.

내가 성장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무디어졌다는 뜻일까.

어느 쪽이든 결국 필요한 변화였다.

적어도 이젠 숨이 가빠오거나 손이 떨리고 발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당장 검을 뽑아 저 건방진 눈들을 으깨버리라는 듯, 자꾸만 왼쪽 허리춤으로 향하는 심적 충동을 억누르는 일이 더 힘들었다.

신입생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에 흘러들어왔다.

'쟤가 걔야? 그 야만인...사람을 잡아먹는다던데.'

'데인 도살자, 카하르의 창녀...특례입학생이라는 소문이 진짜일 줄이야...!'

'란덴부르크 변경백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카하르를......'

'저 얼굴 좀 봐. 저게 진짜 사람의 눈이야...?'

'그 옆의 반인종 여자애는 꽤 괜찮네.'

'데인의 기사들조차 막지 못했다던데, 정말일까?'

대체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이기에 무시했다.

창녀 소리를 지껄인 놈과 아샤를 보고 눈독 들이던 놈만 기억해두었다.

자기 키의 절반만한 여자애를 앞에 두고, 꽤 괜찮다라.

여러모로 좀 꺼림칙한 발언이네.

"인기가 많네요? 하샬르."

"이걸 인기라고 할 수 있겠냐. 악명이지"

"악명도 명성이긴 하잖아요? 적어도 강하다는 증거는 되겠죠. 저희는 워낙 폐쇄적이라 아예 알려지는 일이 드물거든요."

아샤가 아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샤 넌 유명해지고 싶기라도 한 거야?"

"네. 제 이름이 제국에 널리 퍼지면, 제 잠재 고객들도 늘어날 테니까요. 붉은 구리 혈족의 기술력을 선보일 좋은 기회가 되겠죠?"

잠재 고객들이라. 제국인들 상대로 장사라도 할 생각인가?

"기술력이라니, 제대로 된 물건을 팔려고? 제국 사람들에게 그런 걸 팔아도 되나?"

반인종은 자기들끼리 첨단기술을 독점할 뿐, 외부로는 퍼트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파남과의 교역도 첨단제품은 절대 수출하지 않고 단순한 검이나 갑옷, 공예품 따위의 물건들만을 판매한다고 들었고.

"요즘은 힘멜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방에 놀러 오시면 말해줄게요."

기사학부 신입생 무리에 도착한 아샤가 말을 멈췄다.

궁금하면 나중에 한 번 찾아와보라는 소리겠지.

...시간 내서 구경이라도 가 볼까.

나는 맨 뒷줄에 선 채,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신입생들을 눈을 날카롭게 뜨고 노려봐주었다.

할 말 있으면 당당하게 대놓고 하던가.

기사 지망생들 씩이나 되어서는, 수군대면서 불쾌한 눈으로 힐끔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기사답지 못하잖아?

나와 눈이 마주친 신입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결국은 신입생들. 아직 어린 새싹들이나 다름없지.

이런 놈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쓰는 쪽이 오히려 바보같은 짓이겠네.

아, 크누트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있었나.

크누트는 꾹 다물린 입매에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한 채, 도낏자루를 쓰다듬으며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표정없는 얼굴에, 무거운 전의가 서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끼를 치켜들고, 내 쪽으로 달려들 것만 같았다.

덤비려나? 설마, 여기서?

나도 모르게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한 가닥 한 가닥 천천히 내려앉아 검자루를 감싸 쥐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긴장감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크누트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싸울 생각은 아니라는 듯이.

맥이 탁 풀리며, 오른팔이 아래로 늘어졌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나와 칼부림을 하려고 들지는 않는구나.

조용히 내 쪽을 곁눈질하던 아샤가,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신입생들 쪽을 흥미롭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얘는 진짜 싸움날 것 같은 순간은 놓치지를 않네.

일단 흘려넘기고, 나 역시 신입생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부분은 어중이떠중이들이지만, 스토리상 중요한 인물들도 있을 테니까.

어디 보자...

종교학부의 갈색 바가지머리, 에드가. 나중엔 나쁘지 않은 성능의 성기사로 써먹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

연분홍빛 곱슬머리 소녀, 라나. 버프보다는 회복에 특화된 무난한 힐러고.

마법학부는 오필리아 말고는 딱히 없네.

하긴, 대충 시전한 마법만으로도 입학시험 4위였으니, 그 아래는 볼 것도 없나.

기사학부는 역시, 데미안이 핵심이겠지.

고개를 틀어 무리 앞쪽에 서 있는 밝은 금발머리를 쳐다보았다.

소년이라기엔 듬직하고, 완숙한 청년이라기엔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열여섯 살의 미청년.

딱 맞는 검은 제복이 세련미를 풍기는 산뜻한 미남이었다.

부드럽게 웃는 모습에 홀린 듯, 주변의 여학생들이 볼을 살짝 붉힌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역시 주인공답네.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릴 것 없이 꼬시는구만.

매력 스테이터스가 존재했다면 한 90은 찍었겠어.

정작 이 세상엔 상태창도 스테이터스도 없지만 말이야.

데미안은 옆자리에 선 동년배의 녹색 머리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을 거는 것은 주로 소녀 쪽이었고, 데미안은 웃으며 대답 정도만 해 주고 있었지만.

저게 아마 밀리아였던가?

주인공의 소꿉친구이자, 그를 동경해 아카데미까지 따라온 기사 지망생.

성능은 그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검술을 아무리 단련해도 평범한 기사 수준까지도 도달하지 못하는 둔재.

그런 주제에 배드엔딩 이벤트까지 있는.

결국 자기 실력으로는 데미안과 함께하기엔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닫고, 좌절감에 방황하다 끝내 타락해버리는 참으로 골치 아픈 캐릭터였다.

타락한 후에는 마인이 되어 활을 들고 적으로 튀어나오고.

저녀석에게도 주의를 기울여 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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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사열대 위로 한 남자가 걸어 올라왔다.

제국군 장교복을 걸친 다부진 체형에,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얼굴.

드문드문 새치가 섞인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겨 굳혔고, 대리석같이 평평한 이마 아래로 검지손가락만 한 두터운 눈썹이 일자를 그렸다.

왼쪽 눈썹은 사선으로 그어진 작은 흉터로 끊어져 있었고, 눈 밑 주름이 깊게 파여 볼 근처까지 내려왔다.

허리에는 장교용 장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사열대에 올라선 남자가 신입생들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숙해라."

낮고 조용하지만, 동시에 강한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였다.

신입생들은 일제히 웅성거림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음이 잦아든 것을 확인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렘넌트 아카데미에 온 것을 환영한다. 본 교수는 귀관들의 대인전투 과목을 담당할 지도교수, 칼라인 페르난데스다."

칼라인이라.

기사 제복이 아닌 장교복을 입은 걸 보면 제국기사는 아니겠고, 제국군 소속의 간부 같은 건가?

칼라인이 고개를 돌려 신입생들의 모습을 쭉 살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귀관들이 정렬한 모습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전투 직종들이 존재한다. 전위직, 마법사, 사제, 성기사, 궁수 등. 대인전투 과목은 이러한 다양한 직종들의 전투적 특성을 파악하고, 각 직종에 맞는 적절한 대응방법을 학습하기 위한 과목이다."

한마디로 전사에게 마법사 상대법을 가르치고, 마법사에게 사제를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그런 강의라는 뜻이네.

같은 직종끼리도 제각기 전투 방식이 다를 테니 그 부분 역시 강의 내용에 포함될 테고.

"합격했다는 기쁨과 동기들과의 첫 만남으로, 다들 풀어진 마음이라는 것은 이해한다. 허나, 렘넌트 아카데미의 목표가, 귀관들을 일 년 내에 단독투입 가능한 기사급 전력으로 양성하는 것임은 알고 있겠지? 지금 귀관들은 좋게 봐 줘도 준기사 수준의 병아리. 내 강의시간 동안, 웃고 즐길 시간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군인답게 시종일관 딱딱한 태도였다.

칼라인의 태도에 긴장한 것인지, 신입생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알아들었다면 곧바로 실전 학습을 시작하겠다. 서로 자기소개라도 할 시간을 원한다면, 강의를 끝마친 뒤로 미루도록. "

신입생들의 반응을 확인한 칼라인이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사전에 공지했듯이, 금일 오전은 각 신입생들 간의 자유 대련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너희 자신의 수준을 직시하고, 동기들의 실력 또한 확인해둘 기회가 되겠지. 이상. 질문 있나?"

"질문 있습니다! 자유대련이라 하셨는데, 상대는 아무나 상관없는 건가요?"

경박하게 생긴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보니까 아까 아샤를 보고 꽤 괜찮다며 떠들어대던 놈 같은데.

남학생이 슬쩍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주로 아샤 쪽을.

"상대가 허락한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가급적 자신에게 생소한 상대와 대련해 보며, 그 특성을 몸으로 파악하는 것을 추천하마."

칼라인의 허락에 남학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샤랑 대련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아마 후회할 텐데.

나는 얼마 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남학생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럼, 20분의 시간을 주겠다. 그동안 서로 대화하며 적당한 대련 상대를 찾아봐라. 일단 첫 강의이니,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인원이나,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한 인원들은 특별히 참여하지 않고 관전하는 것을 허가하겠다. 이상, 해산."

칼라인의 말에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신입생들이 이내 삼삼오오 흩어졌다.

나는 누구랑 대련해야 하지?

아샤는 좀 그렇고, 데미안 쪽을 찾아가봐야 하려나?

...일단 크누트는 피하자. 대련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야외 강의의 도입부가 생각보다 만족스럽게 써지질 않더라고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자정까지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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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입학생의 기숙사가 본관=>일반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본관은 기숙사가 아니라 주 강의실 쪽에 쓸 단어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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