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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29화 (29/100)

제 29화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잠시 가벼운 소란이 있었지만, 이내 원만하게 수습되었다.

아샤를 상대하던 남자는 다리 사이로 붉은 눈물을 흘리며 거품을 문 채 의무실로 후송되었다.

포션과 치유의 축복을 병행하면 기관 자체는 회복되겠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기능고장은 감수해야 할 거라던가.

아샤 역시 이 참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닌 듯, 난감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마 앞으로 아샤에게 대련을 신청할 용기있는 사람은,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명도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앞으로 아샤에겐 대련 따위의 일은 말조차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저 기계장치의 돌진력이면 방어를 하려 해도 보통 돌파당할 텐데, 그런 방어불능의 공격이 아래쪽을 노려온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태어난 악의어린 전술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아샤 쪽을 보는 시선들이, 이제 공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하하...사고 쳐 버렸네요. 고향에서는 키 차이는 미처 생각 못 했었는데."

"뭐, 적어도 더 이상 널 귀찮게 할 녀석은 없겠네. 앞으로 영원히."

아샤가 눈꼬리를 떨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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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가 나오긴 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한다는 듯 대련이 계속되었다.

이후 첫 번째 조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었다.

데미안이 대검을 휘둘러 방패를 든 상대방을 일격에 방패째로 날려버렸다.

에드가는 자신에게 치유의 축복을 걸고 지구전을 벌여, 결국 공격하다 지친 상대의 기권을 받아냈다.

크누트는 아예 대련에 참가하지 않았고.

데미안이 그에게 대련 신청을 했었지만 거절당했다지.

저쪽도 내게 밑천을 드러낼까 봐 경계하는 건가.

이윽고 두 번째 조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른한 듯 눈을 반쯤 감은 오필리아가 물고 있던 마력초를 던져버리고는 연병장 중앙으로 향했다.

"저 마법사가 신경 쓰이나 봐요, 하샬르?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아샤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신경 쓰이지. 저 녀석도 중요한 캐릭터이니까.

"그러고 보니 입학시험 때도 저 여자만 집중해서 봤었죠. 이름이 아마...오필리아, 맞죠?"

"그래. 오필리아. 아무리 봐도 고작 저 정도 실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거든."

"그런가요? 뭐 실력을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요. 다 사정이 있겠죠."

오필리아 시그밀러스. 시그밀러스 백작가의 차녀.

다섯 살부터 마법을 발현한 어린 천재.

과거에 보여주던 천재성과 달리, 성장 후엔 어중간한 실력만 드러낸 탓에 이젠 그다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지만.

입학시험에서도 4위 정도로 들어왔었지.

너무 눈에 띄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하기도 싫다. 그런 내심이 잘 드러나는 순위였다.

아마 목숨의 위기를 제대로 겪기 전까진, 계속 저런 태도로 일관하지 않을까?

오필리아의 상대는 긴 창을 든 청년이었다. 청년이 오필리아를 향해 창을 겨누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오필리아가 느긋하게 왼손을 들어 올리고는, 손등을 뒤집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갈 수십 개를 한 번에 짓밟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년의 창이 사방팔방으로 구겨졌다.

연이어 오필리아가 왼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퍼억, 소리와 함께 청년의 몸이 반으로 꺾였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쓰러진 청년이 캑캑대며 꿈틀거렸다.

오필리아가 손으로 허공을 내리긋자, 다시 한번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며 청년의 몸이 축 늘어졌다.

명백한 전투 불능 상태였다.

성적 1~3위의 마법사들과 달리 화려한 불꽃이나 뇌전, 굉음 따위는 없었으나, 실로 간결하고 정확한 대응이었다.

"확실히 잘 싸우네요. 보는 맛은 별로 없지만요."

"저쪽이 대인전에선 더 위험하지. 일단 공격이 보이질 않잖아."

전조도 현상도 보이지 않는 공격, 대처하려면 오직 감각을 총동원해 감지하는 수밖에 없다.

육감으로 마력을 직접 감지하거나, 촉각 등으로 공기의 흐름을 파악하거나.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련을 마친 오필리아가 긴 마력초를 꺼내더니 이쪽을 슬쩍 보면서 다시 연기를 뿜었다.

내게 관심이 많아보이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네.

딱히 혐오하거나 하는 눈은 아닌데. 오히려 호기심에 가까운 느낌이야.

이윽고 두 번째 조의 대련이 모두 끝나고, 마침내 내 차례가 찾아왔다.

나는 밀리아와 함께 연병장 중앙으로 향했다.

데미안은 누굴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두사람 모두 열심히 해.' 따위의 소리나 해 댔다.

우리 둘이 싸우는데 둘 다 열심히 하라는 게 무슨 응원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밀리아는 나름 응원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기쁘게 웃으며 검집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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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세 번째 조, 대련 준비."

밀리아와 마주 선 채, 나이젤에게 받은 강철 장검을 뽑아들었다.

수십 쌍의 날카로운 시선들이, 내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감각에 몸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래. 내 소문이 진짜인지 알고 싶겠지.

야만 종족. 카`하르의 왕녀가, 정말로 기사 십수 명을 순식간에 쓰러트릴 정도의 강자인지.

그 과격함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인지 말이야.

곧 알게 될 거야.

...아무리 그래도 데미안의 소꿉친구를 상대로 후자를 증명할 생각까지는 없지만.

뭐, 포션도 있고, 치유사제도 있을 테니 경상 정도까지는 상관없겠지?

장검의 검신 위에 왼손을 가볍게 얹고, 밀리아를 향해 겨누었다.

밀리아는 폭이 좁은 세검을 오른손으로 쥔 채 굳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허리춤에 얹은 왼손의 손목 어림에 작은 원형 방패가 붙어 있었다.

소형 방패에 세검이라. 날 상대로 현명한 판단은 아닐 텐데.

딱히 제국 검술은 쓰지 않을 계획이었다.

얘를 상대로 내 밑천을 드러내기는 아깝고, 기본적인 검술과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겠지.

내 신체능력 정도는 다들 대충 소문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슬쩍 눈동자를 돌려 관중석 쪽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크누트가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점점 더 거슬리는데. 차라리, 근시일 안에 배제해두는 편이 나으려나.

문득,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하는 카`하르들이 싫어 제국까지 도망쳐온 주제에.

내게 정당한 원한을 품고 있을 사람을 상대로, 방해가 될 것 같다며 죽일 생각부터 하다니.

나 역시 그들과 별로 다를 것 없다는 뜻일까.

아니.

나는 나야. 난 카`하르의 헤르셀라가 아니야.

렘넌트 아카데미의 하샬르지.

그녀의 업보를 내가 대신 감당해 줄 생각은 없어.

크누트의 원한은 헤르셀라의 죄를 향한 것.

나로서는 억울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 일이니까.

그러니 끝끝내 내 방해자가 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죽일 수밖에.

난 살아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심란해진 마음을 다시 가다듬으며,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이윽고, 칼라인의 호령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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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내 쪽으로 돌진해오는 밀리아는 꽤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발을 디딘 땅이 살짝 파이며 그녀의 몸이 빠르게 쏘아졌다.

경화 점액을 발라 뭉툭해진 검끝이 내 명치를 꿰뚫으려 다가왔다.

그래봐야 느렸지만.

장검을 옆으로 휘둘러 가볍게 쳐낸다.

균형을 잃은 밀리아가 비틀대며, 그대로 내 뒤쪽으로 밀려났다.

허리를 틀며 등 뒤를 향해 왼팔을 휘두른다.

왼손의 방패로 간신히 막아낸 밀리아가 신음하며 쭉 밀려났다. 그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 터무니없이 약하네. 이게 준기사 수준인 건가.

물고 있던 담배를 왼손으로 옮겨쥐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ㅡ. 너, 그냥 기권하지 그러냐?"

"아직이야!"

이를 악문 밀리아가 연신 검을 찔러왔다. 은회색 빗줄기가 한가득 쏟아졌다.

너무 느리게 보인 탓에, 빗줄기라기보단 눈송이에 가까웠지만.

한 발을 내딛으며, 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두른다.

카아앙-!

빗줄기가 일제히 사라지며, 그녀의 팔이 허공으로 휙 쳐들렸다.

텅 빈 복부를 적당히 걷어찼다.

"커윽!"

숨통이 막힌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밀리아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만."

널 두들겨 패 봐야 나한테 딱히 이득도 없단 말이지.

"커흑, 컥...케헥...! 시끄러워......!"

침을 토해내며 한참을 기침하던 밀리아가 이를 악물고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섰다.

하아......그냥 일격에 보내버리는 편이 낫겠다.

담배를 다시 꼬나물고, 왼손을 검자루에 얹었다.

아예 일격에 압도해버리면, 자기 실력에 충격받진 않겠지.

자기 실력이 약하다고 절망하기보다는, 그냥 데미안처럼 내가 신입생 수준을 초월한 것이라 생각하게 될 테니.

반응할 수조차 없을 속도로 쏘아진 내 찌르기가, 그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꺄아아악!"

핏줄기가 솟구쳤다.

보호구나 경화 점액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날이 무디어진다면 무디어진 채로 꿰뚫어버리면 그만이니.

어깨 너머로 튀어나온 검 끝에, 뭉개진 살점이 붉게 엉겨붙어 있었다.

크, 으으읏..! 으아아아아앗!"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밀리아가, 이를 악물며 내 장검을 붙들고 검을 맞찔러왔다.

그래. 그래도 전의 하나는 훌륭하네.

고개를 꺾어 찌르기를 피하고, 그대로 밀리아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바이스같은 손가락에 압착된 밀리아의 오른팔에서, 우드득거리는 분쇄음이 울렸다.

그녀의 오른손이 힘없이 풀어지며, 쥐고 있던 세검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밀리아의 입이 격통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 입에 주먹을 쑤셔 박으려는 본능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랬다간 밀리아는 재기불능이다.

데미안과도 아마 원수가 되겠지.

밀리아의 어깨를 관통하고 있던 장검을 뽑아내자, 재차 뿜어져 나온 피보라가 내 얼굴을 적셨다.

비린내가 코끝을 맴돌고, 열기가 뺨을 타고 쇄골 아래로 흘러내렸다.

밀리아가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일단 좀 자라."

검자루 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밀리아의 눈동자가 휙 돌아가며, 그녀가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밀리아의 몸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죽은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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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아도 의무실로 후송되었다.

오른팔 복합골절에, 어깨 근육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고 하던가.

그래도 제대로 치료받고 푹 쉬면 하루 정도면 대충 회복된다고 한다.

좀 신경이 쓰여서, 뒷머리를 슬슬 긁으며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괜찮냐? 내가 네 소꿉친구를 병실로 보내버렸는데."

"딱히 하샬르 네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루만 쉬면 낫는다니까. 밀리아도 최선을 다한 결과일 테니, 납득하겠지."

미래의 용사다운 뒤끝없고 깔끔한 태도이긴 한데, 보통 자기 친구를 중상자로 만든 사람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지 않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데미안은 그래도 밀리아가 좀 걱정된다며, 칼라인에게 의무실로 가 봐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칼라인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허락해주었다.

어차피 데미안 본인의 대련 자체는 이미 끝냈기 때문이려나.

아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특별관으로 돌아가버렸다.

저래도 되는 건가. 특례입학생이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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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적당히 닦아내며, 새빨갛게 젖어버린 담배를 뱉어버리고 새 걸 하나 꺼내 피웠다.

질린 듯한 학생들의 눈빛이 내심 만족스러웠다.

효과가 좋네.

이대로 한두 번만 더 반복하면 최소한 공포만은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겠는데.

세 번째 조의 대련이 모두 끝나면 희망자에 한해서 오전 내내 자유대련을 해도 된다고 했었지.

그러면 두세 놈만 더 잡자.

밀리아처럼 신경 써줄 필요도 없으니 확실하게.

문제는 나랑 싸워줄 정도로 혈기 넘치는 놈이 있냐는 건데....

신입생들을 둘러보았지만, 대부분 슬쩍 눈길을 피했다.

곤란한데.

그러던 중, 오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입에 문 장초를 까딱이며 날 주시하던 오필리아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뭐지? 이 시점의 오필리아는 굳이 남들의 관심을 사려 하지 않을 텐데?

"거기 카하르 여자, 이름이 아마 하샬르라고 했던가? 아이샨기오르의 왕녀."

오필리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안녕하세요!

최근 연재주기가 좀 느려진 느낌이라 면목이 없네요...

사실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가벼운 장면이나 캐릭터 소개로 내용이 미묘하게 늘어지는 느낌이라 좀 고민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이제 소개할 애들은 다 소개했으니, 앞으로는 당분간 전투나 스토리 위주의 전개가 되겠네요!

다음화는 자정 전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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