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화
조별과제 최후의 양심...그것은 교수가 직접 조원을 정해주는 것!
그날 강의는 실내에서 진행되었다.
하늘은 맑았고, 학생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날 피해 다녔다.
자기 옆을 어슬렁대는 사자가, 배가 부른 상태이길 기도하듯이.
케네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복은 되었을 텐데, 자퇴라도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왠지 모를 찝찝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타입은 꼭 원한을 쌓아두다가 나중에 나타나던데.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네.
강의실 한쪽 구석에서, 날 발견한 오필리아가 슬쩍 웃는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눈으로 인사만 하고, 데미안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아, 하샬르. 일주일만이네?"
데미안이 가볍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데미안의 옆자리에서 내 쪽을 슬금슬금 쳐다보던 밀리아가, 내가 맞은편에 앉는 걸 보고 움찔했다.
나뭇잎같은 녹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거렸다.
얘랑도 일단 친해져 둬야 할 텐데. 갈 길이 멀구나.
그래도 그렇게까지 내게 적대감이 강한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내가 오른팔 쪽을 박살 내다시피 했었는데. 의외네.
데미안이 잘 이야기해준 걸까?
"그러게. 오랜만이네, 데미안. 그리고 밀리아였지? 너도 오랜만이고."
일단 말을 붙여 보았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해야 그나마 친해질 기회라도 좀 생길 테니까.
밀리아가 마지못해 내 쪽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갯짓했다.
"...안녕."
"다친 덴 이제 괜찮냐?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은데."
귀 뒤쪽을 슬슬 긁으며 밀리아의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상처 자체는 전부 나은 것인지, 딱히 붕대 같은 것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상처 치료 하나는 원래 세계와는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세상이니까.
그러고도 치료받기 전에 죽는 사람은 많지만.
"이제 괜찮아...그리고 대련에 찬성했던 사람은 나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밀리아가 오른 어깨를 살짝 감싸며 끄덕였다.
역시, 성격은 좋네. 아직 날 꺼려하는 것 같긴 하지만.
데미안과 관련된 문제만 아니면 얘도 참 착하고 괜찮은 녀석인데...
실력이야 별개로 치더라도.
"뭐, 그렇다면야. 이걸로 화해한 셈 치자고."
슬쩍 오른손을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며 내 손을 내려다보던 밀리아가 손을 뻗어왔다.
맞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시작은 좋다고 볼 수 있겠지?
앞으로 천천히 더욱 친해지면 되겠지.
그러다 좀 사이가 개선되면 슬쩍 활이 더 어울린다고 유도해보기도 하고.
인사를 마치고,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잠깐 밖으로 나와 복도에서 담배 한 대를 태웠다.
실내이다보니 강의 도중에 피우기는 좀 그래서.
옆자리에 데미안과 밀리아도 있고.
"...그것 봐.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
"글쎄..."
강의실 안에서 데미안과 밀리아가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름대로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였나 본데, 안타깝지만 내 청각이 워낙 좋은지라.
창틀에 등허리를 기댄 채, 상체를 밖으로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흘러가는 구름에 연기 한 조각을 더했다.
평온하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날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딱히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내용은 아닐 것 같아 그냥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실 앞문으로 칼라인 교수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를 끄고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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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에는 대련의 결과평가와, 마법사의 특성에 대한 강의를 했었지. 오늘은 사제직의 특성 및 대처법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겠다."
대련의 결과평가에 마법사의 특성이라. 그냥 넘긴 게 조금 아쉬운 강의이긴 했네.
그러고보면, 내 얘기도 있었으려나?
"...야 데미안. 그 결과평가 말인데, 내 얘기도 나왔었냐?"
목소리를 줄이고 데미안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어...그러네. 신입생 한 명이 하샬르 너 같은 타입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냐고 물어봤었지."
내 상대법이라? 오히려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 그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었겠네.
내가 옆에 있었으면 그런 걸 물어보기는 눈치가 좀 보였을 테니까.
아무튼 잘 됐다. 이건 알아두면 꽤 도움이 되겠어.
"그래서, 교수가 뭐라고 했는데?"
데미안이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공격에 본능으로 대응하는 편이라, 강약을 구분해가며 반응하지 못한다. 그러니, 원거리에서 싸울 거면 약한 견제 위주로 방심시키고, 그 사이사이에 강한 공격을 섞어 교란하라고 했고...근거리라면 정면으로 맞부딪히지 말고 최대한 공격을 흘려내며 싸우라던데."
"흐음...그래? 뭐 나쁘지 않은 판단이네."
다 틀렸지만.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교수가 저렇게 판단할 정도면, 크누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 외에, 아카데미 안에서 내게 악감정을 품은 놈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테고.
계획대로야.
내가 마법의 강약을 구분 못 할 거라고?
마법사의 주력 기술 따위 훤히 알고 있다.
마력을 민감하게 감지해주는 항마력 덕분에 각 마법들이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도 바로 느낄 수 있고.
기술로 내 공격을 흘려내겠다고?
어디 한 번 열심히 시도해 봐라. 그걸 위해서 제국 검술을 익혔다는 사실을 감췄다.
특별관 녀석들이야 내가 수련하는 걸 봤으니 알고 있겠지만, 그 녀석들이야 그런 걸 떠들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벼운 성격들이 아니니까.
공들여 어중간한 실력을 내보인 보람이 있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슬쩍, 크누트 쪽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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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계속되었다.
"마법사의 마법과 사제의 기적은 그 작동방식이 전혀 다르다. 마법사의 힘은 자유로운 대신, 한계가 명백하다. 자신의 마력을 전부 소모하면 그걸로 끝이지. 무슨 수를 써도 그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칼라인이 손날로 자기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마력을 다 쓴 마법사는 그대로 목을 쳐버리면 된다는 뜻인가?
"반면, 사제의 기적은 몸과 정신이 버텨주는 한, 끝없이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론 신의 권능을 오래 견디기 힘들 뿐. 결국, 마법사에 비해 본인의 의지와 근성이 크게 중요하다는 뜻이지."
즉, 마법은 한 번 마력이 다하면 죽을 힘을 다해도 아무 소용 없지만, 기적은 죽을 힘을 다하면 생명을 불태워가며 계속 싸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전투사제나 성기사를 상대할 때는 상대가 지쳤다 해도 방심하지 말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한다.
내버려뒀다간 자기 생명을 버려가며 그대로 최후의 공격을 날려오기 일쑤이니까.
칼라인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신, 구사할 수 있는 힘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섬기는 신이 내려줄 수 있는 권능들로 한정된다. 범용성이 낮지. 몇몇 신들의 경우엔 그 흔한 회복의 축복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 말 대로, 사제 계통의 캐릭터들은 어떤 신을 섬기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보통은 은총의 엘피넬이나, 태양과 생명의 샤울리테를 섬기는 캐릭터들이 인기가 많았다.
버프 특화와 회복 특화. 사제 캐릭터로는 가장 쓸 만한 교단들이었으니.
"각 신들의 속성과 권능에 관한 내용은 신앙 쪽 강의를 참고하도록."
그 부분은 알고 있으니까 안 들어도 상관없겠네.
그 뒤로는 일반적인 사제직의 대응법에 관한 내용이 이어졌다.
전투사제의 경우 자체적 공격능력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니, 일대일이라면 몸으로 버티며 밀어붙여라.
성기사의 경우 축복으로 자신을 강화하고, 기사처럼 싸우고, 회복하며 버텨내니 장기전은 승산이 없다.
대신, 그만큼 근접전 자체의 기량은 낮은 경우가 많으니 그 부분을 파고들어라.
전반적으로 단기전을 강조하는 설명이었다.
"기량이 비슷하면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가 칼라인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죽어라. 같은 시간 동안 검술 하나만 익힌 자가, 검술에 축복까지 연마한 성기사보다 검술 기량이 달린다면 죽어야지."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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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강의가 끝난 이후, 데미안과 밀리아와 함께 사흘 후에 있을 야외 실습에 관해 대화했다.
둘 모두 딱히 자세히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샤와 마찬가지로, 아마 코볼트나 트롤이 상대일 것이라는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트롤은 며칠 전에 잡아봤는데 별거 없더라. 치유가 빠르긴 한데, 목을 뜯어내면 그걸로 죽어. 데미안 너 정도면 그럭저럭 쉽게 잡을걸."
"그런가? 트롤을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네."
데미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럴 때를 보면 그 나이대의 소년 같은 모습이긴 한데.
어째서 볼 때마다 미묘하게 꺼림칙한 건지, 영문을 모르겠네.
"...나는?"
"세검으로는 힘들겠던데. 찌르는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하더라."
"어렵겠네......"
밀리아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동글동글한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
좋아. 조금 위로해 줄까.
"애초에 아카데미도 모든 신입생더러 다짜고짜 트롤을 상대하라 하진 않을걸. 나와도 기껏해야 두세 마리 정도 아닐까? 너야 뭐, 네 남자친구가 잘 도와주겠지."
밀리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름 귀엽네.
그녀가 내 말에 놀라 손을 마구 내저으며 허둥댔다.
"나, 남자친구라니...! 그런, 거 아니야! 데미안과는, 그냥 소꿉친구 사이니까...!"
"이럴 땐 그냥 뻔뻔하게 맞다고 하는 편이 나을걸, 그렇게 소심하게 굴다가 다른 녀석이 채가도 난 모른다? 저 녀석, 실력도 생긴 것도 나쁘지 않아서 인기깨나 있겠던데."
"으으으..."
밀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데미안은 옆에서 난처하게 웃고만 있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우리 대화를 농담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은데.
...밀리아, 네가 갈 길이 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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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느긋하게 실습 준비를 마쳤다.
아샤의 방도 찾아가 보았는데, 방 전체가 정체 모를 톱니바퀴와 공구들, 기계장치로 너저분했다.
거의 발 디딜 틈이 안 보일 정도로.
내 시선을 받은 아샤가 멋쩍은 듯이 웃어댔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도면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태엽 시계가 째깍거렸다.
아샤의 호위라는 자동인형도 구경할 수 있었다.
기사의 전신 갑주를 닮은 금속 외장에,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톱니바퀴와 파이프, 피스톤과 동력선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
등과 다리에는 아샤의 것과 비슷한 비행장치가 붙어 있고, 두 팔에는 손 대신 커다란 포신이 달려 있었다.
부족의 어른들이 만들어준 물건이라던데, 저게 아샤보다 더 세지 않을까...?
칼릭스는 파견 임무를 하러 갔다고 한다. 어쩐지 요새 안 보이더라.
프리데야 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친구 없이 혼자 밥만 먹고 다니고.
슬슬 불쌍해 보일 지경이긴 한데, 나만 보면 짜증을 부려대니 내 쪽에서 먼저 접근하기도 애매하다.
어차피 나중 가면 사이가 좋아질 계기가 생기긴 할 테니까, 당분간은 저러도록 그냥 놔두자.
제공받은 짝퉁 서릿발을 끼고 나이젤과 대련도 해 보았다.
달라진 점이라 해도, 기존 공격방식에 추가로 적의 검을 붙잡거나 손끝으로 찌르고 할퀴는 공격이 더해진 정도였지만.
제대로 써먹으려 하면 이 놈도 금방 부서질 테니까.
그래도 단순히 손가락으로 붙들어 뜯어내던 기존 방식에 비해, 공격의 과감성과 템포가 한층 빨라졌다.
"괜찮군요. 기습적으로 활용한다면 꽤 쓸만할 것 같습니다."
뺨에 옅은 상처가 남은 나이젤이 칭찬해주었다.
장검 역시 새로 하나 건네받았다.
기존에 받은 아카데미 장검이 너무 약하다고 항의했더니, 그나마 조금 나은 품질의 검을 갖다주더라.
혹시 모르니 아이멜라의 검과 서릿발도 가져가긴 할 건데, 그것들은 너무 눈에 띄니까 비상시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 외엔 투척용으로 단검을 열두 자루가량 챙겼다.
나이젤이 단검을 꽂아둘 가죽 띠를 선물해주었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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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야외 실습일의 아침이 밝았다.
사열대 앞에 도열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긴장과 불안, 기대와 흥분이 뒤섞인 묘한 열기가 연병장을 달구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1명 정도가 불참하게 되어, 총 참가인원은 140명이었다.
사열대에 선 교수가 마침내 실습내용을 발표했다.
목적지는 제도 남서부의 회색 숲.
실습을 위해, 기사들이 생포한 코볼트와 트롤을 풀어놓은 곳이라 한다.
트롤은 네 마리뿐이고, 대부분은 코볼트라지만.
실습내용은 4인 1조로 숲 속에서 닷새간 생존하며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며, 토벌한 몬스터의 숫자당 가산점이 부가되니 토벌한 증거를 모아두라고.
닷새 동안은 아카데미에서 일절 개입하지 않으며, 설령 그곳에서 사망해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어차피 넷이나 모여서 트롤이나 코볼트에 죽어나갈 녀석들이면 미래가 없다 뭐 그런건가.
곧이어 35개의 조가 발표되었다.
크누트나 오필리아는 각자 다른 조에 배치되었고, 데미안은 에드가와 같은 조가 되었다.
내 조원은 밀리아, 한스, 라나였다.
나한테 얻어터진 두 명에, 나한테 좋은 감정이 없을 종교쟁이 어린애 하나라......
약간의 악의가 섞여 있지 않나, 이 조원 편성?
조원 발표를 보고 떨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세 명의 눈빛에 벌써부터 피로감이 일었다.
이것들을 데리고 닷새간 지내라 이거지.
저쪽에서 반드시 나를 죽여버리겠다며 살의를 불태우는 중인 크누트의 습격도 경계하면서 말이야.
쉽지는 않겠는데.
차라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어느덧 20일이 되었네요!
부지런히 써서 연참분을 모아두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