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크누트
=======[크누트]========
나는 말발굽 소리를 싫어한다.
악몽은 언제나 발굽 소리와 함께 찾아왔으니.
----
내 조상들의 고국, 데인은 약한 나라였다.
사내들은 하나하나가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기에.
제국에게 끝없이 저항하다 마침내 희생양으로 내몰린 순간부터, 영원히 약한 채로 살아갈 운명으로 전락한 나라였다.
다행히 내 선조는 데인의 운명을 미리 직감할 정도로 현명했다.
그렇기에, 데인 왕국이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던 순간 바로 제국에 투신하길 택했고.
그렇다고 해도 고향을 완전히 버리기는 아쉬웠던 것인지, 정착한 땅은 데인 왕국과의 국경선 근처였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 가문은 데인 왕국을 휩쓰는 동부의 악몽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
가을이었다.
한창 수확 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맴돌았고, 황금빛 보리가 농지를 한가득 메운 채 물결치듯 흔들거렸다.
마을 어른들이 올해 농사는 풍년이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도끼를 걸어놓고 땀을 닦아내었다.
"오늘도 하루종일 훈련만 하다 온 거야? 크누트 오빠. 가끔은 나랑도 좀 놀자..."
"아스트리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전사의 덕목이야."
여동생, 아스트리드가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허리춤에서 폴짝거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달래듯 쓰다듬어주었다.
"전사라고 해도, 여긴 어차피 싸울 일 같은 건 없잖아. 오빠는 군인이 되고 싶은 거야?"
"글쎄..."
확실히, 이 마을은 평화로웠다.
제국 북부와 동부는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긴 했지만, 그 전화가 여기까지 미치는 일은 없었으니.
제국군에 입대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 덕분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제국이 내 동포들을 희생양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의 선조들까지. 대를 이어가면서도 절대 잊지 않도록 전해진 가르침이었다.
솔직히 이제 와서 그 사실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다 해도, 선조의 유훈을 따르는 것 또한 전사가 지켜나가야 할 의무였다.
"오빠를 너무 괴롭히지 말거라, 아스트리드. 크누트는 전사신께 한 맹세를 지키려는 거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가 아스트리드를 다독였다.
어깨에는 사슴 한 마리를 짊어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사냥꾼이었다.
"아빠!"
아스트리드가 아버지께 다가가 안겼다.
부엌 쪽에서, 어머니가 나와 아버지를 반겨주었다.
"고생했어요 스벤. 오늘은 간만에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겠네요."
"그래. 다녀왔소."
어머니의 말에 아스트리드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스트리드를 끌어안은 아버지가 그대로 어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두 분 모두 아스트리드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이런 일이, 있었지......
----
맹세라.
내 첫 맹세가 무엇이었지?
여동생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겠다고 했던가.
우습게도.
----
마을은 불타 사라졌다.
카하르의 소행이었다.
베렝게리아 장벽이 세워진 이후 최초로, 장벽을 우회해 진군하는 데 성공한 강대한 군세.
거인 오르한이 이끄는, 아이샨기오르의 습격이었다.
그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내가 죽었다.
끔찍한 피보라와 절규 어린 비명, 추악한 웃음과 말발굽 소리가 마을 전체를 가득 채웠다.
맞서 싸우던 아버지는 기마병의 창날에 꿰여 목숨을 잃었다.
나는 여동생을 지키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고자, 아스트리드를 들쳐업고 내달렸다.
집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어머니는 만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부디, 어머니께서 저들 손에 붙잡히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가실 수 있었기를.
붉게 물들어버린 마을을 뒤로 한 채 도망쳤다.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여동생의 눈물이 끓어오를 듯이 뜨거웠다.
그리 오래 도망치진 못했다.
결국, 다리에 화살을 맞고 신음하며 쓰러졌다.
업고 있던 아스트리드가 옆을 굴렀다.
"...뵐베르크여."
결국 피하지 못한 싸움을 준비하며, 도끼를 거머쥐고 전사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커다란 말을 탄 거한이 활을 집어넣고 나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바윗덩이를 닮은 듯한 육신.
석탄처럼 타오르는 것 같은 검은 눈동자.
동화 속 괴물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 같은 남자였다.
남자의 뒤쪽, 보다 작은 말에 탄 소녀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어울리지 않는 긴 장검을 차고 있는 아이였다.
귀기어린 푸른 눈동자가 내 쪽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도끼를 치켜든 채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쓰러트리고, 말을 빼앗아 내달려야 했다.
- 콰아아아앙!
단 일격에, 도끼가 박살 나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디를 어떻게 당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공격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오빠아아아아!"
울면서 내게 달려오던 아스트리드가,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두 팔을 꽉 붙들린 아스트리드가 휘청거리며 저항했다.
"흐음. 이 꼬마, 딱 너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어디, 계집 노예라도 하나 선물 받겠느냐, 하샬르?"
남자가 역겨운 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피를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움직여...! 일어서서, 싸워.....!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어 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나란 말이야!
무얼 위해 맹세했더냐 크누트!
손가락으로 흙바닥을 파헤치며, 버르적대며 기었다.
반쯤 들린 상반신이, 팔꿈치가 푹 꺾이며 다시 지면에 처박혔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 돼. 여동생을, 아스트리드를 지켜야...!
"...필요없습니다. 죽이시든, 다른 전사에게 내리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샬르라 불린 소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남자가 아스트리드를 붙든 채 소녀를 따라 멀어져갔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전사신이시여, 제발...!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울면서 손을 뻗어오는 여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
죽어가는 나를 구한 것은 데인의 동포들이었다.
카하르의 급습을 뒤쫓아 국경을 넘어 마을에 도착했다고 했던가.
정작 국경을 지켜야 할 제국군은 카하르에게 패해 그대로 도망쳐버렸다고.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
그 후로 4년간, 목숨을 던져버린 것처럼 수련에 매진했다.
여동생의 안위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 악마들에게 끌려간 어린아이가, 살아있을 리 없다고. 그렇게 확신했다.
데인의 기사들에게서, 스벤의 딸,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의 노예를 발견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 전까진.
도끼를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달렸다.
아스트리드. 내 여동생, 아스트리드...!
살아, 있었구나...! 살아있었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전사신이시여!
발걸음에 환희가 섞여들었다.
...그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
아스트리드는.
아니.
아스트리드였던 여자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녀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눈도, 혀도, 팔도, 다리도.
붕대에 칭칭 감긴 몸뚱이만이 내 여동생에게 남은 전부였다.
그마저도 곧 꺼지기 직전의.
내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여동생을 끌어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새롭게 맹세했다.
저 악마들을 내 일생을 바쳐,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
신분을 감춘 채 데인에서 카하르와 싸우던 와중,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국이, 카하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문.
그 증표로 카하르의 왕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가 제국에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오르한의 뒤에서 지켜보던 소녀의 이름을.
악마의 딸.
어느덧 다 자라나, 제 아비와 마찬가지로 내 동포들을 살육하는 귀신.
전장에서 마주치기만을 바라고 있었건만.
평화라고...? 이제 와서 제국에 고개를 숙이겠다고?
납득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도끼를 거머쥐고 제국으로 돌아왔다.
내 신분은 여전히 제국인이었기에,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데인 왕국은 그동안 제국 국적을 지닌 데인인들과 접촉해, 제국 내에 이미 첩보조직을 만들어놓은 상태였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 여자가 입학한다는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
8년 만에 마주한 그 여자는 예전 기억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부쩍 자라난 키. 귀기가 흐려진 푸른 눈동자.
껄렁거리는 태도에, 입에는 항상 마력초가 물려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얼어붙을 듯한 싸늘함도, 소문으로 들어왔던 학살자의 광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몸에 깊이 배어있는 흉칙한 살기와 질척한 피비린내를 제외하면.
내 동포의 피냄새.
사냥감을 추적하듯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제 아비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벗어난 힘이었다.
짐승처럼 본능대로 싸우며 가감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과격한 몸놀림.
소문보다 다소 약한 걸 보면, 힘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저 쪽 역시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거겠지.
반면, 싸울 때가 아닌 그 여자는 그냥 성격 고약한 처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반인종 소녀와 농담하며 웃거나, 데미안이라는 소년과 그 옆의 여자아이와 잡담하는 모습은, 도무지 악마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평화를 원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스로 목줄을 맨 늑대처럼.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길들여지려는 듯이.
그렇다고, 내버려둘 것 같으냐?
나는 맹세를 잊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아직 기억한다.
어머니의 웃음을 여전히 추억한다.
아스트리드의 마지막을...영원히 잊지 못한다.
네 딸의 머리통을 창에 꿰어 내던져주마, 오르한.
다시, 제국과 싸우러 오거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이번화는 크누트의 과거편입니다!
사실...에피소드 중간에 과거편을 쓰면......
독자님들의 영압이 반쯤 사라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바...!
하지만...올리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
크누트가 본 오르한) 자기 딸에게 자상하게 선물을 챙겨주던 악마
그렇다보니 딸을 죽이면 아마 분노해 제국으로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착각 중인 겁니다...!
=============
VCFlo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을 사랑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