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화
준비만전이라며
그렇게 다시 2주가량이 흘렀다.
데미안은 이제 내게 반격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고, 밀리아의 활 솜씨는 어느덧 검술보다 더 쓸만해 졌다.
허탈해하며 세검을 매만지는 밀리아를 나와 데미안이 위로해주었다.
"그 뭐냐, 원래 초보 때는 실력이 빠르게 느는 법이야. 검술도 단련하다 보면 계속 나아지겠지. 걱정하지 마."
"그래 밀리아. 그동안 검술을 열심히 수련했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런 거겠지...?"
그 외에 특별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뭐 내가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아카데미 내부의 일 정도였지만 말이지.
돈을 마련해보려 길드를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마땅한 의뢰가 없었다.
루드비히 후작의 답신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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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프리데가 날 찾아왔다.
그날 나는 평소와 같이 특별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와중이었다.
앞으로 한 달 조금 넘게 남은 일을 고민하면서.
식당에는 나와 나이젤밖에 없었다.
칼릭스는 아직 복귀하지 않았고 아샤는 오늘 점심을 걸렀으니.
그 때 프리데가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은 아카데미의 제복.
그 위에 걸친 모피코트 차림에, 손에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프리데가 조금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내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보다 적대감이 살짝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날 보면 인상부터 쓰고 먼저 말을 걸어오지도 않던 여자가.
나는 의아함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지은 채, 내 앞에 떡하니 선 프리데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미간엔 여전히 주름이 잡혀 있긴 한데...전해지는 기색은 미묘했다.
적갈색 눈동자엔 경멸이나 적의가 담겨있지 않았고, 오히려 당혹스러움과 미심쩍음이 자리해 있었다.
무슨 일이지...?
뭔가, 내가 모를 단서를 잡기라도 했나?
그렇다면 잘 된 일인데.
프리데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것 같지는 않지만. 모를 일이지.
"뭐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냐?"
"없으면 내가 굳이 널 찾아왔겠어, 야만인? 중요한 일이니까 대충 먹고 내 방으로 찾아오도록 해."
프리데는 그 말만 남기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중요한 일이라. 이 시점에 중요한 일이면 역시 수인에 관한 일이겠지?
밥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겠네.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차피 이 정도면 충분히 먹기도 한 셈이고.
"나이젤, 나 먼저 일어난다. 뭔지는 몰라도 급해 보이니까."
"예, 정리한 후 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나이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프리데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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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간 프리데의 방은 여전히 흉흉한 모양새였다.
이런 방에서 살다 보니 성격이 이따위로 뒤틀린 것 아닐까?
사제들조차 여기서 일주일만 지내면, 미치광이 사교도가 되어버릴 것 같은 끔찍한 인테리어니 말이야.
전에 내가 박살 내었던 문짝은 그새 고친 것인지 멀쩡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나무가 아닌 철문으로 바뀐 데다가, 경첩도 몇 배는 두꺼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데?"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프리데가, 날 보고는 테이블 반대편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라는 소리인가.
의자 쪽으로 걸어가 그대로 걸터앉았다. 엉덩이에 닿는 가죽 쿠션이 꽤나 푹신했다.
테이블 위엔 반쯤 비워진 와인 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내 잔은 없었고.
내가 앉기를 기다리던 프리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하수로에 수인 놈들이 숨어있다는 증거를 찾아오겠다더니,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뭐라도 찾은 건 있어?"
"...아직 없는데."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그야 아직 가 보지도 않았으니까. 이제 슬슬 가 볼 생각이었지.
프리데 쪽에서 먼저 재촉해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었던 걸까.
"하아...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지. 이러면 곤란한데."
프리데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편지를 들이밀었다.
빼곡하게 적힌 제국어 끝부분에, 페일룬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북부로부터 전해진 소식이야. 하늘산맥 국경에 대규모의 수인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서."
프리데가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지금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북부에, 수인 군대가...?"
"열흘이나 이전 소식이니, 이미 제국 기사단의 주 전력은 북부로 향하고 있는 상태겠지. 그게 정상적인 대응이니까."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이 시점에, 수인들의 대규모 집결이라고? 그런 내용이 원작에 있었나...?
모르겠다. 현시점의 북부 따위, 게임상에선 자세히 언급되지도 않으니까.
전쟁 수준의 유혈사태가 없었다는 건 확실하지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밀리치야가 아카데미생들을 대놓고 습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제도의 전력 상당 부분이 북부로 빠져나간 틈을 노려서?
하지만, 시기가 맞지 않아. 중간실습은 앞으로 한 달이나 남았는데.
어째서 지금 움직인 거지? 습격을 앞당기기라도 하려고...?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말이 안 되잖아.
굳이 그럴 요인도 없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생들이 외부로 나와 분산되지 않는 이상, 전사는 고작 스무 명 남짓인 놈들이 대놓고 덤벼오는 건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포위당해 전멸할 테니까.
그렇다면 왜?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일단 네가 말했던 것처럼, 만에 하나 제도에 수인들이 잠입해 있다면...저 무력시위의 목적은 제국의 시선을 북부로 돌려놓으려는 기만책이겠지. 문제는,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거야."
프리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거라고 해봐야 내 애매모호한 증언이 전부이니까.
그걸로는 제국은커녕 귀족 하나조차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네 말만 믿고 제국의 기사들을 제도로 불러들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저 군세의 목적이 단순한 양동 작전이 아니라, 정말로 북부를 침공할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빠진 전력만큼 북부는 더욱 위험해지겠지. 그래서, 뭐라도 증거를 가져오길 기대했는데..."
프리데가 말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한심하다는 듯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도 나름 이것저것 대비하느라 바빴다고. 수인과 상대할 만한 녀석들 실력도 키우고, 은도 마련하고."
"은? 어차피 1학년 수준에선 딱히 도움되진 않을 텐데. 얼마나 모았는데?"
"그게..."
머뭇거리며 프리데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샤에게 부탁해 은을 꽤 모으긴 했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그걸 아직 사서 쓰지는 못하고 있다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안 되겠네. 일단, 따라와."
프리데가 신경질을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는데?"
"네 친구 반인종, 아샤라고 했었지? 그 녀석 방으로."
짜증과 확신이 뒤섞인,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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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아샤는 방에 있었다.
난데없는 프리데의 방문에 놀란 것인지, 아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프리데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하샬르? 프리데와 같이 찾아오다니."
"나도 몰라. 프리데가 갑자기 끌고 온 거라."
은에 대해 듣자마자 곧바로 이쪽으로 향했으니까.
자기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기라도 했던 건가?
"이 정도 양이면, 나쁘지는 않네."
프리데가 은괴 더미를 보고 슬쩍 웃더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야만인, 네가 키웠다고 했던 녀석들이 몇 명이야? 무기는?"
"그, 학생 중에선 두 명인데. 기사학부 1위인 데미안이랑, 그 친구 밀리아. 무기는 대검이랑 세검, 활이고."
애초에 전력으로 쓸 만한 녀석들은 다섯 명뿐이었으니. 그 중 나랑 친한 건 둘 뿐이고.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두 명? 두 명이라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아니다, 하긴 1학년이 다 거기서 거기긴 하지."
혼자 중얼거리던 프리데가 고개를 들더니, 아샤를 향해 무언가를 휙 내던졌다.
아샤가 허둥지둥하며 붙잡았다.
짤각거리는 금속음이 둔탁하게 울렸다.
"어, 어? 뭐에요 이건? 돈주머니?"
가죽 주머니 안에, 금화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의뢰야. 대검이랑 세검 각각 한 자루씩. 베이스는 흑철로, 표면에 은을 도금해서. 거기에 남은 액수만큼 은화살도 만들고. 이틀이면 되겠지?"
"네? 어, 네. 이틀이면 만들 수 있긴 한데요....은 도금이라니. 저번에 하샬르가 한 말도 그렇고, 갑자기 왜요?"
아샤가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프리데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허리를 숙여 아샤에게 얼굴을 가져다댔다.
두 사람의 눈이 한 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잘 들어, 반인종 후배 씨. 선배가 해주는 조언이니까."
다정하게 충고하듯, 낮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내용은 절대 그렇지 않았지만.
"상인 짓을 하고 싶다면, 절대. 고객의 사정을. 물어보지 마. 그딴 걸 물어보는 장사꾼은 몇 년 안에 파산하거나...시체로 발견되기 십상이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
아샤가 입을 다물었다.
프리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이거면 충분하겠지? 완성되면 두 녀석에게 전해주고, 남은 화살은 일단 예비로 남겨둬. 야만인 넌 다시 따라오고."
용건은 끝났으니 방으로 돌아가자는 듯, 프리데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자기 돈으로 은을 마련해주실 생각이셨다니.
내가 그동안 이분을 오해하고 있었군.
이제부턴 프리데 님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프리데 선배님!"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감사인사를 건넸다.
돈 주시면 선배님이지.
프리데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내 쪽을 돌아보는 목이 삐걱거렸고, 표정엔 경악이 가득했다.
옷깃 위로 드러난 목에는 닭살이 한가득 돋아 있었다.
"소름, 돋으니까. 그따위로, 말하지 마."
간신히 그 말만을 내뱉은 프리데가 비틀대며 방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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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데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금 전의 불미스러운 기억은 없던 것으로 하려는지, 프리데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일단 무기가 완성되고 나면, 그 다음 날부터 곧바로 지하수로를 수색할 거야. 너랑 그 둘, 나랑 나이젤 경까지 다섯이서 말이지."
"나는 그렇다 쳐도, 데미안과 밀리아는 일반생인데?"
일반생들이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건, 그나마 2학년이 된 이후일 텐데?
1학년 때는 아카데미의 커리큘럼대로만 생활해야 하고.
그게 규칙이니까.
"그건 아무 문제 없어. 일반 신입생 한둘쯤이야, 내 권한으로 외부 견학이라도 미리 시켜준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너 따위랑 달리, 나는 아카데미 내에서 나름 신뢰받는 신분이거든."
프리데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나도 웃어주었다.
"오오, 프리데 선배님. 오오...!"
날아드는 와인잔을 피해 방에서 도망쳤다.
그래도 고민하던 문제 태반이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이걸로 지하수로도 자연스럽게 조사를 시작할 수 있을 테고, 다섯이서 찾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사흘만 더 기다리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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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밤.
제도가 불길에 휩싸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안녕하세요!
오늘 밤부터 공모전 예선 심사일이네요. 결과발표는 다음주 월요일이지만요.
음...결과가 어찌되든 언제 한 번 초반부를 좀 다듬어야 할 것 같긴 해요.
중간 어딘가에 통곡의 벽이 있는 느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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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하샬르를 후려친 프리데와
존댓말로 프리데를 후려치는 하샬르...!
그리고 그냥 후려치는 수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