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업
사람에겐 한계가 있다.
근력의 한계. 체력의 한계. 종의 한계.
의지만으론 넘어설 수 없는 명백한 마침표가.
최초의 신이 모든 생명을 창조하던, 그 태초의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법칙.
사람은 그 어떤 종족보다 나약했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
요정의 장난감으로 살 수는 없었다.
수인의 가축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반인의 노예로 사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수많은 혼혈의 모체로 사육되는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굴하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사람의 적과 맞서, 마침내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은 저항했다.
검을 치켜들고, 창조주가 정한 섭리에 반기를 들었다.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다면.
이것이 인류라는 종의 한계라면.
그렇다면, 사람을 넘어서자.
천상의 어딘가에서, 누군지 모를 존재가 감탄하며 그들을 축복했다.
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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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샬..르...?"
데미안이 힘겹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난도질당한 몸에 상처가 가득하다.
조금만 더 깊이 베였어도 잘려 떨어져 나갔을 상흔들.
...이 이상 제대로 움직이긴 힘들어 보였다.
밀리아는?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렇지 데미안?
네가 지켰다고 말해줘.
간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 ....!.. ..., .....!.."
끊어질 듯한 호흡 소리가 들린다.
심장박동이 울린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래도, 아직 살아있었다.
간신히.
프리데에게 받은 유리병을 꺼냈다. 회백색 약물이 찰랑거린다.
전부 써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세 약병 중 하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시고 싸우기 위한 물건이었다.
...남겨두길 잘했네.
"이거, 회복약이니까 밀리아에게 써. 그리고 가능하다면 물러나."
망설임 없이 데미안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아직 괜찮으니까.
조금 지쳤을 뿐이야. 싸울 수 있다. 다리도 팔도 아직 움직이니까.
"너,는...?"
"나는...싸워야지."
다시 검을 치켜세운다. 손톱을 깔짝이며 우리를 보고 웃는 암표범을 향해.
그래,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이거지.
떨리는 팔로, 축 늘어진 장검을 다시 거머쥐고 달려든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적어도 데미안과 밀리아가 몸을 피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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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앙!
휘두른 검이 가볍게 튕겨 나간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었던 몸뚱이가 무력하게 밀려난다.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수인의 대전사.
순혈 특유의 강인한 육신을 한계까지 단련한 전사들.
지친 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최우선 목표가 여기 있다는 건...보리스는 실패했나 보네. 안타깝게도."
"검은 늑대라면, 특별관에 가면 볼 수 있을걸. 개처럼 죽은 꼬라지를...!"
"그래?"
암표범이 웃는다.
2m쯤 되려나. 순혈치고는 작은 키에, 드러난 근육 역시 우람하기보단 날렵했다.
표범 특유의 검은 무늬들이 금빛 피부를 뒤덮어 얼룩덜룩하다.
"그럼 뭐, 내가 해야겠지. 너도 개처럼 죽어서, 기다리던 보리스에게 말해주렴. 나탈리아가 널 보내주었다고."
나탈리아의 장검이 검은 광택을 흘린다.
급소만 가린 가벼운 갑옷이 사람의 피로 젖어 붉게 빛났다.
어깨에 박힌 화살 하나가 흔들거리고, 몇 군데 살짝 베인 털가죽에선 옅은 피가 스며 나왔다.
부상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가벼운 상처들이지만, 그나마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데미안과 밀리아의 실력으로는, 버티는 것조차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버텨주었다.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물러섬 없이.
그러니 나 역시 그리해야겠지.
"하아아아아아!"
장검이 충돌한다.
번쩍이는 불꽃과 함께, 충격에 밀린 팔이 튕겨 나간다.
검은 여전히 예리했지만 나아갈 힘이 부족했다.
나탈리아의 검 끝이 목을 노리고 쏘아진다.
"크, 아아아아!"
왼팔로 막아낸다. 흑철 건틀릿이 파여나가며 팔등이 찢긴다.
괜찮아. 아직 움직인다.
그대로 찌르듯이 내뻗는다. 암표범의 심장을 향해.
"느리네."
내지른 손이 허무하게 붙들렸다.
텅 비어버린 몸통을, 표범의 다리가 후려갈긴다.
몸이 반으로 접혔다.
"커헉!"
막힌 숨을 토하며 튕겨 나갔다.
벽에 충돌하여, 그대로 뚫고 나간다.
굉음과 함께, 부서진 벽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흙먼지가 확 피어오른다.
그대로 지면을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의 잔해가 몸 여기저기를 찢고 지나간다.
긁힌 피부가 쓰라렸다. 벽에 충돌한 어깨가 욱신댔다.
뱃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컥, 커윽...! 크하아악!"
몇 바가지는 될 법한 피를 토해낸다.
내 피일까, 짐승의 피일까.
위액이 섞인 피 웅덩이가 시큼한 비린내를 풍겼다.
내 허리가, 아직 붙어 있는 건가?
격통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옆구리가 터져나간 것 같이, 끔찍하게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게 어쨌다고.
검을 바닥에 찍어,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선다.
이를 악물고 다시 달린다.
아직이다.
아직, 한계는 아니야.
헤르셀라의 몸이, 이 정도로 한계에 달할 리 없어.
고함을 내지르며, 의지를 다시 불태운다.
죽어버린 사람들을 떠올리며.
타버린 도시에 울려 퍼지던 비명을 되새기며.
그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죽여야만 할 적이 내 앞에 있었다.
그러니 멈출 수 없다.
그 순간, 저편에서 피어오른 찬란한 빛이 도시를 뒤덮었다.
엘피넬의 성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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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이 줄어든다.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체력이 차오른다.
힘이, 되돌아온다.
내달리는 다리가 급속도로 빨라진다.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하며 달린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서광과 함께 전신에 스며드는 이 충만감은, 틀림없이 기적이었으니.
"신성광...?! 성녀 후보인가...!"
나탈리아의 안색이 처음으로 다급해졌다.
암표범이 내 쪽으로 검을 휘둘러왔다.
검은 호선이 허공을 가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심으로 베어가를 의도가 담긴 참격이었다.
막아내려 해도 맥없이 나뒹굴었을 수준의.
- 카아아아앙!
막아낸다.
막아낼 수 있다.
두 검이 서로를 밀어내며 거칠게 울부짖는다.
밀리지 않는다. 드디어.
"캬아아아아앗!"
포효하며 그대로 밀어붙인다.
찬란한 불꽃이 튀어 오른다.
진은 장검이 조금씩, 흑철의 날을 파고들었다.
"치잇!"
다시 한번, 짐승의 다리가 배를 노린다.
뒤쪽으로 뛰어 피했다.
나탈리아의 다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늪 속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몸만 멀쩡했다면 원래 이 정도쯤 피할 수 있었다.
"느리다고 했었지, 이젠 어떠냐!"
도약하며 외친다. 활기를 되찾은 몸이 달아올라 춤춘다.
검을 휘두른다. 팔을 쏘아낸다. 다리를 내지른다.
끝없이 날뛰며 공격을 이어간다.
나탈리아가 으르렁거렸다.
"까불기는!"
휘둘러진 장검을 허공에서 막아낸다.
홱 하고, 몸이 뒤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착지한다. 발이 쭉 미끄러지며 긴 족적을 남겼다.
"그르르르르르..."
나탈리아가 상체를 숙이며 이를 드러냈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인간 놈이, 어디서 감히...!"
칼자루를 다잡는다. 그래. 이제 출발점에 선 것이지.
여전히 저자는 나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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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아아아아앗!"
"캬아아아아!"
송곳니를 드러내고 울부짖으며, 사람과 수인이 연이어 충돌한다.
검과 검이, 손톱과 손톱이 서로를 노리고 휘둘러진다.
그 모양새는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한 손에 장검을, 다른 손에 손톱을 세우고 야수처럼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다.
상처 입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울리며.
거울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족이라도, 되느냐!"
"내 어머니는 사람이다!"
붉은 물감에 적신 붓을 휘두르는 것처럼, 핏줄기가 사방으로 마구 튀어 오른다.
전신이 다시 피로 물들어갔다.
그저 끊임없이 공격을 이어간다.
...조금씩, 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신체 능력은 내가 조금 아래. 검의 성능은 오히려 위였다.
진은 앞에서 수인의 재생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그럼에도 확실히 패배가 가까워진다.
동등한 조건. 같은 깊이로 파고드는 검상임에도.
나탈리아의 검이 뼈를 긁어낼 때, 내 검은 적의 근육밖에 가르지 못하기에.
인간과 수인.
단순한 체급의 차이가 승부의 천칭을 서서히 기울여간다.
이대로라면 천천히 죽을 뿐이라며, 직감이 나를 비웃는다.
사람은 수인을 이기지 못한다고.
그러나, 인정할 수 없다.
전의를 다시 한번 그러모아 내딛는다.
패배 따위를 말하는 정신을 다그치며, 육신을 채찍질해 달린다.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이길 때까지.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이 조각조각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게 주마등이란 것일까.
나와 함께했던 이들의 웃는 모습이.
그리고, 그들이 피 흘리며 쓰러진 모습들이 떠오른다.
이놈들에게.
밀리아.
"크, 으아아아아아!"
찔러오는 장검에 몸을 들이댄다.
파육음과 함께 어깨가 꿰뚫린다. 그대로 붙잡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빠진 검신이 어깨뼈와 근육을 긁어내, 시린 감각과 타는 듯한 통증이 신경을 울린다.
비명을 참으며,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
나탈리아의 왼팔이 깊숙이 베여나갔다.
벌어진 근육 사이로 긁혀나간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악...! 이 자식이!"
포탄처럼 쏘아진 수인의 무릎이 내 복부를 후려갈긴다.
피를 토하며,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손끝에 힘이 풀려 장검을 놓쳐버렸다.
나이젤.
이를 악물고 배에 힘을 넣어 몸을 비튼다.
찢어지는 통증과 치밀어오르는 토혈을 억누르며, 장검을 걷어찬다.
화살처럼 쏘아진 검신이 나탈리아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크으읏...!"
나탈리아의 손등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내던져진 개처럼, 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진다.
억누른 토혈이 터져 나왔다
의식이 흐트러진다.
입술을 깨물어 으깼다. 정신이 되돌아왔다.
비틀대며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반으로 부러진 거대한 검.
데미안.
대검을 움켜쥐고 일어난다.
"아아아아아아!"
도약하고, 회전하며 내려찍는다.
전신에 남은 모든 기세를 실어.
"아이샨기오르으으!"
나탈리아가, 허벅지에 박힌 내 장검을 뽑아 내던진다.
심장을 노리고 쏘아진 검 끝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막아내기엔 늦었다. 피할 수도 없었고.
그저 심장만을 피하고자 상체를 뒤틀었다.
- 후우웅!
아이멜라의 장검이, 거짓말처럼 몸을 돌린다.
대검의 바람에 휘말린 것일까, 반 바퀴 회전하며 검자루만이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간다.
나탈리아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장검을 치켜들었다.
바위를 쪼개는 천둥과 같이, 굉음과 함께 두 검이 충돌했다.
흑철 검신들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다.
대검의 조각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십 조각의 칼날 파편이 나탈리아의 몸에 박혀들었다.
나탈리아가 전신에서 피를 뿜었다.
은이 벗겨져나간 흑철 대검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 상처라면...!
"크와아아아악!"
아.
포효성과 함께, 네 개의 칼날이 내 몸을 관통했다.
피보라가 뿜어졌다.
"아아아아악!"
살짝 풀어졌던 정신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해낸다.
긴 손톱 네 자루가, 쇄골 어림을 꿰뚫고 헤집었다.
그래. 손톱. 무기가 부서져도, 수인에게는 손톱이...
벌린 아가리가 다가온다.
내 목을 노리고, 물어뜯으려는 듯이.
반사적으로 걷어차며 바닥을 구른다.
진홍빛 핏줄기가 파헤쳐진 지면을 적셨다.
"하아...! 하아아아....!"
억누른 숨을 토해낸다.
몸이 떨린다.
한계에 달한 엘피넬의 성광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축복의 힘으로 몇 번이나 다시 일으켰던 육신이, 마침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통조차 점차 아지랑이처럼 흐려져 갔다.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적을 바라본다.
나탈리아가 울부짖는다. 포효하며 달려온다.
양팔을 크게 벌리고, 여덟 개의 손톱을 치켜세운 채.
야수와도 같이 광폭하게.
장검과 달리, 대검에 입은 상처들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차오르는 살점이 흑철 조각들을 뱉어낸다.
...쉬고 싶었다.
너무나도 지쳐서, 아픔을 견딜 수 없어서,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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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옆에 박혀 있던 장검을, 다시 집어든다.
스스로에게 마지막으로 다짐한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다짐을.
나는 영원히 지지 않겠다.
나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
살아남아서, 반드시 살아남아서.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신념이 아니다.
신념은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속죄가 아니다.
내겐 속죄할 자격조차 없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그래.
내가 해내야만 할 의무이니.
인간을 지켜라.
검을 들고.
세상의 모든 적으로부터.
나라는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라.
검신에 맴도는 푸른 잔광이 짙어진다.
점점 더 선명하게. 점점 더 찬란하게.
황금빛 각인이 태양처럼 타올랐다.
[L'une des douze épées qui défendent l'humanité]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검
전신에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저 따사로운 햇살과 닮은 감각이.
지금이라면 느낄 수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업.
흉흉한 광기를 머금은 살업이 아닌, 찬연한 빛을 발하며 감싸오는 수호의 업.
헤르셀라가 아닌, 내가 쌓아 올린 업의 모습이었다.
분명, 살업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기운이었다.
헤르셀라의 업이 피가 흘러넘치는 강물과도 같았다면, 내 것은 그저 작은 시냇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푸른빛은 너무도 청명하게 반짝여서.
마치, 올려다본 아침 하늘처럼.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저 홀린 듯이. 검을 잡고-
머리 위로.
그리고.
휘두른다.
비명조차 없이, 수인의 대전사가 반으로 쪼개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마침내 5월이 시작되었네요!
벌써 5월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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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설정이 딱 하나 변경되었습니다!
사람만 쓸 수 있는 힘으로요.
본편에서 다른 종족이 업에 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 공지만 수정하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