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화
장미의 황녀
레오폴트와의 야합은 그럭저럭 괜찮게 마무리되었다.
적당히 친한 모습을 보이는 대가로 귀족들의 접근 절반을 차단해주겠다.
나중에 선제후 후계자가 되는 것을 도와줄 테니, 그 이후 자신을 공식적으로 지지해달라.
어차피 연회에서 몇 번 친한 척을 하고 나면,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내가 누구 편인지는 모두가 알겠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의사 표명을 하는 것은 그 무게가 다르니까.
이 정도면 미래를 대비할 보험 정도는 들어둔 셈 쳐도 되겠지.
그 이후로는 적당적당한 잡담들이었다.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이번에 활약한 이들과 접촉해 자신의 기사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추천할만한 사람이 있느냐. 뭐 그런 이야기들.
추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겠다고 얼버무렸다.
데미안이나 밀리아를 추천해볼까 생각해보긴 했는데, 일단 그 녀석들의 의견부터 들어봐야 할 테니까.
성격들을 생각하면 굳이 정치판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원작대로라면 레오폴트가 그런 식으로 데미안을 끌어들이는 전개이니까 여기서 데미안을 추천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공로 자체야 나와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그 나이에 순혈 전사를 쓰러트린 것만 보아도 기사의 자질은 차고 넘치니까.
하지만 레오폴트가 확실한 동아줄이라면 모를까, 이 녀석도 결국 안전자산은 아니라서.
나야 신분과 무력 때문에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울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데미안과 밀리아가 이 시점에 이자벨라의 눈 밖에 났다가는...
...언젠가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조금 후에 에른스트도 만날 예정인데, 물론 그에게 회유당할 생각은 없다고 이야기했더니, 이자벨라 황비의 행적이 여러모로 수상하니 주의하라는 충고가 돌아왔다.
에른스트와 만나게 되면 일단 대놓고 적대하지 말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라고 하더라.
벌써부터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가는 그쪽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면서.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부 끝난 것은 한 시간 반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러면, 이것으로 전부 합의된 걸로 알겠소. 왕녀의 협력에 감사드리오."
레오폴트가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역시나 문관 쪽이 체질인지 굳은살 하나 없는 새하얀 손이었다.
생각해보니 굳은살이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신체 자체가 튼튼해서인지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그런 것은 생기지 않더라.
"그래. 서로 잘해보자고. 몸조심하고."
빈말이 아니다. 원작의 분기처럼 네가 덜컥 죽기라도 했다가는 몹시 곤란해지거든.
적당히 웃어주며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레오폴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도 딱히 음흉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크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순수하게 이 합의를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오히려 악수를 건넨다는 것 자체가, 내가 바라는 대로 나를 여자 취급하지 않고 정치적 동반자나 전사로서 대우해 주겠다는 의미겠지.
악수를 하는 것은 원래 귀족 남성끼리의 예법이지, 레이디에게 건네는 인사법이 아니니까.
눈치가 빠르네, 레오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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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로 돌아와 보니 나이젤이 얌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도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네.
"아, 하샬르 님. 회담은 잘 끝마치셨습니까?"
"그래, 썩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어. 아쉽지만 내용까지는 말해주기 어렵겠네."
레오폴트가 가급적 아는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어차피 루드비히 후작이야 레오폴트에게 알아서 전해 들을 테니 상관없겠지.
"그러면, 바로 다음 궁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이제 그쪽도 만나보러 가야겠지."
내 대답을 들은 나이젤이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오찬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으니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하겠군요."
"아마 그 안에 끝날 거야."
에른스트와는 길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오찬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만나기도 번거로웠고.
그러면 나도 황궁에서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는 뜻인데, 부담스러워서 어디 음식이 넘어가기야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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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의 별궁을 나와 곧바로 에른스트가 머무르는 궁으로 향했다.
이쪽 별궁 역시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레오폴트의 궁이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담백한 모습이었던 반면, 이곳의 별궁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다.
정원에는 기화요초와 대리석 조각상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했고 중앙에는 은으로 만든 분수대까지 놓여 있었다.
궁궐 역시 본궁과 동일한 대리석 재질에, 발코니의 난간마다 금빛 세공이 번쩍였다.
저 난간 하나만 뽑아가도 당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돈을 물 쓰듯이 쏟아부어 가며 만들어낸 경관을 적당히 구경하며 별궁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두 명의 기사가 꼿꼿이 선 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로열 가드는 아닌 것 같고, 단순한 경비 기사인가.
그중 하나에게 초대장을 건네주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궁 안으로 들어섰다.
궁궐 내부 역시 온갖 장식으로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이자벨라나 에른스트의 취향이 좀 사치스러운 모양이야. 아마 이자벨라 쪽이.
시종을 따라 오 분쯤 걸었을까.
"거기 잠깐, 그 쪽은 누구지? 황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한창 복도를 지나가던 와중에, 우리를 발견한 여자 하나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세로로 말아 늘어뜨린 밝은 금발.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고,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 장난기와 흥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붉게 상기된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운동이라도 하다 온 것인지 승마복과 비슷한 옷차림에, 노출된 맨살마다 살짝 젖어 있었다.
달큰한 체향과 달아오른 열기가 내 쪽까지 전해져왔다.
허리춤에는 장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는데, 별다른 장식 없이 투박한 모양새가 오히려 장식품이 아닌 철저한 실전용 무기임을 암시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한 물건인지, 검 자루를 감싼 가죽이 꽤나 닳아 있었다.
"제임스, 이 아가씨를 내게 소개해 주겠어?"
고압적인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자벨라의 딸, 레오노르 비텔스바흐.
제국의 2 황녀이자...오직 여기사로만 이루어진 기사단, 장미십자기사단의 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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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십자기사단.
마흔 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사실상 레오노르의 친위대나 다름없는 집단이다.
전원이 여기사라는 특징 이외에는 딱히 특출난 점이 없었지만, 수많은 여기사들이 한데 모인 모습은 그것만으로 나름 진귀한 볼거리에 속했다.
이런 특이한 기사단이 만들어진 이유에는 페르디난트 2세의 고뇌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레오노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은 레이디가 아닌 기사가 되고 싶다고 부모를 졸라대었던 당찬 아이였고, 황제는 그런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그것을 이유로 반대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레오노르는 검사로서 괜찮은 수준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황제의 눈앞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달인의 영역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기사가 되기에는 차고 넘치는 실력으로.
계속 반대한다면 차라리 가출해 자유 기사로 살겠다는 딸 때문에, 황제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비어버렸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베개에 한가득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기사가 하고 싶다는데, 그냥 허락해버리고 말자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황녀씩이나 되는 고귀한 여자를 기존의 기사단에 배속시킬 수는 없었다.
미모의 여인을 사내놈들이 가득한 기사단에 입단시켰다가, 혹여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터이니.
기사단 하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정도의.
페르디난트 2세는 고민 끝에 아예 여기사만으로 이루어진 새 기사단을 창설해 레오노르를 그 단장으로 삼았다.
그것이 바로 장미십자기사단, 통칭 장미기사단이라 불리는 집단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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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자체의 전투력은 딱 평균 정도라던가.
정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오합지졸이라 평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수준.
확실히 단장이라는 이 여자도 달인급은 아니니까.
아마 지금의 데미안과 비슷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레오노르를 마주 보았다.
"황자님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신 카하르의 왕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님입니다. 하샬르 님, 이분께선 장미십자기사단의 단장이신 레오노르 비텔스바흐 황녀님이십니다."
시종이 정중한 태도로 서로를 소개했다.
"아이샨기오르? 그, 수인 포식자 왕녀? 흐음...전해 들은 이야기와는 꽤 다른 느낌인데..."
레오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턱 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가슴 위쪽을 짙게 물들였다.
...뭔가 야하네.
"아무튼 반가워. 레오노르 비텔스바흐야. 레오노르 님, 레오노르 황녀, 레오노르 경...뭐 원하는 대로 불러도 돼. 특별히 허락하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다. 이쪽도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려나? 레오노르 황녀."
내 대답을 들은 레오노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나도 웃어주었다.
옆에서 보면 조금 건방져 보이겠지만, 오히려 이런 당찬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취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미 레오폴트 쪽을 선택한 이상 언젠가는 그녀와 적대하게 될지도 모르지만...굳이 여기서 날을 세울 필요는 없겠지.
어미랑 달리 악인도 아니고, 딱히 권력다툼에 흥미가 있는 여자도 아니니까.
"성격은 소문대로인 모양이네."
"불쾌하시다면 예의를 차려 줄 수도 있는데요, 황녀님."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어. 역시 기사라면 좀 당당한 맛이 있어야지."
거 봐. 역시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어느덧 월요일이 돌아와버렸네요. 이번 주도 다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