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화
포상 수여식 (1)
그 뒤로 유가족과 참배객들이 위령비 앞에 꽃 따위를 놓아두는 절차가 이어졌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 나간 뒷설정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레이시 엘메인 스타돌프.
성녀 후보가 아닌 진정한 성녀로 인정받기 위해, 성국을 벗어나 제국까지 찾아온 여인.
제국을 도와 수많은 이들을 구하고 온갖 사악한 이들을 멸하며 나아간 끝에, 마침내 제국의 성녀라 불리게 되는 캐릭터였다.
제국의 성녀라는 말이, 제3 제국을 말하는 거였냐...
나는 성녀 후보의 연설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하나의 종족, 하나의 세계, 하나의 믿음. 그리고 수인 몰살.
과격하고 급진적인 연설이었다. 다른 사제들이나 황실 측의 인물이 그녀를 제지하려 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은 이 연설 자체가 그들 모두의 의도대로라는 거겠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 수인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심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나.
겸사겸사 황가로 향할지 모르는 시민들의 분노도 전부 수인들 쪽으로 틀어버리고?
확실히 효과가 뛰어나긴 하네.
거친 사람도 유약한 사람도 일단 수인 몰살 자체는 옳은 일인 것 같다고 서로서로 속삭여대고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옳은 말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내게 묘하게 쌀쌀맞게 굴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나?
카`하르의 평판은 본래 수인과 다를 바 없는 아인종이었으니. 내심 이 기회에 나를 죽이고 싶었겠지.
그러나 엘피넬의 축복이 기묘할 정도로 잘 듣는 점이나 제도 시민들을 몸 바쳐 지킨 일을 생각하면, 나를 해치는 것이 과연 정말로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래서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일관했던 거라던가.
개인적으로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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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동안 마침내 장례 미사가 마무리되었다.
마침내 이번 사건의 공로자들을 치하하며, 적절한 포상을 하사하기 위한 수여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이러한 행사는 보통 대성당 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이번만은 특별히 광장 한복판에서 진행되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을 구해 준 영웅이자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들의 모습을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광장 앞쪽에 거대한 연단이 마련되었다.
기사와 병사 여럿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럴듯한 무대 하나를 조립해 완성한 것이다.
황실 인물들과 고위 귀족들이 단상에 도열했다.
황제와 두 황자들, 비엔 공작, 란덴부르크 변경백, 엘피넬 교단과 샤울리테 교단의 대주교. 그리고 몇몇 모르는 귀족들까지.
나를 포함해 수여식에 초대받은 학생들이 앞으로 나섰다.
프리데, 아샤, 데미안, 밀리아, 에드가.
전원이 수인 전사를 상대로 승리한 학생들이었다.
오필리아도 수인 하나쯤은 잡았을 거라 생각했는데...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제 언니 때문에 실력을 감추고 지내는 입장이니까, 수인을 물리치고도 비밀로 한 건가.
페르네야 애초에 올 생각도 없었을 테고.
오늘도 방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
오히려 에드가가 포함된 것이 의외였다.
저 녀석 전법이라고는 자신에게 회복 기적을 걸고 소모전을 벌이는 것뿐일 텐데.
수인 상대로 회복력을 겨루어서 이기다니, 사람이 아니라 바퀴벌레 수준의 생명력이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관심을 받아본 것이 처음인지 밀리아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데미안과 아샤는 그저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고, 프리데는 언제나처럼 도도한 모습이었다.
에드가는 감격스러운 듯 눈을 빛냈고.
나는 아직도 멍한 느낌이라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인 포식자...소문과는......마물을 닮았다더니..."
'아들 말로는 수선화 같은 왕녀라고...확실히 아름답긴......수선화는 아니지 않나...?'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여신의 기사라는 소문도...카하르가 왜...'
'저 나이에 달인이라던데...과연 어떤지...'
'나는 그날 보았어...! 틀림없이 새로운 달인이...'
다른 얘들 이야기나 하지, 죄다 내 이야기뿐이네.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할 수 있었다.
공로생들이 전원 단상에 올라서자, 황제가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서 보니 비어버린 머리숱과 처진 주름이 뚜렷하게 보여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급박한 사태 속에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인류를 위해 눈부신 공훈을 세운 젊은 영웅들이여. 이는 제국이 그대들에게 표하는 감사이자, 그대들의 영예로움을 증거하는 표상이니. 부덕한 짐은 염치없게도 이 자리에 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겠소."
우리 전원이 황제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이 또한 미리 전해 받은 절차였다.
공훈의 역순으로 포상할 예정이었기에, 내 차례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황제가 아샤에게 다가갔다.
"붉은 구리 혈족의 아샤 공. 인류와는 관계가 없는 반인종임에도, 특례 입학생들을 공격한 수인 전사들을 상대로, 그리고 도시에 퍼진 악도들을 상대로 보여 준 귀공의 헌신에 감사하는 바이오. 귀공에게 제국 기사의 직위와 2급 명예 훈장을 하사하겠소."
기사 직위와 명예 훈장. 사실 그것만으론 큰 의미가 없는 포상이었다.
반인종이 제국에서 기사로 일할 것도 아니고, 제국의 훈장을 받아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그리고, 수인을 상대로 귀공의 자산을 아낌없이 소모하였다고 들었소. 잃어버린 은의 세 배를 포상으로 내리도록 하겠소."
"제국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그래. 아샤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포상은 이쪽이었다.
재산이 복사가 된 아샤가 고개 숙인 채 미소 지었다. 기쁜 마음을 여실히 드러낸 채로.
"엘피넬 교의 팔라딘 후보생, 에드가 공. 시민들을 습격하는 수인을 막아선 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싸워 그들을 지켜낸 점. 실로 엘피넬 교단의 귀감으로 남을 만한 분투였소. 귀공에게 마찬가지로 2급 명예 훈장을 하사하겠소. 교단 또한 그대의 신실함에 마땅한 찬사를 표할 것이오."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엘피넬 님의 가호가 영원토록 제국을 축복하기를."
에드가의 경우엔 훈장만을 받았다.
팔라딘 임명이 확실시되는 인물에게 굳이 기사 직위를 내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려나.
"데미안 공, 밀리아 공. 어린 나이임에도 순혈 전사 둘과 혼혈 전사 하나를 쓰러트리고, 수인의 대전사를 상대로 영웅적인 분투를 벌였다고 들었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아카데미 학생들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터."
확실히, 데미안과 밀리아가 나탈리아의 발목을 붙들어주지 않았더라면, 1학년들은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 죽었었겠지.
"그대들이 구한 신민 모두가, 그날 그대들이 보여주었던 용기를 길이길이 칭송할 것이오. 기사 직위와 2급 무공 훈장을 하사하겠소. 앞으로도 제국의 신민들을 위해 헌신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오."
"과분한 명예를 내려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 감사드립니다!"
데미안과 밀리아에겐 명예 훈장이 아닌 무공 훈장이 하사되었다.
적의 핵심 전력을 막아내는 뛰어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순혈 수인들을 쓰러트린 시점에서, 이미 어지간한 기사들 이상의 실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걸로 저 녀석들도 나름 성공적인 첫걸음을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지.
"페일룬의 공녀, 프리데 반 페일룬 공. 순혈 전사 여럿과 수많은 수인들을 토벌한 성과, 대공가의 명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훌륭한 분전이었소.
그대에게도 2급 무공 훈장을 하사하겠소."
"페일룬의 성을 지닌 이로써 당연히 해야 할 책무입니다."
공식 석상이기 때문인지, 프리데의 태도 역시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무공 훈장 외에 별다른 포상이 없는 것은 아마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
기사 직위 정도야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일 테고, 포상금 역시 대공가의 여식에게 가치가 없으니까.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말이오. 제국의 북부에 페일룬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들의 축복이나 다름없으니, 페일룬 대공에게도 마땅히 황실의 호의를 전하겠소. 대공 역시 그대를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생각하오."
"영광입니다. 페일룬은 영원히 제국의 북부를 지킬 것입니다."
역시, 프리데 개인이 아닌 페일룬 대공가에 황실 차원에서 적절한 보상을 하사할 예정인가 보네.
사실 수인이 제도에 나타난 시점에서, 오히려 북부의 경계 부실을 탓할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굳이 페일룬과 척질 이유가 없으니까.
황권이 약해진 데다가 수인 위협론이 강한 힘을 얻은 지금은 더더욱.
"마지막으로, 이번 일의 최고 공로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하오. 모두 환대해주기를 부탁드리겠소."
드디어 내 차례였다.
단상 앞으로 나서자, 수만 명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역시, 조금 긴장되는걸.
손가락이 떨릴 정도는 아니지만, 마른침이 절로 넘어갈 정도로 말이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경험에는 나 역시 슬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숫자가 수만 명쯤 되니 확실히 좀 부담스러웠다.
"카하르의 왕녀, 하샬르 아이샨기오르 공이오."
내 무용담 자체는 이미 제도 전체에 퍼져있었기에, 그 정체를 듣는다고 해서 경악하는 이는 없었다.
소문에 대한 이야기로 술렁거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마물을 닮은 생김새라는 악평 정도는 사라지겠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다들 성녀 후보님을 좋아해주셔서 기쁘네요!
한편 더 갑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