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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82화 (82/100)

제 82화

가벼운 이야기를 마치고

"허면 그리하지요. 배려 감사합니다."

저번처럼 아예 반말하는 건 참아달라는 뜻이겠지.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으니까.

"좋소. 왕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달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이들에게 왕녀를 소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오. 혹여 폐가 되는 부탁이겠소?"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은지라, 긴 이야기는 어렵겠지만...잠시 동안이라면 괜찮겠지요."

정략혼 이야기만 안 나오면 넘어가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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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몇 귀족들과 순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행히, 레오폴트 황자가 사전에 이야기해둔 것인지 약혼 따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내 외모에 대한 찬사도 늘어놓지 않고, 그저 행한 일과 무력에 대한 대화만이 오갔다.

제국의 남작 이전에 타국 왕녀의 신분이니만큼, 말을 걸어오는 귀족들 역시 내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하긴 후작급의 고위 귀족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귀족들보다야 내가 낫긴 하지.

나 역시 예의를 차려 가벼운 존댓말을 써 주었다.

따지자면 한배를 탄 놈들인데, 굳이 무례하게 굴어 악감정을 남길 필요는 없잖아?

"수인의 대전사를 단독으로 쓰러트렸다 들었습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어떤 자였습니까?"

"나탈리아라는 암표범이었어요. 생각보다 강한 적이었던 데다가...그때 이미 부상이 심했던지라, 업을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 이기지 못했겠네요. 그날 제도에 내려앉았던 엘피넬 님의 축복 역시, 때마침 큰 도움이 되었지요."

레이시의 광역 신성술이었던가.

그거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해보고 무력하게 패했을 테니.

"과연 엘피넬 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분께선 항상 저희 인류를 가호하시는군요."

"그러게요."

가호까지는 모르겠지만...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마 맞겠지.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장검을 사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카하르도 장검을 다루는 겁니까? 제가 읽기로는 구부러진 곡도를 사용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놀랍더군요."

"아마 저만 그럴 거예요. 어머니께 제국 검술의 기초를 배웠었던지라."

"제국의 기사이셨던 모양이군요. 이렇게 훌륭한 영애를 두셨으니, 틀림없이 기사 중의 기사이셨을 터인데, 제 견식이 짧아 메디안 가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점이 부끄럽습니다.

"실력을 감추고 지내셨다고 들었어요. 부끄러워하실 일은 아니겠네요."

대충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적당히 응대하다가 피로를 빌미로 빠져나왔다.

레오폴트가 만족스럽다는 듯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절반이 추근대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긴 했네.

그러면 나머지 절반은 어쩌려나.

슬쩍 에른스트 파벌 쪽을 쳐다보니, 미약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음. 아무래도 내가 레오폴트 파벌이라고 확신한 것 같은데.

암살자라도 보내오는 것 아닌지 몰라.

어차피 회담이 슬슬 끝날 시간이기도 하고 적당히 에른스트에게도 인사 정도만 하고 가면 되려나.

그 정도라면 레오폴트 측이야 그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모습 정도로 여길 테고, 에른스트 측은 내가 일단은 중립적인 입장을 보인다고 받아들여 주겠지.

사람은 원래 희망적 관측을 좋아하는 족속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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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에게 다가가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기사의 예법대로.

"에른스트 전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의외로군. 왕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올 줄이야."

내 인사를 받은 에른스트가 다소 놀랐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에른스트 파벌의 귀족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오폴트 전하와 인사를 나누었으니, 시간이 다소 늦기는 했으나 에른스트 전하께도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그래...틀린 말은 아니지. 예법을 지키려는 모습이 카하르답지 않기는 하지만."

"저 역시 일단은 제국의 일원이 되었으니까요. 초원에서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지요?"

에른스트가 재미있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입꼬리만 비튼 정도였지만.

휘하 귀족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적인지, 아니면 중립인지 확신이 서지 않겠지.

적이라면 상관없지만...중립인 자를 굳이 경원시하여, 결국 적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을 테니까.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아무튼, 찾아온 이상 소개는 해 주어야겠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카하르의 왕녀, 메디안 남작, 아이샨기오르 영애라네."

"하샬르 메디안 아이샨기오르입니다. 인사드리죠."

에른스트 휘하의 귀족들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레이디의 인사법이 아닌, 아카데미의 군례였지만.

"아까 왕녀가 말했듯이 슬슬 회담을 파할 시간이니, 자세한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다들 무도회 때를 기다리게. 왕녀 역시 그편이 편하겠지?"

"배려 감사드리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다음에 다시 만나죠. 그때까지 다들 평안하시길."

짧은 인사를 마치고 다시 프리데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세 사람은 어느새 친해진 것인지, 어색했던 모습은 간데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프리데가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데미안이 받아주면 밀리아가 감탄하는 정도였지만.

생각보다 사이가 나쁘지 않네. 아무래도 수인 상대로 싸워 이겨냈다는 부분이 프리데의 호의를 산 거겠지.

쟤는 저리도 대화에 굶주려 있던 주제에 왜 친구 하나 없이 지내던 걸까.

친구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재밌어 보이네, 프리데. 의외로 서로 죽이 잘 맞나보지?"

"글쎄? 그것보다 갑자기 두 명이나 억지로 떠넘기고 말이야. 너, 나를 너무 편히 대하는 것 아니야?"

프리데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거 또 틱틱대기는. 본심도 아니면서.

그녀의 바닥은 이미 드러난 지 오래다.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자...!

"미안하네. 워낙 급해서 그만. 여기서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잖냐."

"어, 그,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

그녀의 팔짱이 슬그머니 풀렸다.

...쉽다 쉬워.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처음의 까칠함은 다 어디로 간 거야.

그게 전부 외로워서 생긴 히스테리였냐.

"뭐 그래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네. 데미안도, 밀리아도."

"프리데 선배님께서 감사하게도 우리를 많이 신경 써주셨거든."

"밀리아 말대로야. 감사합니다, 프리데 선배님."

"아니, 뭐 그건...그래, 특별히 신경 써준 거니까 감사해도 좋아."

프리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 셋이서 친하게 지내라.

어차피 나중에는 자주 붙여놓을 계획이니까.

그러면 프리데의 친구는 나 포함 넷이 되는 건가?

칼릭스가 널 친구로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그래도 빈번히 같이 나타나던 걸 보면 친구로 쳐도 되겠지.

친구가 네 배로 늘다니. 축하해, 프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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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짧은 회담이 그 끝을 맞이했다.

황자와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제각기 자리를 떠나갔다.

루드비히 후작 역시 내게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고.

비엔 공작과 두 대사제는 나를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란덴부르크의 후계자가 될 거라는 사실쯤은, 저들도 이미 알고 있으려나. 같은 선제후들이니까.

성당의 밖은 이미 노을빛으로 변해 있었다.

성벽 끄트머리에 걸린 태양이 하루의 마지막을 알렸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제공해준 대형 마차에 올라탔다.

후작이 선물해준 마차와 달리 꽤 덜컹거리는 편이었지만 내부 공간 자체는 드넓었다.

마차 모서리에 앉은 채,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프리데와 아샤, 데미안과 밀리아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문 뒤였다.

데미안과 밀리아에게 인사를 나누고 특별관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에드가도 나한테 인사를 하기는 하더라. 그동안 나를 오해했다던가.

적당히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잘 말린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이 지친 몸을 따스하게 감싸왔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례 미사와 레이시의 연설, 제국 귀족으로 편입. 거기에 다른 귀족들과의 가벼운 환담까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하루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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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데에게 부탁해 데미안과 밀리아를 단련시켜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았다.

"단련? 저 녀석들을?"

"어. 자질은 넘치는데 실전경험이 부족한 애들이라...그 부분을 좀 도와줬으면 해서."

나하고만 싸우면 실력이 늘기보다는 그저 내 공격방식에 익숙해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카데미의 허락과 친구들의 동의는 진작에 받아놓은 상태였다.

아카데미 역시 이미 기사급 이상의 실력자에게 1학년의 커리큘럼 전체를 강요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여겼으니.

결과적으로 특례생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권한을 허가받았다.

그러니 남는 시간에 프리데에게 단련받으면 되겠지.

데미안과 밀리아를 설득하는 일은 더욱 손쉬웠다.

너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상 앞으로 수많은 관심을 끌게 될 터인데, 이에 휘둘리지 않고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실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정도의 설득으로 충분했다.

"잘 키워놓으면 나중에 북부로 찾아올지도 모르지 않겠어?"

"흐음, 그럴까? 하긴 요즘은 나름 한가하니까. 주에 한 번 정도라면야."

프리데는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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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샤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일로 얻은 수인 가죽들을 매입해, 그것을 가공해서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의외로 수요가 꽤 된다고 하던가.

열등 혼혈의 가죽은 상품 가치가 없었지만, 혼혈 전사쯤 되는 이들의 가죽은 꽤 튼튼했고 순혈 전사들의 가죽은 방어구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강인하기 그지없었기에.

프리데는 아샤의 사업 구상에 대해 듣더니,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수익 일부를 나누어 가지는 조건으로, 나중에 북부에서 붙잡은 수인들의 가죽을 넘겨주기로 했다던가.

그 외에도, 회담에서 만났던 몇몇 신흥 귀족들이 어디선가 질 좋은 수인 가죽을 구해와 그녀에게 의뢰를 맡기곤 했다.

듣기로는 가공방식 자체가 사람이 따라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던가.

덕분에 사실상 아샤가 모든 물량을 독점하는 구조였다.

돈이 끝없이 쏟아진다며 방 안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더라.

그녀의 상품을 시험 삼아 도입해본 이들의 증언에 의해, 수인 가죽의 내구성과 실용성이 증명되면서 이는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매김했다.

수인 가죽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모험가나 기사, 군인같이 주로 몸을 쓰는 직종들 사이에서.

반인 하나가 제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게 긍정적인 바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좋은 하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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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수인 가죽은 제국에선 그다지 인기 없는 장식물 정도였습니다.

가공하기가 꽤 어렵거든요!

그러나 이제는...인기 상품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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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프리데의 친구는 4명이 되었다. 적어도 그녀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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