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화
새로 얻은 장비는 감정받고 나서 사용하자
그 뒤로는 예상했던 고난의 연속이었다.
수십 수백의 편지가 매일같이 전해졌다.
레오폴트 쪽의 귀족들은 황자와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별 내용 없는 단순한 감사 편지 정도였지만, 에른스트 쪽은 좀 달랐다.
내가 정말 중립인지 묻는 편지나 에른스트파로 회유하려는 편지는 양반이었다.
레오폴트와는 단순한 친교 관계고, 아예 에른스트파를 척질 생각은 없다는 식으로 적당히 답장하면 되었으니.
특히 레오노르 황녀와 같은 여기사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자 한다는 변명이 생각보다 효과가 괜찮았다.
문제는 역시 몰려든 정략혼 관련 편지들과...아예 연서를 보내오는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내용을 읽어봐야, 그것이 어떤 종류의 편지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보통 첫 줄만 보면 감이 오긴 했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눈동자에 가슴이 떨렸다느니, 검을 빛내며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이 엘피넬 님의 화신과도 같았다느니...
계속 읽고 있자니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아, 대신 편지를 오그라트렸다.
그래도 이놈들은 단순한 연서니까 참아준다고 치자.
기분나쁘긴 하지만 말이야.
정략혼 관련 편지는 아예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는 놈.
동부와의 교역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놈.
메디안 가를 다시 번성시키자는 놈.
아직 불안정한 내 입지를 지적하며, 제국의 평화와 일신의 안녕을 위해 자신에게 오라는 놈까지.
"문명과 야만의 결합을 통해 두 종족의 화합을...? 이 새끼는 진짜 가관이네."
어이가 없어서 재떨이에 던지고 담뱃불로 태워버렸다.
정략혼을 하자는 새끼가, 상대를 대놓고 야만족이라고 부르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하긴, 이 시점에 나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있을 리 없나.
눈치가 멀쩡한 놈이면 윗사람들 분위기를 보고, 이 짓거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쯤은 파악했을 테니까.
결론적으로 내게 연서니, 약혼 요청이니 하는 편지를 보내는 놈들은 귀족 중에서도 헛된 꿈을 꾸는 머저리들이라는 거지.
"나이젤, 고용인들에게 부탁해서 이놈들에게 일괄적인 답장을 좀 보내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용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유감스럽게도 저는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 누구와도.' 이렇게 전하라고 해."
전한다고 들어먹기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조금 휴식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좀 쉬어야겠어."
담배를 꼬나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에서 프리데가 신나게 데미안을 두들기고 있었다. 내 부탁대로 말이지.
그나마 좀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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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가 특별관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일을 마무리 지은 건 아니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왔다던가.
때마침 잘됐네. 물어볼 것도 있었는데 말이지.
...그 충격적인 연설을 들은 이후로, 그녀를 만나기가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수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 연설문 내용이라는 게...어떤 미대 지망생을 연상시켜서.
솔직히 성녀 후보가 할 말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래도,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얼굴을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가 봐야겠지.
방을 나서 3층으로 향했다.
전부 불타버렸던 3층 역시 어느새 그럭저럭 복구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레이시의 방도 박살 났었겠네.
돌아와서는 꽤 황당해하지 않았을까.
십자가가 걸려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시죠?"
"하샬르인데. 잠시 시간 괜찮을까?"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레이시는 가벼운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걸치고 다니던 흰 성복과, 몇 벌의 수녀복이 벽 한쪽의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하긴, 역시 보는 이 하나 없는 개인 숙소에서까지 저 옷을 입은 채 지내기는 싫었겠지.
쉽사리 더러워지는 의복은 아니지만, 치렁치렁해서 조금 불편하긴 할 테니까.
방은 생각보다 말끔했다.
기본적인 가구들, 벽에 걸린 십자가와 메이스 이외에는 딱히 장식이라 할 물건조차 없었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책 한 권과 무언가를 적다가 만 일지가 놓여 있었고, 그 옆 책장에는 다양한 책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건가?
무슨 책일지 궁금하여 슬쩍 제목들을 훑어보았다.
'이단의 분류. 종족신과 고대신, 악신.'
'통합 신앙, 종교분쟁의 의의와 결말.'
'카롤루스 대제와 대천신교의 역사.'
이것들은 꽤 무난한 제목들이네.
성녀로 선출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신학 공부에 열중하는 것이려나.
그건 꽤 모범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겠는걸.
'종족 계통발생론.'
'이종족의 위협.'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법.'
어...
그때의 연설이 다시 생각날 것 같은데.
'화형의 비효율성-질식사를 방지하는 법.'
'배교자들에게 허용되는 정당한 심문들.'
'역사가 증명하는 퇴화 이론.'
...그만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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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테이블로 안내한 레이시가 물 한잔을 건네주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신지라, 드릴 만한 것이 이것뿐이라 죄송하군요.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두 가지 정도, 물어볼 것이 좀 있었거든. 대답해줄 사람이 그쪽밖에 없어서 말이지. 저주 관련 문제들이라."
이런 분야는 그녀가 전문일 테니까 말이야.
"저주라...말씀하시죠."
물 한 모금을 들이킨 뒤, 케이스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폭 30cm, 길이 1m쯤 되는 금속 케이스.
잠금장치를 풀고, 내용물을 레이시에게 보여주었다.
은은한 냉기를 발하는 백은색 건틀릿.
서릿발이었다.
"이 물건에 걸린 저주의 정체랑 혹시 해결할 방법은 있는지,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싶은데."
"....주물, 그것도 상당히 깊은 저주로군요. 이걸 누구에게 받았죠?"
레이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상당히 놀란 듯한 기색이었다.
"동부에 있을 때, 무구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이런 걸 내오던데. 문제는 이걸 끼기만 하면 내 상태가 좀...안 좋아져서 말이지."
"그야 당연하겠죠. 이건 당신을 죽이려고 만든 물건이네요. 두 종류의 저주를 담아서."
"나를 죽이려고?"
이거 암살 도구였어...?
원작에서 끝까지 끼고 다니던 걸 보면 실패한 것 같기는 한데.
레이시가 서릿발을 꺼내 들고 진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네. 명계의 냉기에 광기의 저주까지 더해졌으니, 착용자는 점점 쇠약해지다가 미쳐 날뛰며 죽었겠네요. 명계의 냉기는 소재 자체의 원한 때문이고...나머지 하나, 광기의 저주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어넣은 것이고요. 동부에서도 적이 많았던 모양이죠?"
"누군가라...동부에 주술사가 남아 있지는 않을 텐데."
주술사라면 카`하르가 전부 죽여버렸다고 하던데 말이지.
내게 전해질 물건에 수작질을 부리려면 왕궁에 속한 인물 정도가 아니라면 어려울 텐데.
내 오라비라는 놈들 중 하나의 짓이려나?
"그것까지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하나둘이 아닌 것은 분명하네요. 항마력을 돌파하고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지독한 주술이라면, 여러 명의 술자가 힘을 합쳐야 했을 테니까요. 발동만 한다면 살업과 연계되어 효과 자체는 확실했겠지만요."
어쩐지. 항마력이 있는데도 저주의 영향을 받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애초에 항마력을 돌파할 수준의 저주에, 헤르셀라의 살업까지 반응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살업을 쌓을 때마다 저주 역시 강해지고, 그 광기에 물들어 더한 살업을 쌓아갈 테니까.
광기의 헤르셀라는 이 저주 때문에 탄생한 것이었나.
"어쩐지...그래서, 다른 하나는? 뭐라고 했더라, 명계의 냉기? 그건 소재 자체의 문제라고 했었지."
"네. 이 재질, 이 영격. 아무래도 에고 비스트였나 보네요. 그쪽에서는 영물이라 부르던가요? 이미 멸종한 줄로만 알았는데요."
서릿발의 재료라고 하면, 아마 서리골짜기의 은빛 뱀이었던가...?
직접 본 적은 없고 텍스트로만 읽어본지라 잘 모르겠네.
"참살당한 원혼이 여전히 시체에 묶여있어요. 닿는 모든 것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명계의 냉기를 품은 채 말이죠."
"죽어서까지 그 모양인가...그래서, 해결할 수 있어?"
"으음..."
레이시가 서릿발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을 흐렸다.
"광기의 저주는 약화시킬 수 있겠지만 아예 없애기는 어렵겠네요. 원혼 쪽 저주는 원혼 자체를 소각시켜 버리면 그만이지만, 괜찮겠어요? 그러면 이 무구는 그저 단순한 비늘 건틀릿이 되어버릴 텐데요. 강도도 약해질 테고, 상대에게 저주의 해를 입히는 효과도 잃겠죠."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
단단하지도 않고 공격력도 약해지면, 그냥 착용자를 정신이상자로 만드는 쓰레기 장비잖아.
"...그러면 냉기 쪽은 내버려 두자. 광기의 저주 쪽을 약화시킨다면, 어느 정도까지 약화되는 건데?"
"폭력적인 충동이 들끓긴 하겠지만, 적어도 정신줄을 놓지는 않겠죠. 스스로 광기에 빠져든다면 무의미해지겠지만요."
결국 임시방편이라는 건가.
그래도 정신줄을 놓거나 다시 대살육을 저지르지 않으면 그럭저럭 쓸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애매한걸...그런 물건은 꼭 결정적일 때 다시 문제를 일으키던데."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아예 근본적인 해결책을 취하는 법도 있답니다. 업을 쌓도록 하세요. 지금 이상으로"
"업?"
"네. 무고한 자의 피로 물든 살업이 아닌, 수호의 업과 전사의 위업을. 업이란 사람의 영혼에 깃드는 것. 그자가 살아가는 발자취이자 신념의 증거."
레이시가 살짝 미소 지었다. 아이에게 조언해 주는 어른처럼.
"굳건하게 쌓인 업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강인한 정신을 당신께 선사할 테니, 광기의 저주조차 이를 범하지 못하겠지요."
업이라...
쉽게 말해서, 내가 더욱 강해지면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소리인가.
"아직은 좀 먼 얘기겠네. 그럼 일단 억제라도 좀 해 줘."
"500골드에요."
어?
무료가 아니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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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
서리 골짜기의 흰 뱀은, 최후의 숨을 토해내며 깊은 원념을 남겼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게 저주가 있기를.
명계의 차가움은 닿는 이 모두를 죽음으로 이끈다.
피를 마실 때마다, 망령의 독기는 더욱 짙어지기 마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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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저주 효과가 발동되려면, 건틀릿에 피가 흘러들어가야 한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맨 처음 시험삼아 장비했던 때는 그냥 좀 차가운 갑옷이었죠.
= 건틀릿으로 죽인 적의 수가 늘어날 때마다 더 튼튼해지고 저주도 강해집니다!
레벨링 무기이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