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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84화 (84/100)

제 84화

OOO님이 살아계신다!

"그...좀 비싸지 않나?"

"합리적인 가격이에요. 저 역시 이걸 억제하려면 나흘간 성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데다가, 그만큼의 성수 역시 소모되니까요."

성녀 후보의 나흘을 사는 비용이 몇백 골드라면 확실히 비싼 것은 아니긴 한데...

당장은 그런 거금을 마련하기 힘든 처지라.

"...일단 외상으로 어떻게 안 될까? 솔직히 지금은 돈이 없어서...대신 부탁 한두 개쯤은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앞으로 점점 돈이 모이긴 할 테니까,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갚으면 되겠지.

"안 되려나...?"

레이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엘피넬이시여, 어째서......"

그녀가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참으로 경건한 태도로.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에, 그저 컵에 담긴 물을 쭉 들이켰다.

어디서 구한 물인지 맹물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청량했다.

"...할 수 없네요. 늦어도 일 년 안에는 전부 갚도록 하세요. 내년이면 저는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요."

레이시가 마지못해 외상을 허락해주었다.

일 년이라니. 생각보다 여유 기한이 엄청나게 후한걸.

태도를 보면 자비심이나 호의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준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아무튼 잘됐지 뭐.

"일 년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고맙다고 해야겠네."

"저 말고, 엘피넬 님께 감사하세요."

그래. 감사합니다, 엘피넬 님. 제 감사가 잘 들리시지요?

어차피 보고 있을 거 아니야.

적당히 성호를 긋는 흉내를 내며 그녀에게 서릿발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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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명계의 냉기에 손톱 형태의 무기라면...전의 그 데인인은 당신에게 당한 것이었겠군요."

뭐?

서릿발을 담은 케이스를 한쪽으로 치운 레이시가 뜬금없이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귀를 의심케 하는 내용. 갑작스러운 충격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전의 그 데인인이라고?

내가 서릿발을 끼고 싸운 사람, 그것도 데인인은 단 하나뿐인데?

크누트.

"크누트를, 알아?"

당황을 애써 억누르며 질문한 탓일까,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름이 크누트였나요? 몇 달 전에 교관직 여기사 하나가 황급히 저를 찾아왔었거든요. 팔 할쯤 시체가 된 그 남자를 데리고요. 교관의 부탁이기에 치료해주긴 했었지만...그 이후 갑자기 둘 다 종적을 감추었죠."

놈이 살아 있다고?

피 대신 분노와 원한만이 혈관 속을 흐르던, 그 복수귀 성전사가?

그야 내가 분명히 성녀의 치료라도 받지 않고서야 살기 힘든 중상이라고 했었지만...

그런데 정말 성녀 후보의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고? 이게 그 대단하신 뵐베르크의 인도라던가 뭐 그런 거냐?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그가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었기에.

...꿈에 나오긴 했지.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거지?

내가 쇠약해져 있던 지금이야말로 그가 복수를 이루기에는 최고의 기회였을 텐데.

"살아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네요. 눈 하나와 다리 하나를 잃고 생명력까지 크게 줄어들었으니...그래서야 전사로서 다시 싸우기는 어렵겠죠."

"그래...?"

확실히 그 정도 부상이라면 전사로는 은퇴를 해야 할 수준이긴 한데.

전사가 아니게 되었다면...전사신의 가호 역시 더는 발동하지 않을 테지.

그래도 기억해두긴 해야겠다.

이젠 내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그자가 꼭 무력으로 덤벼오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렇게나마 그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레이시에게 듣지 못했더라면 크누트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대비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그자는 누구였나요? 어째서 죽이려 했던 거죠?"

"크누트는...데인의 스파이였어. 날 암살하려 했었지."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국을 피해 숨어들었다고 하니까 아마 스파이가 맞겠지.

"아, 역시 첩자였나요. 종적을 감추었을 때 그렇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나쁜 소식이라 유감이네요."

"몰랐으니 어쩌겠어.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레이시야 자기 본분을 다했을 뿐이니까 말이지.

아카데미 교관의 부탁으로 아카데미 학생을 치료했다는데 그게 잘못은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인 레이시가 물 한 잔을 새로 따라주었다.

"첫 번째 질문은 일단락되었고...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두 번째 질문인가요. 말씀하시죠."

"전의 그 연설 말이야, 그거 진심인가?"

그, 하나의 종족 어쩌고 하던 내용 말이지.

듣고 있으면 마치 수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종족들을 적으로 삼으려는 것처럼 들리던데 말이야.

"제 성전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진심이지요."

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고한 신념이 가득 담긴 기세로.

"항구적 지속 가능한 인류의 생존권 확보는 언젠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교단의 핵심 과제랍니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한참 멀었지만요. 성국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현시점의 제국은...전 국력을 북부에 투사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음에 이을 말을 신중하게 고르려는 듯이.

하긴 날 상대로 자기 속마음을 전부 드러내려 하지는 않겠지. 몇 번이나 봤다고.

"제국 내외부의 문제가 해결되고, 방어가 아닌 공격에 나서기에 충분한 국력을 다시 갖추었을 때, 비로소 북부 원정을 시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려나."

"네. 그때가 오면, 수인 역시 오크들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운명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그것이 제 비원이랍니다."

음...

그래, 열심히 하렴.

혹한의 땅에 쳐들어가서 나라를 말아먹은 콧수염 아저씨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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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에게 서릿발을 맡긴 뒤, 정원 쪽으로 내려왔다.

"그래! 일격 일격에 전력을 쏟아붓되, 공격은 연속적으로! 검로가 항상 원을 그리게 해!"

"하고, 있어요!"

"발을 놀려두지 마! 검과 함께 몸을 틀며,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큭..!"

정원에선 여전히 프리데가 데미안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주 신이 나서 말이지.

연습 대련이기에 둘 다 나무로 만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사이즈는 크게 달랐지만.

벌써 여러 차례 얻어맞은 것인지, 데미안은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대고 있었다.

밀리아는 그 둘의 옆에서 연신 활쏘기를 연습 중이었고.

회피를 상정한 연습인지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활을 쏘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재미있어 보이네?"

"아, 하샬르!"

내 목소리를 들은 밀리아가 활쏘기를 멈추고 나를 반겨주었다.

"뭐야, 왔어? 잠시 좀 쉬자, 데미안."

"헉...헉...감사합니다, 프리데 선배님..."

프리데와 데미안 역시 대련을 멈추었다.

데미안이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완전히 탈진한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 내 쪽으로 다가온 프리데는 거의 멀쩡해 보였다.

살짝 격해진 숨소리와 이마에 맺힌 땀방울 정도를 제외하면.

"어때, 제법 가르칠 만하지 않냐?

"흠, 솔직히 재미있긴 해. 네 말대로 배우는 게 빠르네."

그래야지, 미래의 용사님이신데.

아직 제대로 된 적들이 나타나질 않아서 성장이 좀 둔하긴 하지만.

"힘껏 두드려 달라고. 그럴수록 점점 더 튼튼해질 테니까. 그런 녀석이거든. 아마...앞으로도 계속 강해지겠지."

"그래?"

프리데가 히죽 웃었다.

날 놀려먹을 거리를 또 하나 찾아내었다는 듯이.

"묘하게 확신하는 듯한 말투네. 굳이 이렇게 돌보는 것도 그렇고...연하가 취향이었나 봐? 어쩐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 하샬르...?"

밀리아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밀리아. 그런 떨리는 눈으로 보지 마라.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게 아니니까."

"흐음? 그러면 뭔데? 솔직히 너, 다른 사람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가며 키워주는 성격은 아니잖아."

틀린 말이 아니긴 하네.

원래라면 그러느니 내 실력을 끌어올리는 쪽을 택할 테니까.

프리데도 내 성향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 이상하긴 했겠지.

"그냥...요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데, 1학년 중에 쓸만한 녀석이 몇 없으니까 그렇지."

"확실히 요즘 여러모로 뒤숭숭하긴 하지만...흐으음......뭐, 일단은 그런 걸로 해 줄까."

씨익 웃는 꼴을 보아하니 이 소재로 계속 놀려먹으려나 본데...

안되겠네 이거.

"친구가 늘어나서 아주 좋으신가 봐? 말투가 예전과는 아주 다른걸. 축하드려요, 고독한 프리데 선배님?"

"무, 뭐? 아니, 그게 무슨...!"

프리데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러게, 남을 놀리려는 자는 본인도 놀림당할 준비를 했어야지.

"그러고 보니 친구가 65명 이하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라는 연구가 있던데..."

"하, 참. 어디서 그런 소리를. 나도 아는 사람 많거든? 다 북부에 있어서 그렇지."

그래. 그런 걸로 해 두자.

얼굴이 새빨개진 걸 보니, 이름이라도 말해보라고 놀렸다가는 톱을 들고 올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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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 하러 온 건데?"

조금 진정된 프리데가 내 쪽을 살짝 쏘아보았다.

눈빛에 독기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지라, 그런다고 딱히 적대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이거, 자기소개나 다름없는 말이네. 지금 내 신세가 딱 그런 모양새니까.

"그냥 잘하고 있나 구경하러 왔지. 요즘 좀 바빠서 영 만나보질 못했었으니."

"하긴 연애편지에 답장하느라 바쁘긴-"

"원숭이-"

"...그래. 바빴구나.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니 말이야."

프리데가 잽싸게 말을 돌렸다. 현명한 처사다.

그대로 말을 이어가 봐야 둘 모두에게 상처뿐인 대화가 될 테니까...!

한동안 두 사람과 잡담을 나누었다.

프리데가 밀리아의 실력을 칭찬했다.

격한 움직임을 펼치는 와중에도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던가.

"대단하네, 밀리아."

"하샬르랑 프리데 선배님이 많이 도와줬으니까."

밀리아가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쉬고 있던 데미안이 우리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끼어들 배짱이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었던 건지. 굳이 이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벌써 본선도 반쯤 지나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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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65명...! 저는 침팬지입니다!

우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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