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화
원래 형제자매는 서로를 죽이면서 크는 거야
오필리아가 나를 안내한 곳은 본관 바깥의 구석진 뒷골목이었다.
다 피운 마력초 서너 개가 구겨진 채 흙바닥 위를 나뒹굴고, 몇 개는 아예 벽의 틈새에 박혀있었다.
이런 장소는 역시 어디든 비슷한 모습이구나.
게임 속 세상의 훈련소에서조차 말이지.
익숙한 모습에 쓴웃음을 흘리며 쥐고 있던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오필리아 역시 긴 마력초를 꺼내 물더니,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화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송이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 이거 꽤 편리하네."
"편리하긴 하지."
가볍게 웃은 오필리아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뭔데? 저번의 그 이야기?"
자기 언니,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를 제거해달라고 했었지.
상세한 계획과 뒷수습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면서.
"기억하고 있었네? 맞아. 그 문제 때문에 불렀어. 아직 실행할 시기는 아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황이 좀 변했으니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정곡이었던 듯, 오필리아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당시의 나는 제도 귀족들과 별다른 연이 없고, 특별히 공을 세운 적도 없으니 어찌 보면 악명만 높은 애매하게 강한 전사였다.
그때도 이미 란덴부르크 변경백을 후원자로 두고 있기는 했지만...후원자는 어디까지나 후원자.
심지어 돈이 없어 곤란해하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그저 형식상의 후원이라 착각이라도 했었으려나.
카`하르의 왕녀라는 신분 역시 내 입지가 상당히 상승하면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뿐, 그 시점까지는 아직 '야만인 공주' 같은 느낌이었을 터.
예우는 받을지언정 제국 내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어찌 보면 화려한 포장지 같은 것이었지.
제국의 백작가, 그것도 권력이 꽤 강한 편인 시그밀러스 가문 입장에서는 딱히 신경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오필리아 본인 역시 슬슬 절박했을 테고.
그러니까 다짜고짜 나를 골랐던 거겠지.
그랬던 인물이, 지금은 황실조차 주목하는 달인급 전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거기에 황제가 직접 작위를 하사하면서 제국 귀족으로 인정받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일개 암살자로 써먹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거지.
내가 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된 시점에서, 내 노선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이 될 수도 있고.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는 에른스트파의 귀족 중 하나이니까.
그것도 이자벨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역시 말을 바꿀 셈이야?"
"글쎄, 아직 모르지. 적어도 이제 자세한 이유 정도는 들어볼 수 있겠는걸?"
느긋하게 연기를 내뱉으며 한마디 했다.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갈래의 숨결이 서로 뒤섞이며 흩어졌다.
"하아...그래도 약속을 지킬 생각 정도는 있다는 뜻이네. 좋아. 어차피 내 목표를 이미 밝혔던 이상, 이유를 숨겨봐야 무의미하니까. 전부 이야기하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그밀러스 백작가와, 자신의 언니에 대해서.
----
"우리 가문, 시그밀러스 백작가는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해왔던 가문이었어. 내 조부님도, 아버지도, 그리고...언니도 그랬지."
언니. 오필리아가 나직하게 혼잣말했다.
그 독백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증오라기에는 조금 복잡한 울림이었다.
"내 언니,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 높았고...다들 미래의 대마법사가 될 인재라고 칭송했지. 그녀도 아마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을 거야. 그런데, 내가 태어났지."
오필리아가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새삼스럽게 소개하듯이.
과장된 태도에는 약간의 자조가 담겨 있었다.
"초대 가주님 이래로 비교할 자가 없는 불가해한 재능. 고작 다섯 살에 이미 기초적인 마법을 발현한 천재 중의 천재. 대마법사가 될 인재가 아닌, 대마법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준의 아이가 태어난 거야. 당연히, 가문의 모든 기대가 나 하나에게 집중되었지. 그 모습을 보며...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야 죽이고 싶었겠지.
동생의 재능을 순수하게 기뻐할 여자였으면 오필리아가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 리가 있나.
"적어도 언니가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때부터였지. 나를 죽이려 시도했던 것도."
오필리아가 마력초를 짓씹었다.
겪어온 위기들을 떠올린 것인지, 혈육의 변모를 애통하게 여긴 것인지.
"서서히 몸을 악화시켜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독, 외유를 나갈 때마다 벌어지는 습격과 납치 시도, 내 성격에 대한 기묘한 뒷소문까지...그 모든 일의 배후에, 내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열두 살 쯤이었던가. 내 앞에서는 가증스럽게도 항상 좋은 언니를 연기했었으니까."
"잘도 살아남았네?"
열 살 초반의 아이가 대처할 수 있을법한 위협들이 아닌데도.
천재는 천재라는 건가.
"어릴 때야 운이 좋았고, 깨닫게 된 이후로는 내 능력을 감추고 살았으니까. 유능하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 수준으로 말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어릴 적의 천재가, 나이를 먹어가며 범재로 변해가는 일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아예 무능하게 굴었더라면 의심했겠지만...아슬아슬한 선을 꽤나 잘 지킨 모양이니.
"그러고 나니 가문의 관심도 점점 줄어들었고...그동안 언니는 무슨 짓을 한 건지 3황자파의 유력인사가 되어 있더라."
오필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야 내가 잘 알지.
이자벨라에게 붙어, 아예 그녀의 심복 노릇을 하며 온갖 음습한 일들을 처리해주었을 테니까.
"에른스트파의 유력인사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뒷감당을 못 할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이게 마지막 기회지. 3황자가 황위 계승자가 된다면 언니 역시 아예 건드릴 수조차 없게 될 테니까. 세력 차가 비슷해진 지금이라면, 언니를 쳐내는 것만으로 1황자 쪽이 유리해질 테고. 그렇게 1황자가 이긴다면 뒷수습도 문제없겠지? 의문을 제기할만한 자들은 다들 교수대나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될 테니까."
"그러고도 3황자가 이긴다면?"
물론 내가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언니가 죽고 나면, 나는 시그밀러스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지. 그때부터는 굳이 눈치 보느라 힘을 감출 필요도 없으니...다시 천재적인 마법사이기도 할 테고 말이야. 언니만 처리하고 나면, 일단은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할 생각이기도 하고. 아무리 황실이라 해도 그런 사람을 심증만으로 처리할 수는 없어."
시치미를 떼겠다는 말이네.
황자들 중 누가 이기든 그 반대파로 몰려 숙청당하지 않도록.
"그래도 기어코 누명을 씌우려 한다면...마탑에 투신하면 될 테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하긴. 그녀 정도의 재능이라면, 아예 마탑에 들어가 버릴 경우 마탑 쪽에서 보호해줄 테니까.
"애초에 제국은 항상 강자들에 목말라 있으니, 일단 고위 마법사의 수준까지만 오르고 나면 문제 될 건 없어. 영애 하나가 가문 내의 권력다툼으로 암살당한 일을 굳이 들춰내, 그런 실력자를 무의미하게 잃는 선택은 하지 않을 테니까."
누명은 아니잖냐. 네가 범인 맞으니까.
그것만 빼면 나머지는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지만.
아예 못 써먹을 악인이라면 모를까, 가문 내 문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정도야 귀족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니.
그 이후로 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굳이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건가.
그래, 그럭저럭 괜찮은 판단이긴 해.
이자벨라의 성격이 오필리아가 생각한 것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흠..."
슬쩍 말을 흐렸다. 아직 동의하기엔 이르니까.
오필리아야 그저 언니에게 복수하겠다는 심산이지만, 내게 있어서 그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정치적 암살이 되는 셈이니.
어느새 담배는 거의 다 타들어 가 있었다.
"일단,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행 일자가 아직 확정된 건 아니겠지? 승낙할지 말지는 우선 그 계획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날 이용해 먹고 팽하려 들지도 모르잖아? 클레어 암살을 내게 맡기고, 나중에 그 사실을 슬쩍 3황자 쪽에 알려 자기 보신을 꾀한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꽤 직설적이네...그래, 충분히 할 법한 의심이긴 하지. 적어도 거절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행인가. 좋아. 계획이 정해지면 다시 찾아오겠어."
오필리아는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이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짐작했었던 모양이지.
"그래라. 그래도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부분은 안심하고."
"딱히 안심이 가는 말은 아니란 거, 그쪽도 알지?"
"달리 어쩌겠어? 대안이 있지도 않을 테고...믿으셔야지."
어찌 됐건 나는 아쉬울 것 없으니까. 일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그러니 내가 안심하고 만족할만한 계획을 가져오라고, 오필리아.
문제없다는 확신만 선다면 해줄 테니까 말이야.
"하아아아...일을 맡길 사람을 잘못 골랐어......역시 좀 더 신중했어야 했나."
"맡겨보면 나보다 확실한 사람도 드물걸."
"하아아아아아..."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한 오필리아가 골목을 떠났다.
나 역시 담배를 짓밟아 꺼트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선작 2천 기념 깜짝 연참입니다...!
내용은 오필리아와의 대화뿐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