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화
두 번째 편지
"조금 늦으셨군요 하샬르 님."
숙소로 돌아왔더니, 단련 중이던 나이젤이 나를 맞이했다.
얘도 참 꾸준하네.
달인에 오른 시점에서, 육체 자체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라 단련의 효율이 높지는 않을 텐데.
"다른 학생이랑 잡담 좀 하느라. 식사는 했어?"
"아직입니다. 바로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또 날 기다린 건가. 식사 시간이 삼십 분가량이나 흘렀는데도.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프리데랑 아샤는 벌써 먹고 있으려나."
"아마 그렇겠지요."
식당으로 내려가며, 나이젤에게 오늘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악몽 마법을 새긴 마도구로 훈련을 실시한다는 말에 그녀 역시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재미있는 방식이군요. 상용화가 가능해진다면, 란덴부르크에도 도입해볼 만 하겠습니다."
"글쎄, 전투 외 손실이 좀 늘어날 것 같은데."
통증은 줄였다지만 정신력이 낮다면 ptsd는 꽤 남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전투로 인한 신병 손실이 격감하리라 생각됩니다."
그건 그런가...? 하긴, 신병 절반은 첫 전투에 죽는다는 말도 있으니까.
내친김에 데미안의 일도 말해주며 하소연했다.
사령종을 잡아낸 것은 훌륭했는데, 마지막 악몽으로 튀어나온 것이 하필 내 모습이었다고.
"흠...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해가 갑니다."
나이젤,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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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내부는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남아있는 학생은 프리데와 레이시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자신들의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레이시의 호위로 보이는 성기사 역시 그저 묵묵히 디저트를 입가로 가져갔고.
꽤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인걸. 서로가 좀 불편한 모양이야.
테이블마저 아예 다른 테이블을 쓰고 있을 정도이니.
둘 다 수인을 싫어하니 나름 사이가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아샤는 벌써 돌아간 건가?
아니면 또 식사마저 거른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거려나.
일단 프리데 쪽으로 가는 게 낫겠지.
레이시는 조금 부담스럽고, 고독한 프리데 양을 내가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아, 왔어? 좀 늦었네."
"강의 끝나고 잠깐 잡담 좀 하느라. 너는 왜 또 혼자 먹고 있냐."
의자를 뽑아 걸터앉고 등을 푹 기댔다. 오늘 점심은 양고기인가.
양도 뭐, 나쁘지 않지. 미묘하게 아삭거리는 식감이 독특해서 좋아하니까.
"그야 딱히 같이 먹을만한 녀석이 없었으니까? 아샤는 꽤 바빠 보이고, 칼릭스는 여전히 풀만 뜯고 있을 테니. 남은 건 그 요정이나 에비앙인데...그것들과 함께 식사하느니 차라리 굶고 말지."
"확실히 그렇긴 하네. 생각해보면 참, 언제봐도 공간 낭비란 말이지. 이 식당, 의자는 서른 개가 넘는 데 정작 쓰는 사람은 매번 열 명을 넘기지를 못하니."
"오히려 다행이지. 불편한 사이끼리 딱 붙어서 식사하는 건, 솔직히 불쾌하잖아?"
다시 말해 자기는 레이시가 좀 불편하다 이 뜻이네. 어째서?
조금 기다렸다가 물어봐야겠네. 레이시에게도 들릴 공간에서 꺼낼 말은 아니니까.
마침 식사를 마친 것인지 레이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향했다.
성기사는 남은 케이크 조각을 조금 아쉽게 쳐다보다가 곧바로 레이시를 뒤따라갔다.
전에 레이시의 방에 찾아갔었을 때는 없었던 인물인데.
그사이에 새로 들어온 건가.
레이시가 나갔으니, 이제 물어보아도 되겠지.
"엘피넬의 성녀 후보가 불편한가 봐? 서로 친할 줄 알았는데. 둘 다 수인을 꽤 싫어하니까."
"흐음...뭐라고 해야 하려나. 저 여자의 사상은 지나치게 과격해. 페일룬에 비해서도 말이야. 아마, 기회만 있다면 북부 설원에 병력을 들이붓는 짓거리도 망설이지 않을걸? 어마어마한 희생을 낳을 텐데도."
확실히 언젠가 북부 설원을 침공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었다.
지금은 여건이 안 되니 무리라고 했을 뿐이고.
"거기에...그녀가 박멸하고 싶어 하는 대상은 수인뿐만이 아니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른바 '악한 이종족'인 수인만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모든 이종족들을 혐오하는 모습이 빤히 보이니까. 요정, 반인, 용인까지."
하긴 수인 하나만을 혐오했다면 이름이 레이시스트도 아니었겠지.
"그 모든 종족과 싸웠다가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죽어 나갈지. 제국은 몰라도, 성국이 그걸 용인할 리 없어. 성녀로 선출 받기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도 여전히 후보로만 남아있는 이유 역시, 아마 그 과격한 사상 때문이겠지."
프리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극단적인 사상만 버리면 당장에라도 성녀가 될 수 있을 사람인데. 자신의 신앙이 부족한 탓이라며 오히려 더욱 극단적으로만 치닫고 있으니...참 우스운 일이지."
"그렇구만, 대충 이해가 가네."
어느새 내 몫의 식사가 도착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양고기를 썰어내 입으로 가져갔다.
툭툭 끊어지는 아삭한 식감 너머로, 농후한 육즙이 흘러넘친다.
신선한 새끼를 도축한 것인지 누린내는 전혀 나지 않았다.
맛있네.
코끝을 자극하는 향신료의 향을 즐기며 프리데와 잡담을 나누었다.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지만.
그야 놀려먹으려 들게 뻔하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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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더니 새로운 편지 몇 장이 와 있었다. 그것도 황실에서.
이 시점에 새 편지인가...반가운 소식은 아닐 것 같은데.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첫 번째 편지는 레오노르의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냐는 안부인사와 함께, 회복된 후 친선 대련은 어디서 시행할지 내 의사를 물어오고 있었다.
별궁으로 오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자신의 별장은 어떠냐면서. 나쁘지 않은 배려였다.
그러면...사흘 후쯤으로 할까.
그때쯤이면 회복도 대충 끝나겠고, 슬슬 내 전력도 점검해볼 때가 되었으니까.
3일 뒤, 별장에서 만나자는 답장을 작성했다. 조금 후에 보내면 되겠지.
두 번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여태까지 받아본 황실의 편지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사치스러운 편지였다.
봉투 아래쪽에 보낸 이의 이름이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잉크마저 보석 가루를 섞었는지 조금 반짝거렸다.
이자벨라 베네스 비텔스바흐.
...드디어 올 것이 왔네.
봉투를 내려놓고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편지에 독을 바르거나 마법을 심어놓지는 않았겠지.
대놓고 자기 이름을 적어놓았으니까. 아마도.
편지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화려한 편지였으나 그 내용은 미사여구 없이 담백했다.
에른스트처럼 정말 담백한 성격은 아니고, 아마 굳이 미사여구를 적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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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샨기오르 왕녀, 메디안 남작.
제도 복구를 기념하는 연회에 앞서, 그대와 한 차례 환담을 나누고 싶군요.
본 황후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아 준다면 기쁘겠네요.
- 이자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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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정말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 착각할 정도로, 상당한 예의를 갖춘 문장이었다.
속내는 전혀 아니지만 말이야.
초대를 거절한다면 자신의 적이 될 거라는 뜻이니까.
다시 말해서, 이건 초대장의 탈을 쓴 최후통첩이었다.
거절한 순간부터 나를 적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들겠지.
시작부터 노골적인 방법을 택하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응할 생각은 없었다. 미쳤나 거길 찾아가게.
그 마굴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곧바로 약물 최면 세뇌 조교행이다.
들어갈 때는 멀쩡하겠지만, 나올 때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겠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벽에 걸어놓은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때가 온 것이다.
에른스트의 말대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엿새 후의 연회는 그것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것이다.
...호의는 고맙지만 거절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바랴크루스]======
얼어붙은 성채의 옥좌.
수인들의 왕, 류리크는 눈앞의 자그마한 인간을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을 증오하는 수인들의 땅, 그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왕궁에 사람의 모습이라니.
눈에 띄는 순간 산산조각으로 찢겨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건만.
두꺼운 로브 차림에 후드까지 눌러쓴 탓에 그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키나 체격으로 보아 아마도 건장한 사내라는 정도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남자는 거대한 설원 늑대의 노여움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서 있었다.
"그래, 마법사. 자신만만하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더군. 그렇지 않나?"
류리크가 으르렁대었다. 치미는 짜증과 분노를 담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른 전사들이야 대수롭지 않은 손실이지만, 대전사 셋은 꽤 아쉬운 병력이었으니.
사석으로 던졌다면 그에 걸맞은 성과가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한가.
이만에 달하는 인간들을 죽인 일은 만족스러웠지만, 정작 적의 주요 전력은 거의 줄이지 못한 데다가, 본래 목표는 아예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으니.
들인 공치고는 참으로 애매한 성과였다.
"글쎄요. 저 역시 두 명의 대전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죠. 제도까지 잠입시켜준 데다가, 기척을 감추는 마도구까지 만들어드렸건만."
남자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일이 꼬인 건 전부 그 수인들이 약해서 벌어진 결과라는 듯이.
"그르르르르...."
늑대가 목울대를 진동시켰다. 말을 신중히 하라는 듯이.
당장이라도 옥좌에서 일어나 남자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이런, 말이 과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애초에 어찌 보면 실패조차 아닌데 말이죠."
"무슨 뜻이지? 제국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계획은 단 한 명조차 죽이지 못하고 끝났을 텐데. 그 카`하르 계집 때문에."
남자가 왼팔을 슬쩍 벌렸다.
"어차피 목적은 제국을 교란하고 약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부분은 오히려 계획 이상의 성과가 나왔으니까요. 예상했던 일은 아니지만...이번 일로 시시하게 끝났을 계승권 분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게 생겼으니 말이죠."
"계승권 분쟁?"
"예. 제국의 두 황자들. 원래라면 3황자 쪽이 압도적이었지만...이제는 서로 비슷한 세력이 되었죠. 그러니, 큰 내분이 일어날 겁니다. 시시하게 외교관계를 조금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이쪽이 오히려 더욱 큰 손실을 입히겠죠!"
내전이라도 일어난다면 최고의 결과다.
제국이, 제국 자신의 손에 의해 몰락하는 것이니.
"계승권은 결투로 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수인 분들의 방식이지요. 인간들은 보통 혈통과 지위, 따르는 무리의 숫자로 결정한답니다."
"흐음..."
류리크의 기세가 가라앉았다.
확실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납득했다는 듯이.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죠. 곧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들은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눈보라와 같은 세상을 견디면서. 얼어붙기 전에 성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마법사."
남자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화는 제 시간에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