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화
지도대련이란, 말하자면 접대용 게임 같은거지
제국 검술.
정식명칭은 제국 기사단 제식 검술.
양손 장검의 모든 부위를 활용해 적의 검을 흘려내고 얽어, 급소를 노리는 방어와 반격 위주의 검술이다.
모르고 싸운다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정교한 기술들.
단순한 격검에 한정한다면, 이것 이상으로 효율적인 검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제국 검술은 근본적으로 대인전을 상정한 검술이기에, 상대와 신체 능력의 격차가 커질수록 효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공격방식이 아예 사람과 전혀 다른 적들을 상대할 때는 거의 무력했고.
거기에, 자신에게 잘 맞는 무기가 장검이 아니라면 제대로 써먹을 수도 없지.
그렇기에 일정 수준을 넘어선 기사들은 제국 검술은 기본으로 삼은 채, 각자 자신만의 전법을 창안한다.
다른 무기들을 혼용해 변칙적인 수단을 마련하거나, 검술의 근본원리만 유지한 채 자신에 맞게 개량하는 식으로.
나 역시 그랬다.
충분한 힘과 속도가 있으니 굳이 두 손을 다 쓸 필요가 없어 한손 검술로 바꾸었고, 거기에 보다 공격적인 형태로 변질시켰지.
레오노르의 경우엔...정밀성을 극한까지 높이는 쪽을 택했다고 할까.
자신보다 강한 자의 일격조차 어떻게든 흘려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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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스슷!
책의 페이지를 거칠게 문지르는듯한 마찰음.
검과 검이 충돌했다기엔 기묘한 소리였다. 아무리 목검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휘두른 검격이 미끄러지듯 흘러나간다.
진검으로 수면을 베어 갈라도 이것보다는 반동이 강하리라.
"하앗!"
레오노르가 짧은 기합을 내뱉으며 검을 찔러왔다.
짓쳐드는 목검을 날밑으로 막아낸다.
그 순간, 레오노르의 검끝이 뱀처럼 꿈틀대며 날밑을 넘어 다시 파고들어 왔다.
확실히 기량 하나는 대단하네.
그 부분은 나보다 우위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녀가 씨익 미소 짓는다.
승리를 확신하거나 하는 건방진 웃음은 아니었지만.
그도 그럴게, 무의미한 공격이니까.
그대로 날밑을 세차게 휘저었다.
압도적인 힘과 속도에, 레오노르의 몸이 홱 딸려나갔다.
바닥을 짚어 균형을 잡은 레오노르가 목검을 고쳐잡았다.
"역시, 말도 안 되는 근력이네. 업의 힘은 거의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기술만으로는 뒤집을 수 없는 신체 능력의 간극이 있었으니.
애초에 내 육신은 업을 깨닫기 이전에도 달인쯤은 넘어 있었고.
내가 아예 검술에 무지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나 역시 이미 제국 검술의 근본원리를 전부 체득한 상태.
타이밍을 파악해 파훼하는 것쯤은 간단했다.
"그야 전력을 냈다가는 졸지에 황족 시해자가 되어버릴걸."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더 힘낼 수밖에!"
레오노르가 재차 달려든다. 입가에 한가득 웃음을 띄운 채.
검을 휘두르는 이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진 그녀 역시 탐색전이었는지, 아까보다 배는 빨라진 속도였다.
이 정도면 프리데랑 비슷하려나. 그래봐야 내 적수는 아니긴 한데.
애초에 내가 기술적으로 지도해줄 부분은 거의 없으니까, 강한 힘을 상대하는 경험이라도 시켜주면 되겠지?
기세를 조금 높인다.
휘두르는 목검이 위협적인 소리를 울리며 은은한 잔상을 남긴다.
충돌음이 점점 탁해지기 시작했다.
"하아아앗!"
"꽤 빠르긴 한데, 역시 힘이 부족해."
검을 횡으로 휘두른다.
그녀의 허리를 노린 내 목검이 갈색 잔상을 남기며 파고들었다.
몸통을 반쯤 갈라버릴 기세로.
"큭...!"
황급히 막아낸 레오노르가 몸과 검신을 있는 대로 비틀어 흘려낸다.
격한 마찰음과 함께, 허리를 노렸던 검끝이 꺾여 허공을 향해 치솟는다.
그녀의 몸이 뒤쪽으로 쭉 미끄러졌다.
검신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찰열에 타버린 것처럼 닿은 부위가 검게 변해 있었다.
흘려내는 기량 하나는 예술이네.
여력을 못 버티고 밀려나긴 했지만.
그대로 레오노르에게 달려든다.
즐기려면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하,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레오노르 역시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검과 검이 춤춘다.
충돌해 튕겨 나는 일 없이, 그저 끝없이 마찰하면서.
과열된 검신에 옅은 불길이 피어오른다.
"하앗!"
내 허리를 노려오는 그녀의 다리를 그대로 붙들어 내던진다.
나가떨어진 레오노르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착지했다.
"역시 대단하-"
"그러다 죽어."
다시 일어서려던 레오노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추격하며 내질렀던 내 검끝이 그녀의 머리가 있던 허공을 팍 하고 꿰뚫었다.
뒤따라온 풍압에 레오노르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숙이지 않았다면 얼굴에 구멍이 났겠지.
그 직전에 멈출 생각이긴 했지만.
그대로 가볍게 걷어찼다.
"핫!"
옆으로 밀듯이 흘려낸 레오노르가 다시 검을 휘둘러왔다.
반응속도 역시 나쁘지 않네.
레오노르의 목검을 왼팔로 쳐냈다.
턱을 노리고 솟아오른 발끝을 고개를 틀어 피하고, 어깨로 그녀를 들이받았다.
"케흑...!"
케흑이라니, 체통 없는 비명소리네.
튕겨 나간 레오노르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검을 놓치지 않은 점은 칭찬해야 하려나.
확실히, 스스로가 달인의 벽을 넘었다는 사실이 체감되었다.
휘두르는 공격에 딱히 업의 힘을 담지 않고 있는데도, 전반적인 공격력 자체가 다소 상승해 있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이보다는 더 집중해 싸워야 했을 텐데.
"아으...꽤 아픈걸."
레오노르가 조금 비틀대며 일어났다.
통증 때문인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으나, 입가의 웃음은 여전했다.
심지어 뺨도 상기되어 있었고.
거칠어진 호흡에 장밋빛으로 달아오른 뺨, 흘러내리는 땀방울 때문인지 여러모로...참 굉장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숨을 내쉴 때마다 어깨가 흔들리며 쇄골 아래에 달린 것도 같이 흔들린다.
그래. 저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겠네.
상대가 사내놈이라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예리함을 잃을 것이 확실해 보이니까.
이자벨라 역시 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플레이어가 있을 정도였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황궁에 초대된 히로인 캐릭들이, 나중에 무슨 꼴이 되는지 보고 나서도.
단순한 하렘 육성물인 줄 알고 플레이하던 초보자들이 악의 가득한 뒤통수에 경악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도 유능한 인재를 치하한다는 명분으로 초대하는 것인 만큼, 하필 자기가 제일 열심히 육성한 히로인들이 불려가는 거니까.
나도 당했지.
아차, 생각이 다른 데로 새버렸네. 일단 싸움에 집중해야지.
고개를 살짝 흔들고 다시 레오노르를 바라보았다.
"어때, 여기까지 할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재밌는데!"
레오노르가 호쾌하게 웃었다.
반쯤 타버린 목검을 거머쥔 채, 그녀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성격이란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해 줬을 리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저 정도 근성이라면 조금 더 두들겨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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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을 바꿨다.
딱 봐도 레오노르에게 잘 통할 방식으로.
일단 지도 대련이라고 한 이상, 뭐라도 얻어가는 것이 있어야 할 테니.
콩 볶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쉴 새 없이, 아주 빠른 리듬으로.
레오노르의 검놀림이 다급해졌다.
목검이 어지러이 춤췄다.
"크으으으읏!"
"버거워 보이네? 확실히 흘리기는 대단하지만, 그건 이렇게 대응하면 그만이거든."
격렬한 타격음이 쏟아져 내린다.
강한 힘을 실어 크게 휘두르는 공격이 아니라, 짧게 끊어치는 속도 위주의 연격.
마치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내 검격을 받아 흘려내려 하면 미련 없이 검을 회수하고, 곧바로 다시 내지른다.
애초부터 큰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공격들. 검의 수발에는 한 호흡도 걸리지 않는다.
검격 하나하나에 담긴 힘은 약하지만...사람인 이상 어차피 베이면 상처 입는 것은 마찬가지.
갑옷이라도 입고 있다면 모를까.
폭우처럼 쏟아지는 연격이 점점 레오노르의 방어를 무너트린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미처 흘려내지 못한 충격들이 목검에 누적되어, 나뭇조각들이 튀어 오른다.
반격할 틈은 주지 않는다.
이윽고, 방어를 돌파한 목검이 그녀에게 닿는다.
경쾌했던 타격음에 고기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좀 불경한 표현이려나?
레오노르의 몸이 연신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힘을 빼고 휘둘렀기에 육신이 터져나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허리, 어깨, 왼팔, 허벅지.
목검에 얻어맞은 부위마다 짙은 멍 자국이 새겨진다.
팔은 아마 아예 부러진 것 같은데. 뭔가를 끊어내는 감각이 손끝에 전해졌으니까.
"아으으읏!"
레오노르가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입꼬리는 여전히 끌어올린 채.
...사실 맞는 걸 좋아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일단 한번 떨어트릴까.
기습적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내 손끝과 레오노르의 검자루가 맞닿은 순간, 목검이 무력하게 부스러진다.
그대로 내지른 장타가 레오노르의 하복부를 후려쳤다.
"컥...!"
비명 섞인 침을 토해내며, 쭉 날아간 레오노르가 연무장의 벽에 충돌했다.
그대로 바닥에 팽개쳐진 레오노르가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내장이 상하지는 않았겠지.
부술 생각은 없이, 밀어내듯이 내민 공격이었으니까.
애초에 손끝을 세워 찔렀으면 내장을 관통해버렸겠지.
"하아...하아...!"
레오노르가 팔뚝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일어섰다.
휘청이는 몰골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슬슬 여기까지네. 그쪽도 한계인 것 같고, 더 싸웠다가는 본격적으로 피를 봐야 할 테니."
왼팔은 아예 부러졌고, 몸 여기저기에도 근육이 파열된 흔적과 깊은 타박상들이 남았으니까.
결투라면 모를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친선 대련. 저 정도 부상이라면 그만둘 때가 맞겠지.
"크으읏...! 확실히 이 이상은 과하긴 한데, 역시 좀 아쉬운걸. 전력을 다한 달인의 힘이 보고 싶었는데, 내 힘으론 아직 무리였나."
"전력을 다한 힘? 흠...뭐, 마지막이기도 하니까 한 번쯤은 괜찮겠지. 덤벼 봐."
나도 한번 맨정신으로 써보고 싶긴 했으니까.
"오, 뭔가 보여주려고? 역시, 성격이 시원시원하니 좋단 말이지!"
레오노르가 환희했다.
부서진 목검을 내버리고 새 목검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내게 돌진한다.
전력을 다한 찌르기.
어차피 마지막 일격인 만큼, 방어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 내면을 들여다본다.
심상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푸른색 광채를.
깨어난 업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느려진다.
뇌 신경이 달아오르고,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감각이 인지를 초월한다.
초월적인 힘이 육신에 깃든다.
모든 것들이 거북이처럼 기어 다닌다.
세상 전체가 물거품과 같이 연약해 보인다.
발을 구르기만 해도 산산조각으로 무너질 것처럼.
검을 수평으로 눕혀 천천히 어깨 위로 가져간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묘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휘두른다.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레오노르의 목검을 향해.
느릿하게 휘둘러진 내 검끝이 그녀의 목검을 환상처럼 통과한다.
되돌려 다시 휘두른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해서. 끊임없이.
다섯 번쯤 베어냈을까, 갑자기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 꽈아아아앙!
굉음이 고막을 울린다.
솟구치는 불길과 함께 공기가 폭탄처럼 터져나갔다.
충격에 날아간 레오노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살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방금 전 보았던 광경만을 되새겼다.
뭐였지?
세상의 흐름에서 나 혼자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참으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려다본 손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살이 난 부스러기들을 제외한다면.
이게 내 전력이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힘이네.
탈력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력차가 워낙 크다보니 긴장감 없는 하샬르...!
원래도 달인급의 스펙에 이젠 업 버프까지 더해졌으니
달인이 아닌 적은 싸움조차 되지 않겠죠?
상대가 황녀다보니 아예 으깨버릴 수는 없어서 힘을 꽤 빼고 싸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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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주인공도 뉴비 플레이어 시절에 '이자벨라' 당했던 겁니다!
플레이어의 애캐를 콕 찝어서 망가트리는 뒤통수라니, 참으로 악랄한 게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