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94화 (94/100)

제 94화

이자벨라 황후

후작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감각을 치켜세우며 연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베일로 시야를 가리고 있는 만큼 좀 집중해야 뚜렷하게 보이니까.

"어디 보자...아, 저기 있네. 2층 구석, 발코니 옆에."

루드비히 후작은 소파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묘하게 삭은 얼굴을 보아하니, 후작령에서 만났던 기사 같은데.

이름이 아마 셰인이었던가.

프리데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다.

내가 걸어갈 때마다, 주위 귀족들이 슬쩍 비켜서는 배려를 보여주더라.

덕분에 번잡한 홀을 거침없이 가로지를 수 있었다.

"너랑 같이 다니니까 효과가 굉장한걸? 원래였다면 '페일룬 영애께 인사드립니다-'라면서 귀찮게 들러붙는 놈들이, 벌써 다섯 명은 족히 나왔을 시간인데. 그야말로 벌레 쫓는 마도구나 다름없네."

프리데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기꺼운 미소를 흘렸다.

"하, 다들 너랑 친해지고 싶었나 보지. 친구라도 되어주지 그랬어. 넌 친구가 적잖아?"

없다고 하지 않고 적다고 말해준 건 내 작은 배려심이다.

고마워해도 된단다.

"친구는 무슨, 하나같이 욕심만 그득그득한 놈들인데. 페일룬의 힘을 욕심내든, 나를 욕심내든 말이야."

넌더리가 난다는 듯 싸늘한 태도였다.

"그야 뭐 그렇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체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으니 아주 골치가 아팠거든."

체면이라니, 이렇게 꾸미고 온 것도 그렇고, 의외로 남의 시선을 신경 쓰기는 하는구나.

가문의 명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

"음? 하샬르 왕녀와...페일룬 영애, 나이젤 경이로군. 오랜만일세. 대공께서는 강녕하신가?"

"네. 아버지께서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정정하시답니다. 후작님께서도 평안하셨는지요."

프리데가 드레스 자락을 집어 들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공포스러울 정도의 이질감에, 나는 악몽을 꾼 아이처럼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까 내 얼굴을 본 귀족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나야 동부만 조용하면 항상 평안하다네. 일단 앉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프리데가 유려한 동작으로 소파에 몸을 맡겼다.

나는 그냥 대충 걸터앉았고.

"어, 음. 오랜만입니다?"

평소에는 반말을 내뱉었는데, 존댓말을 하자니 영 어색한걸.

그렇다고 프리데가 존대하고 있는데 나만 평소처럼 굴기도 좀 애매하단 말이지.

내 어중간한 말투가 꽤 우스웠던 모양인지 루드비히 후작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완쾌한 것 축하하네. 나이젤 경도 건강해 보이는군."

"심려를 끼쳐드려 면목 없습니다."

셰인과 함께 소파 옆에 서 있던 나이젤이 깊게 목례했다.

자기는 호위 기사의 신분이니 합석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다던가.

"헌데, 그 베일은 뭔가? 파남의 레이디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고는 들었네만, 카하르에도 그런 문화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건 아니고...나이젤이 준비해 준 물건입니다. 그, 저를 본 귀족들이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바람에..."

솔직히 말하면 혼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절하려 들더라.

루드비히 후작이 입을 꽉 다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고 있는지,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크, 크흠. 그래. 그럴 수 있네. 음. 그들은 대체로 유약한 편이니 말일세. 큭...!"

그래. 웃어라 웃어.

----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건가?"

"후작님께선 제 아버지의 친우이시자 제 벗의 후원자이기도 하시니, 연회에 앞서 먼저 인사드리고자 했답니다."

프리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벗이라니, 이젠 완전히 친구 취급이구나. 처음에는 짐승 보듯 하더니.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벗이라. 에스코트를 부탁할 정도로 친교가 깊어 보이니 나도 기쁘네. 아카데미에 잘 적응할 수 있을 지 내심 걱정했네만, 페일룬 영애 덕분에 나도 한시름 놓겠군."

"후훗, 과찬이시네요."

과찬이 맞긴 하지. 한시름 놓은 건 오히려 페일룬 대공이 아닐까?

망나니 딸에게 드디어 친구가 생겼다면서 말이야.

프리데의 가식에 몸서리치면서, 한동안 후작과 환담을 나누었다.

레오노르와의 대련에서 보인 실력을 듣고는 잘된 일이라며 눈을 빛내었고, 이자벨라의 초대를 거절한 일에 대해서는 신중하지만 위험한 짓이었다며 앞으로 주의하라는 충고를 건네주더라.

이자벨라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까 했는데...프리데가 있는 자리에서 말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던 사이에, 여유시간이 끝을 맞이해버렸다.

"슬슬 내려가 봐야겠군.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실 시간이 다가왔으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세나. 즐거웠네."

"음...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는데...어쩔 수 없나,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도회가 끝난 뒤에 나를 찾아오도록 하게. 그리고, 페일룬 영애도 즐거운 연회가 되기를 바라겠네."

"공사가 다망하실텐데 저희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신 점, 페일룬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리데가 고개를 숙이며 배웅 인사를 건넸다.

웃으며 화답한 루드비히 후작이 곧바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우리도 내려가 봐야겠지.

황족들이 들어오는데 이층에서 내려다볼 수는 없으니.

"이야, 연기 잘하더라? 아주 소름이 다 돋던데."

"연기가 아니라 예의라는 거야. 야만인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개념이려나?"

"글쎄, 일 년간 친구 하나 없이 지내는 고행보다야 쉽겠지?"

악의 없는 농담을 나누며 프리데의 손을 마주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몇몇 귀족들이 여전히 우리 쪽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그들 역시 고개를 돌려 정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칼 로스의 정당한 통치자, 페르디난트 라인펠 비텔스바흐 황제 폐하와 이자벨라 황후 마마, 레오폴트 황자 전하와 에른스트 황자 전하, 레오노르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이 떠나가라 외치는 시종의 고함 소리와 함께, 마침내 황가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으니까.

귀족들이 다들 몸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나 역시 그들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적당히 흉내 냈고.

앞장서서 걸어들어오는 황제는 저번보다도 훨씬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푹 파인 뺨에 퀭한 눈.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까지.

머리카락은 이제 비어버린 곳이 더 많았고 걸음걸이조차 힘없이 비틀거린다.

그 모습을 목도한 귀족들의 눈빛에 당황과 불안, 욕망 따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거의 오늘내일하는 병자의 몰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두툼한 망토가 바닥에 질질 끌린다. 담비 털을 덧대고 금실로 사자 문양을 수놓은 고급스러운 적색 망토.

황제의 기품과 위엄을 드러내야 할 옷차림이, 말라버린 체격 탓에 오히려 병상에서 죽어가는 노인을 감싸는 이불처럼 초라해 보였다.

저 꼴이면 굳이 연회에 나오지 않고 쉬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이자벨라도 골치 아프겠네.

이전처럼 세력 구도가 압도적일 때라면 모를까, 이 시점에 황제가 덜컥 죽어버리는 일은 그녀 역시 피하고 싶을 테니까 말이야.

에른스트가 다시 우위를 차지할 때까지, 선제후들의 계승 투표를 미루고 싶겠지.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의 한 발짝 뒤쪽에서 그를 따라 걸어오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하겠지.

...확실히, 미인이긴 하네.

별빛을 녹여낸 듯 반짝이며 굽이치는 풍성한 금발 머리카락. 기이한 매력을 뿜어내는 보랏빛 눈동자.

깃털같이 긴 속눈썹이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내비친다.

살짝 내려앉은 눈꼬리 아래엔 자그마한 눈물점이 찍혀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는 섬세한 선을 그리며 내려왔고, 도톰한 입술은 촉촉한 붉은빛을 머금고 빛난다.

장성한 자식을 둔 어미임에도, 서른도 채 넘어 보이지 않는 마력적인 미모.

상체에 착 달라붙는 자줏빛 드레스는 농염하게 부푼 가슴선을 그대로 드러냈고, 끄트머리가 살짝 솟아 있는 모습은 차라리 입지 않은 것보다 더욱 유혹적이었다.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장식된 목걸이가 가슴골을 덮고 반짝거린다.

드레스의 아랫단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짙은 색의 속치마 위에 반투명한 검은 천이 안개처럼 너울거리는 모양새였다.

어깨에는 설원 여우의 털로 장식한 망토를 카디건처럼 두르고, 장갑을 낀 손의 겉부분에는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감아올리는 금빛 장식을 끼고 있었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 사이에서, 숨 막히는 색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주변 사내들의 안색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로는 여성들마저 그러했다.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주위를 내려다보며 황제를 따라 연회장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등이 굽은 황제와 허리를 꼿꼿이 세운 황후.

이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드러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역겨운 냄새가 난다.

알코올의 향. 독한 향수의 냄새. 뒤섞인 미약의 냄새. 사내의 체취. 정사 후의 비릿하고 진득한 체액 냄새.

그리고, 마기 특유의 매캐한 썩은 내.

타고난 색향과 짙은 향수로 가리려 할지언정, 내 후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익숙한 모습이었으며, 생각한 대로의 모습이었다.

한두 번 보아온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한두 번 죽인 여자도 아니었고.

그래.

제국 최후의 황후, 이자벨라 베네스 비텔스바흐.

제국의 파멸을 불러오는 원흉.

마녀 이자벨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요즘은 업로드가 한 타이밍씩 늦어지는 것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

========

[TMI]

세계관이 무협 배경이었다면, 카`하르의 하샬르는 천살성이라 불렸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