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95화 (95/100)

제 95화

연회

잠시 고민한다.

트롤리 딜레마라고 하던가.

한 명의 사람을 죽여 다섯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일인가?

다들 자신만의 결론을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정답이라 단언할 수는 없으리라.

딜레마란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자문한다.

한 명의 악인을 죽여 수만 명의 무고한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지?

- 당연히 옳은 일이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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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를 애써 내리누르며 이자벨라 황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적의에 민감한 편인데다...내 살기는 흉악함이 짙어도 너무 짙으니까.

아직은 이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내가 단순한 정적 수준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깊은 살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경계심만 더욱 짙어질 테니까.

이자벨라를 뒤따라 세 명의 황족들이 나란히 걸어들어왔다.

가벼운 미로를 짓고 있는 레오폴트.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에른스트.

날 알아보고 이쪽으로 눈웃음을 던지는 레오노르까지.

두 황자는 황실의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레오노르는 공식적인 연회임에도 기사단의 제복 차림이었다.

황녀라면 보통은 드레스를 입고 나와야 할 텐데...그녀에 대해서는 다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지.

하긴 황제도 포기한 고집쟁이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어.

귀족들의 예를 받으며 연회장의 상석으로 나아간 황제가 몸을 돌려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고개를 드시오."

다 죽어가는 목소리네.

페르디난트 황제가 벌써 이 지경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역시. 제도가 불타버린 일이 꽤나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은 건가?

이것이 호재일지...아니면 악재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귀족들이 서서히 몸을 바로 세웠다.

황제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한마디 한마디, 느리게 떨리는 작은 소리로.

"금일은...마침내 제도가 공식적으로 제 모습을 되찾은 기쁜 날이오...다들, 시름을 잊고...연회를 즐기도록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황제가 상석의 옥좌에 주저앉았다.

뒤이어 옥좌 옆에 선 이자벨라가 팔을 벌리며 축사를 남겼다.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본 연회는 제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자리이니, 부디 여러분의 열의와 즐거움으로 다시 일어선 제국의 심장에 축복과 활력을 선사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답니다."

벌꿀을 채운 호수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엉겨오는 끈적임에 다리를 붙들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서서히 가라앉는 진득한 늪.

연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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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맞추어, 중앙 홀에 가득 찬 쌍쌍의 귀족들이 회전하며 춤춘다.

회장에 묘한 열기가 차오른다.

눈을 맞춘 남녀가 묘한 웃음을 흘린다.

욕정인지, 애정인지.

나는 한쪽 벽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지는 않았다. 애초에 출 생각도 딱히 없었고...

빙글빙글 돌다가 베일이 옆으로 걷혀지기라도 하면, 저 웃음소리와 환성이 경악과 비명으로 변할 것이라는 직감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호랑이가 끼어들어 춤춘다고 생각해 봐라.

...그건 좀 재미있을 것 같기도.

경쾌하게 발을 구르며 왈츠를 추는 호랑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프리데의 파트너 역할은 나이젤에게 맡겨버렸다.

나이젤은 잠시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춤추는 모습을 보아하니, 머뭇거리던 이유를 대충 알겠다.

딱 봐도 뭔가 좀 어설퍼 보이니까.

나이젤 역시 이런 일은 익숙지 않은 모양이네.

연신 식은땀을 흘리던 나이젤은, 프리데의 발을 한번 밟고 나서부터는 아예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리데가 소곤소곤 그녀를 달래주었다.

천만다행이지, 내가 밟았으면 완치될 때까지 외다리로 다녔어야 했을 텐데.

이자벨라 황후는 황제의 옆에 앉아 있었고, 레오폴트는 열여섯쯤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와 춤추었다.

비엔 공작의 영애인가.

나와 약혼한다는 계획은 포기했으니, 비엔 공작 쪽을 노리나 본데.

올바른 판단이긴 하다.

다섯 선제후 중 대주교 둘은 에른스트를 지지하니까, 나머지 셋을 공략하셔야겠지.

루드비히는 레오폴트파가 확실하고, 페일룬 역시 중립이라고는 하지만 북부에서 활약 중인 2 황자 카를을 생각하면...

최종적으로는 레오폴트 쪽을 지지해줄 가능성이 높으니.

비엔 공작만 끌어들인다면 해볼 만 하다 이건가.

선제후의 혈통과 정략혼을 하지 않는다는 황실의 불문율은 내다 버렸구만.

하긴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인데 불문율에 신경 쓰는 것도 바보짓이긴 하지.

에른스트와 춤추는 아가씨는...누군지 모르겠네. 본 적 없는 여자인걸.

그 말은 딱히 고위 귀족은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자벨라가 싫어하겠어.

레오폴트는 선제후의 딸과 관계를 쌓아가고 있는데, 자기 아들은 쓸모없는 여자나 신경 쓴다면서.

레오노르는 춤을 추지 않았다.

기사의 제복을 입고 왔을 때 이미 짐작하기는 했지만.

황실의 관례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상석의 귀퉁이에서 팔짱을 낀 채 연회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춤출 생각이 없으신가 보죠? 아이샨기오르 왕녀님."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여자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이 드는 목소리로.

나이는 이십 대 중반 정도일까.

보라색 드레스에 틀어 올린 적발. 나른해 보이는 눈매가 묘하게 요염한 여자였다.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난 위쪽은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시감의 정체를 곧바로 깨달을 정도로.

그도 그럴 것이, 오필리아가 예닐곱 살쯤 더 먹으면 이런 얼굴이 될 것 같았으니까.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

에른스트파의 유력 귀족이자, 이자벨라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여자였다.

원작에서는 오필리아와의 결투에서 패한 이후 모습을 감추었었지.

"...시그밀러스 영애."

"어머, 절 알고 계셨나요? 만나서 반가워요. 클레어 반 시그밀러스랍니다. 클레어라 불러주세요."

클레어가 우아하게 손등을 내밀었다.

이 시점에 내게 접촉하는 건가. 목적을 영 모르겠는데. 일단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며시 감싸 쥐고, 베일 안쪽의 입가로 가져와 허리를 숙이며 가볍게 입 맞추었다.

향수로 덮은 약품 냄새와 옅은 피 냄새.

전형적인 여마법사의 체취가 손끝에 살짝 배어있었다.

"하샬르 메디안 아이샨기오르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시그밀러스의 레이디 한 분을 가끔 본 적이 있었기에, 클레어 양 역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겠더군요. 두 분이 서로 많이 닮으신 것 같습니다."

"오필리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 귀여운 여동생이랍니다. 갑자기 아카데미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만나지 못한지도 꽤 오래된 터라...요즘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잘 지내고 있기는 해. 교관들이 속 터질 정도로 느긋하게 말이야.

물론 마음 속으로는 네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지만.

그건 그렇고, 오필리아가 입학시험 때 입었던 드레스랑 비슷한 복장인걸.

아니, 오히려 오필리아 쪽이 클레어와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야 맞겠지.

제 언니를 증오한다면서도, 굳이 그녀와 흡사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건가. 참 알 수 없는 성격이야.

"먼발치에서 본 정도지만,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아무리 학업이 바쁘다 해도 그렇지, 가끔씩은 가문에 찾아와주면 기쁠 텐데 말이에요. 그리워라."

그야 네가 있으니까 안 가는 것 아닐까?

남들이 보면 여동생을 정말 아끼는 언니인 줄로만 알겠네.

"1학년은 한창 배워 나가야 할 시기이니까요. 오필리아 양 역시 클레어 양을 그리워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겠네요...그건 그렇고, 모처럼의 무도회인데 어째서 이런 곳에 홀로 서 계시는 건가요?"

"제가 저들 사이에 끼어든다면 주변 사람들이 경악할 겁니다."

주변인들이 죄다 몸을 피하거나 움직임을 멈춰서, 그야말로 나만의 독무대가 펼쳐질 것이다.

그 상황에 제대로 출 줄도 모르는 춤을 춰야 한다고?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지.

"제도 시민들을 구한 영웅을 두려워하다니, 설마 그럴 리가요."

"클레어 양은 제가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해야 하나요? 이렇게나 멋진 기사님이신데."

클레어가 슬쩍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복숭아를 닮은 달큰한 체향이 선명해질 정도로 가까이.

숨 쉬듯이 끼를 부리네 이 여자. 동성을 상대로도 말이야.

이자벨라가 시키더냐? 내게 접근해 보라고?

"무서워하는 것이 옳습니다. 존중이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공포가 없다면 예의 또한 바라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방인인 제게는 더욱 그렇겠지요."

거리를 두듯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만약 저 귀족들이 날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건드려볼 만한 먹이쯤으로 여기고 접근해왔겠지.

지금 너처럼 말이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패닉에 빠지는 것도 그것대로 문제이긴 하다만...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클레어가 여우처럼 눈웃음을 흘렸다.

모르긴 뭘 몰라.

카리스마 잃은 황제가 저쪽에 한낱 장식품처럼 앉아있는 몰골을 보고도 그런 말을.

"클레어 양이야말로, 무도회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저와는 달리 파트너로 선택받는 영예를 바라는 분들이 아주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후후...기쁜 칭찬이네요. 원래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의 첫 춤은 다른 분께 양보해 버렸거든요."

클레어가 에른스트 쪽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그와 춤추며 웃고 있는 레이디를.

원래는 에른스트와 춤출 계획이었다는 건가.

부채로 가린 눈매 너머로 애써 감춘 적의가 느껴졌다.

눈빛만 보면 저 여자를 이자벨라에게 갖다 바치고 싶어 하는 느낌인데.

에른스트가 그녀를 싸고도는 이상, 이자벨라의 명이 없다면 감히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렇습니까. 그렇다 해도 새 파트너를 구하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셨을 텐데."

"글쎄요, 그다지 내키지 않더군요. 어째서일까요? 아마 이렇게 매력적인 기사님을 만나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어느덧 5월도 절반 이상이 지나갔네요!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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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왕녀공녀 흑백왈츠는 다음으로 미루어졌습니다...!

저 한복판에서 춤추면 테러행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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