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 오랑캐가 입학했다-96화 (96/100)

제 96화

왈츠

끈적거리는 눈빛에 교태 섞인 목소리.

거기에 살짝 붉힌 뺨과 가슴을 강조하듯 반대쪽 어깨를 감싸 안은 손까지.

내 성별을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미심쩍어질 지경이었다.

왜 이러는 거지, 날 유혹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았나?

...이자벨라의 목적이 그런 거라면, 차라리 미남 귀족이라도 보내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 아닐까 싶은데.

물론 정말 그런 짓을 했더라면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도망쳤겠지만.

"파트너 없는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신들께서 저희에게 내리신 인연이겠죠. 어때요, 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실로 대담한 발언이었다.

레이디 쪽에서 먼저 춤을 신청하는 일은 정숙하지 못하다며 눈총을 사도 이상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니까.

복숭아향이 짙어진다.

그녀의 눈빛은 기묘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고, 내밀어온 손바닥은 날 끌어당기려는 듯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중앙홀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어머, 다른 분들이 신경 쓰이신다면 굳이 저곳에서 춤을 출 필요는 없어요. 보세요. 발코니가 넓지 않나요?"

내 거절을 거절한 클레어가 뒤쪽 발코니로 시선을 던졌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너머로,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한 드넓은 발코니들이 연달아 튀어나와 있었다.

확실히 저기라면 남들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긴 한데...

아니 애초에 난 춤출 줄 모른다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사실. 부끄럽지만 저는 제국의 사교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클레어 양에게 실례만을 끼쳐드리게 될 것 같군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겠죠. 그만큼 무예에 전념하시며 살아오셨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가르쳐드릴 테니."

클레어가 눈웃음을 흘리며 손을 살짝 더 내밀었다.

빨리 잡아달라는 듯이.

"제가 실수라도 하면 클레어 양의 발등이 으스러질 겁니다."

아주, 아플 거야.

온 황궁에 울려 퍼질 정도로,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올 거란다.

"이래 보여도 저는 실력이 대단한 마법사랍니다? 발등에만 방벽 마법을 펼쳐놓으면 괜찮겠지요."

집요한 여자네.

대체 나랑 춤을 추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여자를 어찌해야 하지.

돌려 말하는 건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직설적으로 거절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차라리 하자는 대로 따라주면서 무슨 속셈인지 확인해보는 쪽이 나으려나?

그래. 그편이 낫겠어. 그렇게 하자.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어쩔 수 없군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클레어 양."

"저 역시 영광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하샬르 왕녀님?"

결국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클레어가 눈웃음을 흘렸다. 요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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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오른 연회장 내부와 달리, 발코니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짙은 커튼과 유리창에 가로막혀, 물속에서 듣는 노랫소리같이 먹먹하게 변해 있었지만...그 때문인지 다른 소리들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귓가를 울려왔다.

대리석 바닥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발소리. 몸을 돌릴 때마다 스치는 드레스 자락의 마찰음.

나지막하게 속삭여오는 클레어의 목소리.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 소리. 내 가슴에 닿아 흩어지는 가냘픈 숨소리까지.

어느새 떠오른 보름달이, 둘만의 무대에서 빙글빙글 춤추는 클레어와 나를 내려다보며 푸른 빛을 쏟아냈다.

달빛을 흠뻑 머금은 그녀의 자태는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더욱 깊어진 복숭아향이, 어느덧 후각을 넘어서 혀끝까지 단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제 허리에 손을 올리고...끌어안듯이 당기며 몸을 돌리는 거랍니다."

클레어가 살며시 몸을 기대왔다.

키 차이 때문인지 내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종종 맞닿을 정도로.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 같은데. 은근슬쩍 뺨을 문질러오기도 하고.

이 여자, 이런 성향이 있었나?

"클레어 양, 그...좀 지나치게 가까운 것 아닙니까?"

"후훗, 왈츠는 원래 이런 춤이랍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어요."

클레어는 내게 반쯤 안겨든 채 고개만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욕망으로 달아올라 흐릿했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달큰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턱끝에 맺힌 땀방울이 드레스 앞자락에 떨어지며 진득한 체향을 확 퍼트린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생긋 웃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제 충동을 참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으며 입 맞출 듯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자, 아직 연주가 끝나지 않았답니다?"

클레어가 가볍게 떨어지며 몸을 돌린다. 드레스 자락이 회전하며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다가왔다.

가깝다 싶으면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으면 안겨들며 끝없이 춤을 이어간다.

나는 그저 클레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가며 몸을 움직였다.

땀방울이 흐르는 새하얀 목과, 회전할 때마다 출렁이는 흉부만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

...

......

...지금, 목을 꺾어버리면. 간단할 것 같은데.

심장을 꿰뚫어 버리면. 마법으로 반격할 수도 없겠지.

클레어의 유혹은 성공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나는 지금 그녀의 목줄기를 꺾어버리려는 유혹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으니까.

미약 섞인 향수 냄새는 욕정이 아니라 경계심과 짜증만을 일깨웠고, 가슴에 닿는 얼굴의 감촉은 역겨웠다.

이게 지금 누구에게 수작질이야.

내가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대로 이자벨라에게 보내버리려고?

목적이 뭔가 했더니 고작 이런 것들로 나를 홀려볼 생각이었나.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숨통을 쪼개고 널브러진 시체를 발코니 너머로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 뒤에 오필리아에게 찾아가서는...

언제쯤 완성될지 모르는 네 계획을 기다리기 지루해서, 사전에 일을 끝내버렸다고 으스대기도 하고 말이지.

둘이 나가서 한 명만 돌아오고, 나머지 하나가 시체로 발견되거나 실종자가 되어버리면 뒷수습이 불가능하니 참고 있을 뿐이었다.

살의를 억누르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나마 베일을 쓰고 있던 덕분에, 내 표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얼마 후, 궁 안쪽에서 들려오던 연주 소리가 끝을 맞이했다.

짧은 박수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끝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가볍게 목례했다.

"여기까지군요. 즐거웠습니다. 클레어 양."

"저도 즐거웠어요 왕녀님. 처음이라 말씀하신 것치고는, 왈츠를 아주 잘 추시던걸요. 자, 그만 안으로 들어갈까요?"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인사한 클레어가 손을 뻗어왔다.

다행히도 이 이상 질척거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몸으로 들러붙어 오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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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연회장 내부는 꽤 번잡스러웠다.

춤을 추느라 지친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연회장 한쪽에서 음료를 마시며 몸을 식혔고, 몇몇 사내들은 이층으로 올라가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저도 목이 좀 마른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같이, 한잔 하시겠어요?"

클레어가 슬며시 테이블 쪽을 눈짓했다.

술? 그건 무리지.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술에 약한 편이라, 이곳에서 실례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요."

네가 주는 술을 어떻게 믿고 입에 대겠어.

은근슬쩍 뭘 섞어 넣을지 모르는데.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요? 그리 독하지 않은 술도 많답니다."

"죄송합니다. 레오폴트 황자 전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는지라, 술을 마신 채로 그분을 마주하는 것은 역시 곤란하겠습니다."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춤 정도라면 모를까, 마실 것을 입에 대는 것은 정말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레오폴트의 이름을 꺼낸 이상, 에른스트파인 클레어가 이 이상 강권하긴 힘들겠지.

나와 너는 정적이라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니까.

"그런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러면,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다음에 또 만나 뵐 수 있다면 기쁘겠네요."

"기꺼이."

그때는 오필리아와 같이 만나게 될 거야.

잘됐네. 동생이 그립다고 했었지?

내민 손등에 다시 한번 키스하며 클레어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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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간 보냈나 보네?"

"뭐?"

내 쪽으로 걸어온 프리데가 실실 웃으며 다짜고짜 알 수 없는 소리를 꺼냈다.

"아까 보니까 빨간 머리 여자 하나랑 슬쩍 발코니로 향하던데. 재주도 좋아, 얼굴을 가리고도 여자 하나를 유혹하다니 말이야?"

클레어와 같이 잠시 나갔다 왔던 모습을 본 건가.

제대로 본 건 아닌 것 같지만.

"유혹한 게 아니라 그쪽이 날 꼬시려던 거지. 시그밀러스 백작가의 첫째 딸이었거든."

"아, 그 3 황자파의 여마법사? 흐으음..."

내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프리데가 눈썹을 꿈틀댔다.

미심쩍다는 건지 언짢다는 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 여자, 남자한테는 묘하게 싸늘하고 여자한테는 항상 친절하다 보니,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거든."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네, 그쪽 취향인 것 같기는 하더라. 나한테도 얼굴을 들이대던데."

사실은 이자벨라에게 여자들을 바쳐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여자를 유혹하고 다니는 것이겠지만.

...아닌가?

아까보면 솔직히 좋아죽는 것 같기도 하던데.

"아, 그래서 옷이 그 모양이었구나? 어쩐지."

옷?

프리데의 시선이 내 가슴 쪽을 향해 있었다.

아래를 향해 시선을 내리며 가슴 쪽 옷자락을 살짝 들어 보였다.

아.

하얀 분가루가 가슴 쪽에 한가득 묻어 희뿌옇게 번져있었다.

아니 진짜, 그 빌어먹을 여자가.

옷자락을 잡은 채 반대쪽 손으로 가루를 털어내었다.

그런다고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좋은 시간을 보낸 건 그 여자 쪽이었네."

프리데가 킥킥거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주인공도 춤을 추기는 했습니다...! 달빛이 드리우는 발코니에서 단 둘만의 왈츠라니 로맨틱하네요!

일과 취미가 일치해 직업만족도 100%를 달리는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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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라)

레오폴트 놈도, 내 아들도 거절한데다가...페일룬의 딸을 에스코트하며 들어왔다고?

혹시 여자를 좋아하나? 클레어를 한번 보내봐야겠다.

하샬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굴다니,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가?

클레어)

히히 개꿀

#착각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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