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화
무도회를 마치고 (2)
=====[아이샨기오르 하샬르]=====
"남의 자식을 완전히 망가트린 것도 모자라, 기억조차 못 하다니!"
길버트가 고함을 질렀다.
크게 벌어진 콧구멍이 씰룩였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하샬르의 미간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여전히 베일을 쓰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건가? 일개 자작 주제에?"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하샬르 역시 날을 세웠다.
여기가 제국의 황궁이 아니었다면, 혀를 뽑아내고 팔다리를 잘라 돼지 같은 몸뚱이만 남겼으리라.
그 꼴로 창대에 매달아, 번스타인이라는 땅으로 향했겠지.
살아있는 것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도살한 뒤, 그 잘난 일족을 모조리 붙잡아 개에게 던져주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도록.
눈을 뽑는 것은 그다음에 할 일이었다.
스산한 살기가 그녀의 몸에서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큰 소란을 일으키면 곤란했기에 기세를 억제하고 있었으나, 불쾌감을 품는 것만으로도 흉흉한 악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두꺼운 베일로 가려진 얼굴 안쪽으로부터, 짙어지기 시작한 푸른 안광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미쳐버린 호랑이가 노려보는 듯한 오싹한 공포.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난 길버트는,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끼고는 오히려 더욱 분노했다.
혈관에 가득 찬 술기운이 그런 만용을 불렀으리라.
그것이 아니라면, 그 자신에게 남아있던 아비로서의 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식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화내지 않는 아비란 없소!"
길버트는 자랑스러웠던 아들, 케네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천재에 이르진 못하였어도 수재를 놓친 적이 없는 마법의 재능.
아비와 달리 귀족다운 기품이 가득한 외모.
아카데미에 높은 성적으로 입학했던 날에는, 내실에서 홀로 와인을 마시며 자축했었다.
번스타인 가문을 물려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고.
그랬던 자식이 단 며칠만에 폐인이 되어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치료 덕분에 남아있는 외상은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케네스는 여자를 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방 안에 틀어박혔다.
저택의 메이드나 제 누이, 심지어 어미를 볼 때마저.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제들에게 백방으로 상담해 보았지만...육신의 상처라면 모를까, 정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시간뿐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아내는 시름에 잠겨 앓아누웠고, 딸은 제 오라비가 걱정되어 한숨만을 내쉬었다.
길버트는 매일매일을 술에 취해 지내며 이런 짓을 저지른 원흉이 대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아카데미는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훈련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일체의 책임이 없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범인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오늘, 3 황자파의 한 귀족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아들 역시 그날 부상을 당했다고 했던가.
저 야만스러운 암컷 짐승, 아이샨기오르에게.
길버트가 하샬르를 노려보았다.
물론 케네스를 기억도 못 하는 하샬르에겐 알 바 아닌 이야기였다.
그저, 그래도 오르한보다는 나은 아비 같다고 잠시 생각하고 흘려보낼 정도였으니.
'나름 아비랍시고 자식을 위하는 거니까, 적당히 달래 돌려보낼까.'
하샬르로서는 실로 몇 년 만에 베푸는 자비인지,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귀한 자식이라면, 자식이 슬퍼할 일은 여기서 그만두지 그래?"
"지금, 뭐라 했소."
"그야 아비가 헛된 만용을 부리다 개죽음당한다면, 슬퍼하지 않을 자식이 없겠지? 그러니 당장 입다물고 꺼지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특별히 넘어가 주겠어."
길버트가 간질 환자처럼 떨었다.
하샬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자비를 보여주었으니, 이 돼지 역시 제 분수를 알고 돌아가리라 여기면서.
"이...미친...!"
'정신 못 차리네.'
짜증이 솟구친 하샬르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것을 저놈의 주둥이에 박아넣을지, 그냥 내용물을 들이킬지 고민하며.
결국 갈증이 승리했다.
주둥이를 부수는 것은 병을 다 비운 이후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
와인을 남김없이 들이킨 하샬르가 입가를 닦아내며 길버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입 조심해. 황궁이 언제까지 널 보호해 줄 것 같아?"
현실감 넘치는 위협에 질린 길버트가 반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하샬르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 상태에서도 내심 감탄했다.
저 터질듯한 뱃살 안쪽엔 오직 부푼 간덩이만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사과 한마디 요구한다고,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어디 한번 해 보시오!"
"사과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길버트의 요구는 하샬르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야, 대련이랍시고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대련? 아. 뭐야, 그런 거였나. 그건 그 자식 정신머리가 약해빠진 게 잘못이지."
하샬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했다. 그녀로서는 어이가 없었으니까.
대련하다가 부상당하는 것쯤이야 초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니.
사제나 마법사가 없는 만큼, 그쪽에선 중상을 입으면 치료할 방법도 없었다.
반면 서부인들은 죽기 직전의 부상조차 멀쩡히 회복시키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아왔건만.
그따위 일로 엄살을 피우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군...! 되었소, 최후통첩이오. 내 아들에게 찾아가 사과하거나, 번스타인 가의 적이 되거나. 선택하시오!"
"나보다 약한 놈들의 협박 따위를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 나야말로 최후통첩이다. 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
하샬르가 손을 내저었다.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 처신이었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 모욕,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모욕? 너 따위가 지금 내게 지껄이는 소리야말로 모욕이지. 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부들부들 떨던 길버트가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그러나 길버트에겐 유감스럽게도, 하샬르는 귀가 아주 밝은 편이었다.
"...야만인에게 다리나 벌린, 창녀 년의 자식 따위가...!"
그 순간 하샬르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놈은 선을 넘었으니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몸을 빼앗은 놈이 황자에게 허락받아둔 방법이 있었으니.
'분명히, 이렇게 하는 것이었지.'
하샬르가 왼손의 장갑을 잡아뽑았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아야 했다.
"자작. 널 낳은 부모는 누구지? ...아직 살아는 있나?"
"뭐라고...?!"
대놓고 날아온 심상치않은 발언에 길버트가 놀라 뒤돌아보았다.
오른손에 장갑을 쥔 하샬르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베일 따위로 가릴 수 없는, 타오르는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아니...다시 생각해보니 알 필요 없겠어. 결투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알아서 기어나오겠지."
"지금, 무슨 헛소-"
길버트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목이 일곱 바퀴가 돌아간 인간이, 말을 내뱉을 수는 없으니.
길버트의 몸이 꿈틀꿈틀 경련하다 옆으로 쓰러진다.
쿵, 하는 육중한 소음이 발코니를 울렸다.
그의 뺨을 강타한 천 장갑이 파편으로 변해 나풀나풀 흩어졌다.
벌어진 다리 사이가 짙은 색으로 물들어간다.
역겨운 지린내에 미간을 찌푸린 하샬르는 시체를 걷어차 발코니 아래로 밀어버리고 태연스레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등 뒤로, 가죽 풍선이 터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뒷수습은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강탈자 놈이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슬슬, 나와 있을 수 있는 시간도 한계에 달해가고 있었으니까.
"무슨 짓을...한 것이오?"
레오폴트 황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물어왔다.
"결투죠. 제가 이겼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하샬르의 의식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맥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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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의 죽음은 실족사로 처리되었다.
만취한 채 발코니의 난간에 몸을 기대려다가,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고.
사실이 아님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큰 반발은 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 제도를 구한 포상으로 황제에게 직접 무공훈장을 하사받은 최연소 달인.
그 이름값을 일개 자작 살인죄 따위로 훼손할 수는 없었으니까.
거창한 수여식을 벌였던 황실의 권위만을 떨어트릴 일이었다.
어차피 번스타인 가는 3 황자파에 가까웠던 만큼, 레오폴트가 이를 묻어버리려는 것이야 당연했다.
자기 입으로 결투까지는 상관없다고 말하기도 했었으니.
물론 카하르의 결투 방식이 저따위라고는 레오폴트 역시 예상하지 못했었지만.
모두가 의외라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에른스트파의 반응 쪽이었다.
당연히 귀족 살인죄의 책임을 물고 늘어지리라는 귀족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자벨라와 에른스트는 침묵을 지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오노르는 오히려 좋아했고.
황녀의 마지막 체면을 위해 다들 함구하기는 했지만 '돼지 같던 놈이 잘도 죽었네.'라고 말했다던가.
결과적으로, 하샬르 메디안 아이샨기오르의 귀족 살해 사건은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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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머리야......"
내가 깨어난 곳은 특별관의 침대 위였다.
나는 눈뜨자마자 느껴지는 통증에 관자놀이 부근을 감싸 쥐었다.
뇌를 압착기에 넣었다가 다시 부풀린 것처럼 머리가 끔찍하게 지끈거렸다.
내가, 어 그러니까. 뭘 하고 있었더라...?
머리가 아파서 생각이......
아 그래. 연회장에 가서, 클레어랑 레오폴트를 만나고...그래, 와인 한 잔을 마셨었지.
설마 그 한잔에 필름이 끊겨버린 건가?
아니 이 몸이 그 정도로 술에 약했다고? 이해가 안 가는데.
메르신인가 하던 녀석이, 헤르셀라는 술에 강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지 않았었나?
아니 그것보다, 설마 무슨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선 나이젤이 조금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멸이나 그런 감정은 아니고, 뭐랄까.
골칫덩어리 자식을 내려다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이었다.
확실하네. 뭔가 사고를 쳤구나.
관자놀이에서 슬며시 손을 떼어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내가 뭔가 사고라도 쳤어?"
"...예, 거하게 치셨습니다."
한숨을 내쉰 나이젤이 서한 하나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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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죽여버리겠어.
-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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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모를 적의가 가득 담긴 서한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뭐야 이건?"
"번스타인 가문에서 보낸 결투 선언입니다. 아마 자작부인이 직접 작성했겠지요."
번스타인?
...그게 누구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님 안녕하세요! 이제 공모전 시즌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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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ㅠㅠ
선한 사람은 아니었고, 현명한 인간도 아니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