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놈이 왜 여기 있어.
신전 잔해에 깔려 있는 성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얼굴은 내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찬란한 백금발은 피에 흠뻑 절어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도 붉은 상처가 가득했다.
죽었나.
손을 뻗었다. 주변을 배회하던 언데드들이 덜컹거리며 다가왔다.
언데드들은 내 명령에 따라 남자를 누르고 있던 잔해를 밀치고 그를 꺼냈다.
온전히 드러난 그의 몸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이쯤 되면 죽었을 법한데, 미약하게나마 숨이 이어지고 있었다.
“얘가 여기서 죽었나 보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말에 언데드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환희의 몸짓을 했다.
강해 보이는 자이니, 언데드로 만들어 동료로 삼자는 뜻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옅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 남자는 성검의 주인이자 여주인공의 첫사랑이다.
하지만 극의 초반에 죽게 된다. 여주인공의 각성을 위해서.
이 남자가 죽은 후 복수를 결심한 여주인공은 능력을 개화해 세계를 구원하는 수호자가 된다. 그리고 나 같은 악한 이종족들을 멸족시킨다.
이게 바로 내가 들어온 소설, 〈덫에 걸린 새는 도망치지 못한다〉의 큰 줄기였다.
이런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일찌감치 도망쳤던 것인데…….
“왜 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거야. 죽을 거면 진즉 죽어 있든가.”
여주인공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는 죽음을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죽을 당시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즉, 이대로 이놈이 내 눈앞에서 죽어 버리면 여주인공은 내가 이놈을 죽였다고 판단할 게 분명했다. 내게 불똥이 튀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간신히 탑에서 도망쳐 나와 이제야 편히 사는가 했더니 이런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집 밖에 나오지 않았을 텐데.
“쯧.”
하지만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뱉으며 언데드들에게 손짓했다.
“집으로 데리고 가.”
일단 살리고 봐야 했다.
여주인공의 손에 죽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2장 태어나 보니 이렇습니다
시작은 컴컴한 요람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 다시 태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책 속 세계에 들어온 줄은 몰랐다.
눈을 뜬 나는 맑은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캄캄했다.
등불 하나 켜 있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구름 너머로 근근이 고개를 내미는 달빛이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일 게 분명했다.
조금씩 또렷해지는 시야는 이 방 안에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 거울 가까이로 다가갔다.
갓난아기 주제에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무언가 이상했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울에 담긴 나는 다행히도 아기였다. 머리가 크고, 몸은 작으며 손과 발은 아담하고 귀여운 아기.
그러나 긴 머리카락과 특이한 눈 모양을 지닌 아기였다.
거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카락은 내 몸 전체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머리칼은 새까맣기 짝이 없었는데, 언뜻 달빛에 닿는 부분만큼은 쪽빛을 띠었다.
피부를 비춰 보았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기의 피부는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게 보통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건 마치…….
‘비늘?’
목덜미의 군데군데에 투명한 비늘 같은 것이 솟아 있었다. 살짝 건드리니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불안함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보았다.
내 눈은 너른 들판의 색을 담아 온 것처럼 새파란 연두색이었다. 어떤 불순물도 없는 연두색.
여기까지는 나름 마음에 들었지만…….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기이할 정도로 또렷했다.
확장할 때에는 눈동자 전체를 덮을 만큼 커지고, 수축할 때에는 가느다란 실처럼 좁아졌다.
이와 같은 눈은 소름 끼치도록 신비로웠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쐑, 쐑, 소리가 나는 듯했다. 마치…….
‘뱀 같아.’
쐐엑.
동공이 수축했다.
몸에 돋아 있는 비늘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인 공포. 나는 어깨를 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였다.
“깨어났느냐?”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검은 로브를 쓰고 있었는데, 키가 큰 탓에 드러난 발목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맞나. 저런 걸 사람이라 해도 되나. 나는 살이 없이 뼈만 남아 있는 그의 발목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장갑을 낀 손을 뻗어 내 턱을 잡아당겼다.
갓난아기를 만지는 손길이라 하기엔 매우 우악스러웠지만, 이미 모든 것들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데 이깟 것이 대수일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내 눈을 더듬었다. 눈꺼풀을 잡고 손을 벌렸다. 내 찢어진 동공이 그를 향해 수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곁에 또 다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뼈와 살은 붙어 있었다. 인간인 듯했다.
“이놈을 보아라.”
그는 내 턱을 잡아 남자를 향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파스스슷!
몸이 떨릴 정도로 짙은 한기가 찾아왔다. 동시에 눈알이 파헤쳐지는 것처럼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윽.
나는 눈을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눈꺼풀이 모두 다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하하!”
하지만 그는 나의 고통을 개의치 않아 했다. 그저 나를 팽개치고 껄껄거릴 뿐.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아픈 눈을 꾹 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돌이 되어 버린 인간 남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눈을 벅벅 비벼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변함이 없었다.
션이라 불린 남자는 돌이 되었다.
‘이게 대체…….’
태어나자마자 한 생명을 죽였다는 충격을 갈무리할 새도 없었다. 한참을 웃고 있던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졌군. 아주 걸작이야, 걸작.”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듯 헝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이제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지.”
그는 허리를 굽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갑을 벗었다. 뼈와 살이 엉겨 붙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카리나.”
그의 손에서 시체가 썩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나의 아이야, 네 이름이란다. 카리나, 카리나 아포칼리타.”
아버지인 그는 로브를 내렸다. 얼굴 반쪽은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디 이름을 기억하고, 성을 받아들여 이 아포칼리타의 훌륭한 재료가 되어 주길 바란다.”
그는 아포칼리타란 성을 기억해 두라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난 이미 그 명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포칼리타.
이종족을 ‘생산’하는 곳이자 ‘신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
내가 죽기 직전 읽었던 소설의 최종 보스 되시겠다.
아, 이걸 어쩌지.
난 갓난아기답지 않은 실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