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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6화 (6/135)

6화

우리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원작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꼭 그러한 게 아니다. 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진영을 이탈했고, 일부러 인간들의 공격에 당해 주었다.

쾅, 쾅.

그들의 폭격에 맞은 내가 추락할 때에 자일과 샐러딘 역시 진영을 이탈했다.

가장 주축이 되는 나와 자일이 흔들리니 수세가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까닭으로 우리는 패배했고, 탑으로 도망쳤다.

아버지는 분개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자들을 모아 신전으로 옮겨 준 후 남아 있는 형제들을 데리고 탑으로 돌아오는 것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는 로브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의 금이 간 두개골이 훤히 보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뼈만 남은 손을 달그락거리며 분개한다.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살점이 발갛게 달아 올라있는 게 보였다. 분노의 증표였다.

“카리나! 너는 대체!”

“죄송해요.”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방심한 탓에, 당해 버렸어요.”

그리고 상처를 입은 옆구리를 감쌌다.

어느새 튀어나온 히론이 내 상처를 할짝이고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내 상처는 갈비뼈가 보일 만큼 깊었으니까.

내 엉망이 된 몰골을 본 아버지는 말을 삼켰다.

쾅!

그는 탁자를 내리치며 주먹을 바르쥐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일의 말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 반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게 좋겠지. 그놈들이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했어.”

그렇게 말을 하지만 분을 참지 못하는 양, 아버지는 턱뼈를 딱딱 움직였다.

자일의 창백한 얼굴에도 분명한 그림자가 져 있었다. 다른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름이 드리워진 얼굴이었다.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인가? 마치 그러한 것처럼 좌절하고 있는 그들이 퍽 우스웠다.

정말 이게 뭐라고.

신이 무어고 악이 무어라고.

대체 그것들이 무어라고 목숨을 걸며 싸워 대는 것일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느 정도 살이 올라온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손을 튕겼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 중 가장 귀가 밝은 아버지와, 샐러딘이 동시에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빼곡한 인파가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그들은, 탑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인간들이 대체 이곳은 어찌 알고……!”

아버지는 턱 끝을 떨었다. 그의 서슬 퍼런 안광이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 상태로 저들을 상대하기엔 벅찰 거예요.”

나는 내 몸 뒤로 숨는 샐러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일단 도망친 후에, 후일을 기약하죠.”

자일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냐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시했다. 어차피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가 흘리는 피에 가 있었으니까.

저런 미쳐 있는 놈 따위,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그는 덜그럭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에 겨우 붙어 있던 살점이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아아, 아쉬워라. 저게 인간이었다는 마지막 증표였는데.

난 짧게 혀를 찼다.

“그래. 카리나의 말이 맞다.”

아버지는 손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의 황망하게 비어 버린 눈이 나를 향했다.

“함께 도망치는 것은 무리니 따로 가는 것으로 하지. 혈족이 없는 아이들은 각기 신전으로 도망을 치고. 자일, 너는 피의 형제를 데리고 북쪽으로 가라. 샐러딘, 너는 불의 혈족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라. 루나, 너는 어둠의 혈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라. 그리고 카리나 너는.”

“전 여기 있을게요.”

샐러딘이 내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난 그런 샐러딘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강아지의 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기껍게 다가왔다.

“아버지 혼자 막으실 순 없잖아요.”

“…….”

아버지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어쩌면 감격한 것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근육들이 증발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짐작하건대 나를 뿌리칠 것 같진 않았다. 난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이곳에는 나와 카리나가 남겠다. 나머지는 빨리 가도록. 후에 탑을 재건한 후 부르겠다.”

가장 먼저 자리를 뜬 건 루나였다.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만 인사를 하곤 날아올랐다. 그녀를 따라 어둠을 품은 형제들도 함께 도약했다.

자일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손을 뻗는다. 그를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던 피의 일족들이 모여들었다. 꾸벅 인사를 한 그는 날아올랐다.

곧이어 그가 흘리는 핏방울이 사라지자, 내 뒤에 숨어 있던 샐러딘이 고개를 내밀었다.

샐러딘은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은 틈을 타 까치발을 들었다.

“카리나.”

그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난 카리나가 공격에 맞는 걸 봤어.”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공의 구분조차 희미한 그의 눈 안에는 내가 담겨 있다.

나의 피와 누군가의 피가 섞여 새빨간 색이 된, 내가.

샐러딘은 내가 일부러 공격받은 걸 알고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 알고 있기에,

“내가 더 크면 찾아갈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 않는 걸 수도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을 테니까.

“잘 가, 샐러딘.”

휘잉!

불어온 바람이 샐러딘의 몸을 휘감았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목례한 후 땅의 일족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이 거대한 탑에 남은 건 나와 아버지뿐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며 턱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내 움직임에 따라 히론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히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내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풍이 닥치기 전, 나는 이 잠깐의 고요함을 즐기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생생했다. 이 탑의 정경이.

텅 비어 있는 중앙과 나선형의 계단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에는 용의 비늘로 만든 샹들리에가 있다.

아비는 항상 저것을 보며 자랑하곤 했다.

과거 내가 직접 잡은 용의 것이다. 산 채로 용의 비늘을 벗겨 보았느냐? 그놈이 울부짖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지!

나는 생각했다. 그는 태어나기를 악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하고.

감은 눈을 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불투명하게 들어오는 햇빛이 때아니게 낯설었다. 옆구리의 지혈은 다 마쳐진 상태였다.

“아버지.”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창 밖을 내다보며 주먹을 꽝꽝 내리쳤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쫓아와……! 신의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개새끼 주제에!”

그런 개새끼들도 이기지 못한 자가 누구였더라.

나는 작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러해도 괜찮다. 그래. 괜찮아. 저들만 없앤다면 주신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신을 죽이면 우리가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는 마치 자기 암시를 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항상 저렇게 말을 하곤 했다.

이미 이 세계의 신은 권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권능이 있고 생명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러니 우리가 새로운 세상의 신이 될 것이라고. 세계를 발밑에 꿇릴 수 있는 건, 오직 아포칼리타뿐이라고.

나는 그의 앙상한 해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욕망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를 지배하여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얼까. 스스로가 신이 되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얼까.

과연 얻는 게 있기나 할까? 잃을 게 더 많지 않을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리나, 너는 힘이 남아 있느냐?”

살펴본 그는 아까 전의 전투로 많은 힘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요즈음 그렇지 않아도 ‘생산’ 때문에 힘을 많이 소모한 터. 내 예상보다 더 헐떡이는 모습이었다.

“네. 저는 충분해요.”

나는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누군가를 죽일 정도는 되죠.”

내 음성에 서린 기색을 읽은 것일까. 그는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보이세요?”

나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큼 가까워진 인간들이 보였다. 수많은 인간들,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들.

“정말 보이세요?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는 게?”

나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이제는 안 보이죠?”

인간 같은, 환영들.

환영이 사라진 공간은 공허하기만 하다.

이어진 다리도, 너른 들판도, 모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음을 내보였다. 아비의 손이 발발 떨렸다.

“이…… 이 망할 계집이!”

그는 빠르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히론의 움직임이 먼저였다. 히론은 지팡이를 몸체로 감싸며 그의 손까지 옭아맸다.

“카리나!”

“아, 그 입도 막아 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해 주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론이 움직였다.

그는 아버지의 입안으로 몸을 쑤셔넣으며 그의 목을 틀어막았다.

우악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개의치 않았다.

“기억나요? 아버지가 했던 말?”

나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그의 뼈는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면서요.”

이럴 때에는 그에게 살갖이 남아 있지 않은 게 아쉬웠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죽이려고요.”

나는 손을 뻗었다. 내 손에 맺히는 검은 어둠이 정확히 그의 두개골 너머 마나핵을 향했다.

“안녕.”

쾅!

거대한 탑이 무너졌다.

아비가 그토록 자랑하던 샹들리에도 산산이 부서졌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 *

“이게 무슨 일이지?”

“조심해!”

딛고 있던 지반이 흔들리는 탓에, 신관들은 저마다 지탱할 곳을 찾으며 몸을 낮췄다.

흡사 강도 높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격렬한 뒤틀림이었다. 모두들 납작 엎드리며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몇몇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상황을 살폈다.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열을 갖추십시오. 언제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모르니 경계하시고요.”

르네거는 동요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그였지만, 놀랍도록 의연했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전쟁이 지나간 하늘은 맑고 쾌청하기만 했다. 마치 방금 전 있었던 무자비한 살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들은 전쟁 도중 도망간 아포칼리타를 쫓는 중이었다.

아포칼리타의 일원 중 뱀의 여자가 다쳐 추락했고, 피의 남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뒤부터 무너져 버린 진영이었기에 그들을 몰아붙이는 것은 비교적 수월했다.

그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캄바이트의 마법사가 그들의 본거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연합군은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수천 년간 이어 온 숙적을 처단하기 위하여.

하지만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쯤이면 거대한 탑이 보일 것이라 하였으나 탑은커녕 너른 광야만이 하염없이 펼쳐졌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했지만 캄바이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렇다면 대체.’

르네거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은 성검의 주인이었고, 그렇기에 성검이 원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신에 반하는 자들의 피를 묻히는 것.

오늘의 전투로는 성검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기에 턱도 없었다. 성검은 조금 더 많은 양의 피를 원했다.

“어, 어……! 저길 보십시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스러지는 때에 흩날리는 것처럼 커다랗고 탁한 연기였다. 르네거의 눈이 숨을 잃고 커졌다.

저게 대체 무엇인가, 묻기도 전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의 몸이 밀릴 정도의 거센 바람이었다.

모두가 팔로 눈을 가리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그러하지 않았다. 제 얼굴로 흩뿌려지는 바람을 양껏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하늘에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인가. 저걸 사람이라 해도 되나.

새하얀 구름 아래, 새까만 날개가 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새빨간 몸이 있었다.

마치 달이 뜬 밤을 옮겨 온 것처럼 파랗고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날아가던 여자. 그녀는 이내 한 곳에서 날갯짓을 멈췄다. 르네거의 위였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르네거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녹음을 품은 눈이 보였다. 바다를 품은 눈이 그 흔적을 따랐다.

그녀는 다시 날갯짓을 했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나뒹구는 신관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듯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그녀는 그 어떤 것보다도 완전해 보였다.

완전하기 때문에, 악했다.

악하기 때문에, 닿을 수 없었다.

르네거는 사라진 그녀의 흔적을 눈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녀를 다신 만나지 못했다.

3장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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