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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7화 (7/135)

7화

탑에서 도망친 내가 선택한 곳은 대륙의 동쪽, 라템의 구역 중 하나인 작은 마을 쿠히란이다.

적당한 신분을 위장해 적당한 집을 구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단잠에 빠졌다.

삼 일 밤낮을 꼬박 잠으로 보내고 나서야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평온한 하루를 시작했다.

이곳에는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우중충한 창문이 없었다.

걸을 때마다 보이는 마물의 사체도 없었다.

지하 바닥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면 맑은 햇살이 내게 인사했고, 창문을 열면 깨끗한 바람이 날 쓰다듬었으며 문을 나서면 푸르른 들판이 나를 반겼다.

이곳이 좋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아서.

아니, 뭐가 됐든 좋았다. 탑이 아니었으니까. 그 끔찍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찬란한 햇살이 뺨을 간지럽혔다.

[밖으로 나오니 게으름이 많아졌구나.]

히론의 말이었다.

창틀에 앉아 일광욕을 하고 있던 그는 내게 목을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그렇게 나태하게 구니 힘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다! 그 목을 치료할 생각부터 해야지!]

“또 잔소리.”

나는 손을 저으며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거울을 살폈다.

목에 감아 둔 천은 밤새 축축해져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천을 풀었다. 그러자 피가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빠르게 힘을 주입했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일격을 날렸다.

그는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맨서였기에, 그의 힘에는 끈질긴 독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내 목에 남긴 상처는 치료되지 않았다.

살은 붙지 않았다. 지혈도 되지 않았다. 내가 손을 떼면 주르륵 피가 흘렀다.

그래서 나는 임시방편으로 손가락 마디 굵기의 검은 천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걸로 상처를 감았다.

마치 목줄을 한 것처럼 보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러지 않으면 피가 줄줄 흘러 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런 처치는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천을 갈아 주어야 했고, 매 순간 힘을 꺼내 상처를 누르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전보다 약해졌다.

늙은 리치 주제에.

상처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났지만 아버지는 죽은 지 오래였다.

그의 뼈를 박살 내고 마나핵까지 삼켜 버렸으니 부활은커녕 영혼조차 남아 있지 않으리라.

난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복수를 다 했다고 생각하며, 애써 상처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레피오스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떠냐?]

“싫어.”

히론의 치근거리는 말에 단호히 대답했다.

내 말에 더 화가 났는지, 그는 쐑쐑 숨을 몰아쉬며 혀를 날름거렸다.

[아니, 그놈의 의술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지 않느냐. 한데 대체 왜 거부하는 것이냐?]

“레피오스 님을 만났다가 아포칼리타까지 이야기가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아무리 그래도!]

“됐어. 그리고 이 상처 덕분에 새로운 힘도 얻었잖아.”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시꺼먼 힘이 둥글게 피어올랐다. 아버지의 힘이었던, 네크로맨서의 능력이다.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앙상한 해골에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언데드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쐐액.

히론의 검은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그러나 언데드는 히론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곤 내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침대로 다가갔다. 자리를 정리하며 이불을 창문으로 가져가 팡팡 털었다.

오랜 시간 호텔에 종사한 베테랑 호텔리어 같은 손놀림이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해골 메이드였다.

[……언데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너밖에 없을 것이다.]

“왜, 효율적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며, 걸려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또 나가려는 셈이냐?]

응. 난 외투를 입으며 대답했다.

히론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탑을 나온 지도 어언 3년이 되어 간다.

이쯤 되면 아포칼리타의 형제들이 힘을 회복했을 텐데, 생각하기 무섭게 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신전을 급습했고, 무자비하게 신관을 죽였다.

또한 데이펜의 성전을 급습했고, 무자비하게 정령사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캄바이트의 탑까지 급습해 마법사들을 죽였다.

그들이 죽인 인간들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수치였다.

1차 신마전쟁의 패배를 딛고 더 강해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연합군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들은 제2차 신마전쟁을 대비하며 군세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 고로 나 역시 나름의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 내 힘은 많이 약해져 있으니, 나를 지켜 줄 것들을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시체들을 이용했다.

아포칼리타가 살육하고 지나간 전쟁터에서 강해 보이는 시체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수하로 삼았다. 그 수가 벌써 수백이 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수치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지.’

두려웠다.

내가 질까 봐 두려웠다.

강해진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까 두려웠다. 또다시 지옥 같은 곳으로 끌려갈까 두려웠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지켜야 했다. 더 이상의 불행은 겪고 싶지 않았다.

“가자. 출근 전에 다녀와야 하니까.”

[네가 그런 곳에서 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내게 마음에 드는 게 있긴 해?”

나는 웃으며 히론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탐탁잖은 듯 아가리를 크게 벌리다, 이내 혀를 집어넣으며 내 손에 올라탔다.

[마물이 먹고 싶다.]

“구해다 줄게.”

[싱싱한 놈으로.]

히론이 내 목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나는 집을 나섰다.

여전히 해맑은 햇볕이 나를 반겨 주었다. 살을 감싸는 바람이 포근했다.

* * *

폐허의 한 가운데에는 깃발이 꽂혀 있다.

악마의 추상화가 그려진 깃발로써, 적혀 있는 뜻은 간단했다.

[아포칼리타의 이름으로.]

이, 름, 으, 로.

눈살을 찌푸렸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제는 괜찮을 줄로만 알았으나, 아닌 모양이다. 저 깃발을 볼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니 말이다.

손을 뻗었다.

시체 위를 누비고 있는 검은 마기와 똑같은 것이 손끝에 맺혔다.

펑!

검은 불꽃은 깃발에 명중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어둠으로 빨아들이는 불길은 깃발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난 그제야 조소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언데드들이 덜컹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턱뼈를 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괜찮은 시체들 좀 찾아봐.”

명령을 받은 언데드들은 덜그럭거리며 무너진 신전 잔해를 뒤적거렸다.

난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평평한 돌덩이 위에 몸을 앉혔다.

[고약하군.]

내 허벅지로 내려온 히론은 다소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정경은 고약했다.

그저 죽었다, 고 말하기 서운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런 비인도적인 일을 할 아포칼리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자일의 짓인가?]

“응.”

나는 땅에 남아 있는 새빨간 핏자국들을 보며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도 검게 변색되지 않는 피는 자일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절로 미간이 좁혀진다.

자일은 뱀파이어의 자식이자, 가고일의 피를 투여받은 실험체였다.

애초에 돌로 만들어진 가고일의 피를 받은 자일이었으니, 그에게는 내 힘이 먹히지 않았다.

나뿐인가. 신관들의 성력도, 정령사들의 힘도, 마법사들의 마법도 그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의 힘이 닿기 전에 돌로 변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므로.

까닭으로 자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그가 곧 아포칼리타를 이어 가리라.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히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똬리를 튼 채 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일전에도 아포칼리타가 패배할 것이라 예언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어찌 생각하느냔 뜻이다.]

히론은 내게 예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원작에서 보았던 내용을 읊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에게 모든 걸 다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그의 착각을 내버려 두었다.

[이번에도 패배하는가?]

“아니.”

나는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아포칼리타가 이길 거야.”

내 말에 히론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는 혀를 집어넣으며 고개를 세웠다.

[네 아비가 없는데도? 그런데도 이긴단 말이냐?]

원작에서도 2차 신마 전쟁 때 아버지는 없었는걸.

나는 조소했다.

원작에서 역시, 아버지는 죽는다. 바로 자일의 손에 의해서.

이러나저러나 죽을 것, 나는 시기를 조금 당겨 준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일의 손에 네크로맨서의 능력이 들어가는 걸 원치 않기도 했고.

나는 생각하며 히론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어차피 아포칼리타는 패배할 거야.”

원작에서, 아포칼리타는 멸문당한다. 아포칼리타는 원작의 주인공들이 헤쳐 나가야 하는 갈등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모름지기 주인공들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겠는가.

“이 세계는 우리의 것이 아니거든.”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랐다.

아포칼리타가 멸망해 흔적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죽은 형제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고로 내가 어쭙잖게 원작에 개입해 아포칼리타와 대적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숨어 살다 보면, 알아서 아포칼리타는 무너지고 행복한 세상이 올 테니까.

몸을 일으켰다.

언데드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썩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걸어가며 점점이 생각을 이어 갔다.

이제까지 원작의 내용이 크게 비틀리지 않았다.

아포칼리타의 탑이 무너지고 아버지가 죽는 것이 조금 일찍 당겨지긴 했지만, 어차피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니니 이 정도면 넘어갈 수 있을 만한 비틀림이었다.

그러니, 나는 조용히 살며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런데.

나는 신전 잔해에 깔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놈이 왜 여기 있어?”

난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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