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헉!”
르네거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더듬더듬 제 몸을 만진다.
그는 손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마디마디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지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찬란한 백금발은 빛을 잃지 않았다. 되레 더 화려한 색을 뿜어낼 뿐.
피를 쏟아 한층 더 창백해진 피부는 그러한 머리칼과 너무도 잘 어우러졌다.
혈색이 도는 붉은 입술이 그의 숨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살았나.”
그는 텅 빈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죽음의 기운이 흐리게 남아 있는 허무한 숨이 새어 나왔다.
살아 있다 한들, 다행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패배했으므로.
아포칼리타에게, 무참하게 짓밟혔으므로.
쿠히란의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기이한 기운이 퍼졌다.
그 검고 탁한 기운은 아포칼리타의 것이었기 때문에, 르네거를 포함한 신관들이 빠르게 공격을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피의 남자. 그의 힘은 모두의 예상보다 끔찍했다.
그가 한 번 바람을 일으키면 백 명의 인간이 쓰러졌다.
그가 한 번 발을 구르면 백 명의 인간이 무너졌다.
그의 손짓에 바람이 불었고, 발짓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가 날아가는 곳곳마다 피가 흩뿌려졌다. 그의 핏방울을 맞으면 살이 썩어 들었고, 몸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끊임없이 싸웠다.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이길 수 없었다.
『버텨라!』
성검의 전음이 들려왔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밀려오는 불길을 막는 일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쓰러진 그의 위로 불길이 밀려왔다. 르네거는 그대로 추락했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죽어 마땅하다 생각했다.
이런 약해 빠진 놈이 성검의 주인이라니. 자책하고 책망했다. 더 강한 이에게 성검이 넘어가야 함이 옳았다.
내가 죽고 나면, 그리될 테지.
르네거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죽기를 바랐으나 살아 있다. 그렇기에 무상할 줄 알았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올라왔다. 감사함이 솟구쳤다.
신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내던져야 하는 신관이건만, 그는 오롯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기쁨을 억누르며 자책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감히 살아 있는 사실에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평범한 저택 같았다. 단출한 살림살이에 곳곳이 살펴보아도 이렇다 할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주민 중 누군가가 자신을 이곳으로 옮겨 치료해 준 것이리라. 르네거는 제 몸에 얼기설기 감싸인 붕대를 느끼며 생각했다.
『정신이 들었느냐?』
성검의 전음이 들려왔다. 르네거는 빠르게 몸을 틀었다. 성검은 침대 헤더 옆에 고이 놓여 있었다.
“예. 일어났습니다.”
『나약한 것. 그깟 흑마법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다니.』
죽기 직전까지 싸우다 쓰러진 르네거였으나, 성검은 무심했다.
방금까지 사지를 오갔던 이에게 하는 말이라 하기엔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이 어딘 줄은 아느냐?』
“저를 구해 준 은인의 집이 아닙니까?”
르네거는 재차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쯧, 성검의 혀를 차는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둔한 놈.』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려는 찰나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르네거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으며 성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들어온 건 작은 고양이였다.
-야옹!
간드러지는 음성을 내는 고양이는 폴짝 뛰어 르네거의 침대 위로 올라 왔다. 갸르릉거리며 그에게 얼굴을 비빈다.
평소 동물을 좋아하는 르네거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언데드.”
뼈만 남은 고양이였으니까.
르네거는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언데드를 향해 곧장 성검을 겨눈다.
『아서라. 널 공격할 이는 아니다.』
성검의 전음은 르네거의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켜 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사방으로 흔들렸다.
『이곳에서 아포칼리타의 냄새가 난다.』
전음을 듣자마자, 르네거의 숨이 가팔라졌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호흡이 가팔라진 탓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이러한 르네거의 동요를 충분히 느꼈음에도, 성검은 그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성검에게 위로를 바랄 수 없었다.
성검은 신의 것. 신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으니까.
『아포칼리타를 죽여라.』
성검의 몸체에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르네거의 남은 생명을 바닥까지 긁어모은 성검은 그에게 명령했다.
『그것이 너의 숙명이다.』
* * *
-그들이 연합군을 공격하는 게, 마치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대.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나.
나는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헝클었다.
기껏 묶은 머리칼이 풀려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왜 이렇게 일찍 알았지.”
예상대로라면 적어도 두 달의 시간이 있었다.
그들이 연합군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탑을 세울 때까지의 시간이 딱 두 달이었다는 말이다.
원작에서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자일인가?
아니, 샐러딘인가?
설마, 루나일까?
아니면 모두 다?
눈을 찡그렸다. 두통이 찾아왔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다 못해 폭발할 정도였다.
다름 아닌 아포칼리타였으니까.
그렇기에 도저히 이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아포칼리타의 형제들은 나와 전혀 다른 부류였다.
나는 항상 우리의 사명에 의문을 가졌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고, 그저 살육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유를 찾았으나 그들은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진 실험체였으니까.
-너는 내가 죽음의 강에서 건져 올려 준 꽃이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비슷한 말을 형제들에게 하곤 했다.
너희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라고, 바로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라고, 그러니 나의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그들은 그런 말에 순응했다. 순응해 아비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아비의 노여움은 곧 자신의 노여움이었고, 아비의 좌절은 곧 자신의 좌절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마치 아버지와 한 몸인 것처럼.
그러니 그런 아비를 죽이고 도망친 나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까.
특히나 루나는 아버지를 유독 따랐으므로, 나를 보자마자 찢어 죽이겠다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아, 골치야.’
그냥 산중으로 들어가 동굴에 처박혀 있어야 하나.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발을 재우쳤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해 보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목을 더듬었다. 상처를 감고 있는 검은 천은 축축하기만 했다. 피가 배어 나온 게 분명했다.
이 부상 때문에 본래의 힘을 낼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은 수의 군단을 만들어야 해.’
그들이 공격해 와도, 적어도 도망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정 안 되면 다른 수가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일단은 내가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게 중요했다.
내일은 쉰다고 말을 해 놓았으니 멀리까지 나가 봐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문을 열어젖혔다.
“…….”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집이 유달리 컴컴했다. 아무리 저녁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의 어둠이 드리워질 수는 없을 텐데.
컴컴했고, 그렇기에 고요했으며 까닭으로 을씨년스러웠다.
나를 반기던 고양이도, 내게 잔소리를 퍼부을 히론도 없었다.
나는 빠르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날아온 검기를 따라 눈을 돌렸다.
“……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마 했던 대로, 그 인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해 간신히 생명을 붙여 놓은 인간이.
“당신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포칼리타의 일원이 아닙니까.”
청명한 목소리였다. 사내라는 성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청아했다.
그래서 그와 매우 잘 어우러졌다. 신실한 성기사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그에게.
“그런데?”
그가 이를 바득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검을 들어 검 끝을 내게 겨눴다.
“나는 라템의 기사.”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과 같은 하늘 아래에 설 수 없는 운명.”
그의 검날이 새파랗게 빛났다. 차오른 검기가 그의 검날을 더 두껍게 만들어 주었다.
“당신을 살려 둘 수 없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내게로 뛰어왔다. 그의 새파란 검기가 내 어깨를 스쳐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쿵!
벽이 무너졌다. 파란 불꽃이 넘실거렸다. 목재로 만든 벽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침에 청소했는데.
“이건 피하지 못할 겁니다.”
쾅!
그는 바닥에 검을 꽂았다. 즉시 지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치듯 일렁이던 바닥은 이내 내게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가뿐히 날아올라 그 공격을 피했다. 그렇지만 내가 무사하다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쩌적,
바닥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아. 얼마 전에 수리한 건데.
확 죽여 버릴까,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건 안 되겠지. 그럴 거였으면 진즉 이놈을 무시하고 지나쳤을 테니까.
“하지만 짜증이 나니까…….”
나는 그를 향해 보란 듯이 입술을 비틀었다.
“죽기 전까지만 놀아 줄게.”
칼을 들이밀 상대를 잘못 골랐단다, 아가야.
기다랗게 만든 손톱을 들어 그의 목덜미를 조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