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0화 (10/135)

10화

챙!

그의 검이 내 팔을 노렸다. 나는 손톱을 세워 그의 검을 막았다. 이번에도 역시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실력의 사내였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더니, 그 이름에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

나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검날을 꽉 붙잡았다.

“윽……!”

그는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하기야, 제 가문의 힘인 라템의 빛은 아포칼리타와 상극이니 내가 이렇게 검기를 쥐는 게 놀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검을 놓아주지 않았다. 더욱더 세게 움켜쥐며, 내 피를 흘렸다. 파란 검기가 천천히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름 모를 인간아.”

반대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를 죽이고 싶었니?”

내 손톱이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아쉽게 됐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고 있는 그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하지만 그를 봐줄 수는 없었다.

“너는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나를 해칠 수 없단다.”

콰앙!

땅에서 올라온 언데드가 그의 안면을 휘갈겼다.

“쿨럭……!”

그의 몸이 나뒹굴었다. 피가 섞인 기침을 뱉으며 몸을 웅크린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쓰러지지는 않는다. 검을 쥐고 일어날 뿐이다.

저렇게 몸이 엉망인데도 달려들 수 있다니. 정신 상태가 궁금했다.

대체 신이 뭐라고 저렇게까지 자신을 내던지는 걸까. 신이 대체 무엇을 해 주었다고.

어쩌면 아포칼리타나 저들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렇게 생각해 봤자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백 번을 환생해도 안 된다면.”

그는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곧추세운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한참은 더 큰 체구의 그였기에, 마치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쾌함이 올라왔다.

“백한 번 환생하겠습니다.”

그는 빠르게 도약했다.

내 피에 닿은 터라 검기가 무뎌지긴 했지만, 라템의 기운은 쉬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새파란 검기를 뿜어내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내가 소환한 언데드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쿠웅!

그는 검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곳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바닥은 결국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빠르게 날개를 펴 공중에 몸을 띄웠다.

“백한 번까지 안 가도 될 것 같군요.”

마지막 남은 언데드까지 무너뜨린 그의 얼굴에는 번듯한 승리감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무너진 바닥과, 바닥 너머로 가라앉아 버린 가구들을 바라볼 뿐.

아…… 젠장. 수리비.

나는 슬슬 화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곱게 놀아 주려 했는데 안 되겠네.”

손을 들어 올렸다.

탁한 녹빛의 기운이 손바닥 안에 차올랐다.

화살처럼 날카로워진 내 기운은 그에게로 쏜살같이 밀려갔다.

윽!

그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정할게.”

나는 그의 팔과 다리에 박혀 있는 내 기운을 회수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넌 천 번을 환생해도 나를 못 이겨.”

뾰족하게 날을 세운 힘을 그의 목덜미 옆에 꽂았다.

급소를 위태롭게 피한 그는 눈을 파르르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음, 이렇게 보니까 정말 잘생기긴 했네. 울 것 같은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하지만 어여쁜 것과 나를 짜증 나게 만든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나는 그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자일의 털끝 하나도 해치지 못한 주제에, 나를 이길 수 있다 생각한 게 바보 같은 거지.”

“이거 놓으……!”

“참 많이 변했네.”

그의 눈매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의 푸르른 눈은 스쳐본다면 일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다.

과거의 아주 옅게 보이던 심해의 어둠이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까맣고, 깊은 어둠.

결코 성스럽지 않은 기운이 그의 두 눈 속에 가득했다. 이런 건 성기사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이상한데.”

내 말에, 그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물감이 뒤섞이듯 색이 뒤틀렸다.

챙!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시나 내게는 먹히지 않는 공격이었다.

나는 그의 검을 다시금 움켜잡았다.

내 아까운 피가 후두둑 떨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출혈이었다.

성검에 내 피를 흘렸다. 힘을 잃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이와 동시에, 탁해졌던 그의 눈동자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푸르고, 맑은 바다의 색.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성검에 홀렸던 거로구나.”

이유를 알 순 없었으나, 묘한 거슬림이 신경을 건드렸다. 그의 머리채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마음에 안 들게.”

내 뒤에 서 있던 언데드가 달려들어 그의 몸을 후려쳤다.

“쿨럭!”

그는 재차 쓰러지며 몸을 뒤틀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애써 모르는 척을 하며 앉혔던 몸을 일으켰다. 언데드 세 마리를 더 일으켰다.

“기절이나 시켜.”

그들은 덜컹거리는 관절을 이용해 빠르게 뛰어가 남자의 몸에 올라탔다.

쾅!

남자는 발악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는 언데드의 몸 위로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쨍그랑!

그가 쥐고 있던 성검이 바닥을 쓸며 내게로 밀려왔다.

발광하던 빛이 차차 가라앉고 있었다. 남자와 연결된 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까닭이리라.

나는 주저 없이 성검을 쥐었다.

『감히 더러운 손을 어디……! 놓아라! 놓아!』

정말 이런 놈들은 하나같이 시끄러웠다.

아이고, 머리 아파라.

* * *

한바탕 뒤집어졌던 집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인간 남자를 포박해 소파에 쓰러뜨려 둔 언데드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청소를 했기 때문이다.

음, 그런데 언데드에게 혼신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은 걸까.

저들은 영혼도 없고 몸도 없는데, 다른 표현이 없을까.

의미 없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나는 소파의 옆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었다. 그리고 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3년 전. 1차 신마전쟁 때.

나는 이 인간을 보았다. 눈을 보았지. 깊은 바다를, 반짝이는 햇살을, 티 없이 맑은 인간의 모습을.

그때에는 마냥 어린 인간처럼 보였는데.

인간들에게는 3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게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기골이 장대한 성인 남자로 성장하게 될 줄이야. 놀랍기도 했다.

“으음…….”

그는 기도를 긁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미간을 깊게 좁힌다.

찌푸려진 눈살은 그가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쉬. 괜찮아.”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 주었다. 뜨거운 체온이 와 닿았다. 차가운 내 손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듯 이질적인 온도가 섞이는 것은 꽤 기분이 좋아지는 접촉이었다.

남자 역시 그러한 듯, 그는 찌푸렸던 미간을 평평하게 펴며 다시금 깊은 잠에 들었다.

나는 손을 거둔 후, 괴고 있던 턱을 들어 올렸다.

확실히 죽기에는 아까운 인간이야.

‘하지만 죽어야 할 테지.’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둔 시선을 애써 갈무리하며 반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이때였다.

[카리나야!]

히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배로 쓸며 빠르게 다가온 히론은 내 다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괜찮은 것이냐?]

그는 내 곳곳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다 피가 넘쳐 엉망이 되어 버린 내 목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새하얀 눈에 분노가 서렸다.

[저 빌어먹을 인간을 지금 당장……!]

“아니야, 히론.”

나는 그런 그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그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듯 쓰다듬어 주었다.

“저 인간의 잘못이 아니야.”

나는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탁자 위에 올려 둔 성검을 바라보았다.

“이 재수 없는 성검 탓이지.”

내 말에 성검이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전음을 외쳤다.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네가 이러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나는 미간을 좁히며 성검을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소리 질렀다간 네 몸에 내 피를 덧씌워 버릴 거야.”

『이, 이……!』

“닥쳐.”

성검은 다시 한번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나의 말대로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바, 쉬이 반항하지 못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아포칼리타인 나는 성력의 끝자락에만 닿아도 녹아내리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말하면 내 끝자락에만 닿아도 성력을 가진 이들은 녹아내린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라템의 가문에 있어, 아포칼리타의 피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러니 라템의 성물인 성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넘기고 손에 턱을 괴었다. 성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나는 라템이다! 라템 님이라고 부르거라!』

“……시끄럽네.”

나는 성검에게 손을 뻗었다.

“정말 부숴 버릴까.”

그의 손잡이를 잡고, 미약하게나마 힘을 불어 넣었다.

성검의 힘과 나의 힘이 충돌해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손끝이 저리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힘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검신의 끝이 조금씩 검게 물들었다.

『그, 그만하거라! 어떻게 부르든 좋다! 그만해 다오!』

성검은 빛을 깜빡이며 외쳤다. 그에 순순히 손을 떼 주었다. 나 역시 조금은 힘에 부쳤으니까.

흘끗 손을 쳐다보니 손끝부터 손바닥 중앙까지 그을음이 이어져 있었다. 눈을 내려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후, 바람을 불자 살이 가루가 돼 흩날렸다.

내가 정말 약해지긴 했구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카리나야.]

성검의 주변을 돌며 혀를 날름거리던 히론의 말이었다.

그는 쐐액 숨을 몰아쉬며 성검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이놈에게서 혼의 냄새가 난다.]

히론의 하얀 비늘이 빳빳하게 서 올랐다.

그는 뾰족한 송곳니 끝에서 독을 뿜으며 노후했다.

[그것도 억울하게 죽어 간 비참한 혼의 냄새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