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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1화 (11/135)

11화

하이브리아 대륙에는 태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주신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으니, 축복은 나의 자식들이 내릴 것이라.

태양의 신은 캄바이트의 일족에게 지팡이를 선물했다. 캄바이트는 만물을 일으키는 태양의 힘을 경배하며 그것을 마력이라 칭하고 지팡이에 힘을 담았다.

전쟁의 여신은 데이펜 일족에게 반지를 선물했다. 데이펜은 반지에 파괴의 힘을 담고 그 힘을 이용해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바다의 신은 라템 일족에게 검을 선물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었으므로, 라템은 삶을 예찬하며 인간의 생명력을 검에 담았다.

그러기를 수천 년이었다.

* * *

[이놈에게서 혼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억울하게 죽어 간 비참한 혼의 냄새가.]

흐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내 힘을 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던 성검은 그제야 빽 소리쳤다.

『어, 억울하게 죽다니! 신의 명을 받들기 위해 죽은 이들이 어찌 억울하단 말이냐!』

그는 몸체를 파르르 떨며 더 크게 전음했다.

『그들은 모두 다 나의 재료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강해졌지. 하여 너희 같은 악랄한 어둠의 존재들을 한 번에 베어 낼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면전에 있는데 악랄하다는 말을 들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부숴 버릴까, 생각하던 나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 가루가 되어 흩날린 손바닥 살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리며, 성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껏 성검의 주인들이 절명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돌이켜 보면, 성검의 주인은 십 년 주기로 한 번씩 바뀌곤 했다.

모두 다 아포칼리타의 싸움에서 패배해 죽은 터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만, 이렇게 되면 말이 좀 달랐다.

“그래서 일부러 아포칼리타에게 패배하는 거니?”

『…….』

“남아 있는 생명력을 끝까지 먹어 치우려고?”

성검은 침묵했다.

이것 봐라.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이야, 이거 우리보다 못됐네.”

[쓰레기 같은 놈이군.]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있을 뿐.

툭, 툭.

탁자를 손끝으로 쳤다.

이건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 아닌가. 원작에선 신화와 같은 배경 지식은 거의 설명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째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니?”

나는 다시 성검에게로 눈을 돌렸다.

“지금 네 주인. 얼마나 살 수 있는 건데?”

성검은 다시금 침묵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검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불어 넣었다.

『말하겠다! 한다고!』

성검을 빛을 쏘며 발광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손을 돌렸다.

『……그러니까, 죽었어야 할 놈을 네가 살려 놓은 것이다.』

“곧 죽는다는 이야기구나.”

나는 중얼거리며 숙였던 몸을 폈다. 다리를 꼬며 발끝을 까딱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가긍한 성기사를.

진즉 죽었어야 하는 놈이다.

“나쁘지 않은데?”

어차피 죽을 운명, 아니, 죽어야만 하는 운명.

상황은 내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 * *

“…….”

르네거는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꿈을 꿨다.

성검의 주인이 된 이후, 처음 겪었던 아포칼리타와의 전쟁 당시를.

그들은 감히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의 끔찍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괴물이라 할 수는 없었다.

괴물이라 하기엔 그들의 고상한 날갯짓이 아름다웠고 매혹적인 손짓이 찬란했으며 초연한 얼굴이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괴물이나 괴물이 아닌 것들.

인간과 흡사하나 인간이 아닌 것들.

그 압도적인 존재 앞에, 르네거는 두려움에 휩싸여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때에.

그는 뱀의 여자를 보았다.

탑에서부터 날아올라 비상하던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던 그녀를, 세월을 초월한 날갯짓으로 세상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그녀를.

그 뒤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그들을 보지 못했다.

패배한 아포칼리타는 대륙 곳곳에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꾼 꿈속에서는 그녀가 존재했다.

실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르네거와 마주 서 있었다.

그녀는 르네거를 보며 입을 움직였다. 무어라 말을 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귀를 기울여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증발하는 목소리는 애달팠으며, 사라지는 뜻은 서럽기만 했다.

잡고 싶다.

하지만 잡을 수 없다.

이건, 꿈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르네거는 잠에서 깨어났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르네거는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손이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직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아포칼리타의 마수에 붙잡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젠장……!”

그는 빠르게 고개를 틀었다.

혹여 아포칼리타의 실험실에라도 끌려온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있던 곳 그대로였다. 그저 평범한 가정집. 그뿐이었다.

“벌써 일어났네?”

야트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거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고, 이윽고 누군가를 찾을 수 있었다.

까마득한 어둠을 품은 머리칼이 보였다. 마치 검푸른 장막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르네거의 시선을 느낀 양, 여자는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연녹색 눈동자가 르네거를 향했다.

마치 대지를 옮겨 온 것처럼 푸르고 생명이 넘치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찢어진 동공은 검기만 했다. 흡사 지옥의 그것처럼.

생명과 죽음.

모순적인 것이 여자의 눈에 담겨 있었다.

순간, 등불이 흔들렸다.

바람에 의해 굽이치는 빛발은 여자의 모습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옅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품고 있는 흔적만 큼은 강렬했다.

그래서, 르네거는 알 수 있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녀’라는 사실을.

* * *

“……카리나 아포칼리타.”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뱀처럼 가늘어진 동공으로 르네거를 응시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르네거는 침묵을 유지했다.

아직 꿈에 빠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꿈을 현실로 끄집어낸 것인가. 잘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먹을 바르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눌렀다. 통증을 느끼며 현실임을 체감한다.

“당신을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르네거는 손에 힘을 풀며 대답했다. 카리나의 가늘어진 두 눈을 바라본다.

“내가 많이 유명하긴 한가 봐. 성검의 주인께서 친히 내 이름을 불러 주다니.”

그녀의 비꼬는 말에도 르네거는 묵묵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부상 정도가 심해 걷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그는 걸음에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신은 눈을 뜨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으며,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한데도, 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

이 인과를 르네거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카리나와 마주 선 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꿈속의 그녀와 다름이 없는 얼굴을 바라본다.

“왜 저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네 이름은 뭐야?”

“왜 저를 살려 둔 것입니까?”

“너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좀 억울하잖아.”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래. 이름 모를 인간아. 네 이름을 말해 주련?”

뱅뱅 도는 대화에,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붉은 입술을 벌려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르네거 라템.”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에 르네거는 더욱 신랄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의 음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귓바퀴를 부드럽게 감싸며 들어오는 음성은 퍽 나긋나긋했다.

듣고 있자면 계시를 받고 있는 듯한 성스러움까지 느껴졌다. 정말 뼛속까지 성기사인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더 흥미가 이는 것이겠지만.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는 묶인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카리나의 팔을 붙잡았다.

분명 부상으로 몸이 닳아 있을 텐데도 그의 힘은 거세기만 했다.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비견하지 못한 터. 그녀는 르네거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녀는 사붓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르네거의 턱을 쓰다듬었다.

“왜? 내가 너무 강해서 놀랐니?”

그녀는 르네거의 뒤로 다가갔다.

“말했잖아.”

그의 손목에는 포박한 줄에 얽매인 탓에 생긴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그 붉은 흔적 위에 손을 얹어 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손끝을 통해 전달되었다.

움찔, 그가 손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카리나는 그의 손바닥을 얕게 긁으며 웃었다.

“너는 날 이기지 못한다고.”

그는 대답 대신 주먹을 바르쥐었다. 퍼런 핏줄이 올라오는 팔이 보였다.

카리나는 그런 팔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의 손을 포박하고 있는 줄을 풀어 주었다.

줄을 끊은 카리나는 르네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맑은 눈이었다. 역시 성검에 홀린 탓에 탁했던 것이리라.

그의 눈은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새파란 바다, 청명한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르고, 맑기만 한 기운이었다.

정말 탐이 날 만큼.

“내 목적은 간단해.”

카리나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널 치료하고 네 몸이 낫는 대로 내보내는 것.”

하. 르네거는 입꼬리를 틀며 헛숨을 뱉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한 건 아니겠지요.”

“어머, 믿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르네거는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새하얀 얼굴과 대조되는 붉은색이 퍽 매혹적이라, 카리나는 그저 그를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치고는 꽤 잘생긴 얼굴이었으니까.

그는 카리나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뒤, 식탁에 손을 얹으며 눈매를 굳힌다.

“차라리 지금 저를 죽이십시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휙!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는 제 목덜미에 아슬아슬하게 닿은 나이프를 느낄 수 있었다. 헛웃음을 뱉었다.

“날 길동무로 삼으려고?”

카리나는 그의 팔을 세게 후려쳤다. 르네거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바득 이를 깨문다.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울까. 지금 너를 살려 둔 것만 보더라도 날 믿을 수 있지 않겠니? 난 정말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는데 말이야.”

“당신은 아포칼리타이자, 저의 숙적이지 않습니까.”

그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저를 죽이십시오. 아포칼리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끔찍한 일이니까.”

비죽 비웃음을 흘린 카리나는 그의 날렵한 턱선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뜨거운 숨이 불규칙적으로 닿았다.

“네가 모르는 게 있구나.”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3년 전 아포칼리타의 탑이 무너졌지.”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검은 머리칼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누가 무너뜨렸을까?”

카리나의 눈길이 르네거를 좇았다.

“나는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였어.”

르네거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난 더 이상 아포칼리타가 아니야.”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가 넝쿨처럼 느껴졌다. 손이 닿으면 피가 터질 정도로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있는 넝쿨.

“배신자지.”

어쩌면 자신은 이미 저 넝쿨 안에 갇혀 버린 게 아닐까.

벗어나려 할수록 꼼짝할 수 없게 되는, 그러한 넝쿨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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