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쏴아아.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셨다.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빗줄기는 잔인하게도 많은 양의 비를 쏟아 냈다.
푸르른 산 위에도, 녹음의 대지에도, 인간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마탑에도, 산처럼 쌓인 시체 위에도 쏟아지고 있는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쾅!
폭발이 일어났다. 피어오른 불길은 몸집을 불렸다.
뻐끔거리는 아가리 위에는 빗줄기가 내려앉았지만, 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 불은 순백의 불. 지옥의 불길을 옮겨 온 것.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이므로.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밀려온 바람은 불길의 손을 잡고 멀리멀리 나아갔다.
불의 흐름이 길어진다. 후퇴를 모르고 전진하는 장군처럼, 불은 자신의 세력을 넓혀 갔다.
콰과광!
높디높았던 마탑이 무너졌다.
간신히 살아 있던 인간들은 잔해에 깔려 즉사했다.
이곳에는 더 이상의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었다.
“여기도 없어?”
허공에 떠 사방을 내려다보던 샐러딘은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헝클었다.
투명한 별처럼 하얗게 빛나는 은발이 그의 손길에 의해 거칠게 흩날렸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쾅!
불길은 마탑의 잔해에 명중했다. 탑의 흔적을 재료 삼아 불타오르는 불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샐러딘은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쥐었다.
아포칼리타의 탑이 무너진 지도 3년이 지났다.
이 시간 동안, 샐러딘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내가 더 크면 찾아갈게.
카리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성장해야지만 그녀를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기를 2년. 샐러딘은 드디어 2차 성장을 마칠 수 있었다.
마물의 흔적을 숨길 수 있게 되었고, 지옥의 불길을 그 누구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었을 뿐더러 자일에게 덤벼들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그 즉시 카리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사실, 카리나가 탑을 떠나려 했던 것쯤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녀는 탑의 일에 무심했고, 심드렁했으며 때때로 혐오하는 기색을 내비치곤 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카리나가 신마전쟁 때 일부러 인간의 공격에 맞은 일도 눈감아 주었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방해할 자격이 없노라고.
그때는 그녀가 어디로 도망친다 해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녀를 보내 주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한 해가 지나도록 찾아 헤맸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그녀와 만나지 못할 줄이야.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무심한 듯 따스한 목소리, 차갑고도 다정한 손길, 냉소적인 미소조차 아름답던 얼굴.
모든 것들이 다 그리웠다.
그녀의 품에 안겨 체취를 맡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정말, 잔인하게도.
“여기 있었군.”
샐러딘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자일이 있었다.
“너는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냐? 재수 없게.”
어릴 적 샐러딘은 자일을 두려워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자일을 당장 이기지는 못해도 곤란하게 만들 정도는 된다. 그리 생각한 샐러딘은 자일을 향해 가감 없는 분노를 표출했다.
“닥쳐. 너만 보면 먹은 게 죄다 올라올 것 같으니까.”
“카리나의 흔적을 찾았는가?”
그러나 자일은 그런 샐러딘의 얼굴은 조금도 살피지 않았다. 그저 샐러딘이 만들어 놓은 엉망이 된 지상을 내려다볼 뿐.
“내가 말해 줄 것 같아?”
자일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샐러딘을 바라본다. 샐러딘의 새까만 눈 속에 담겨 있는, 들끓는 혐오를 바라본다.
자일의 붉은 눈에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공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빛만 남아 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 보았자 수확이 없을 것이다.”
“헛소리 말고 꺼져.”
“…….”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상한 눈으로 샐러딘을 바라보기만 할 뿐.
샐러딘은 그런 그의 침묵이 싫었다.
항상 고고한 척, 우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꼴이 싫었다.
샐러딘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계속 짜증 나게 굴 거면 나와 한판 붙어 보든……!”
자일은 그런 샐러딘을 무시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쏴아아.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그러나 자연의 비가 아니었다.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피를 품고 있었다.
비를 맞은 시체들은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패한 시체에서 악취가 올라왔다. 샐러딘은 눈을 찌푸렸다.
“작은 생명들이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포식자가 있으니.”
자일은 그런 샐러딘을 주시하며 말했다.
“뱀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
그곳에 카리나가 있을 것이라.
그들은 빠르게 갈라졌다.
* * *
“…….”
르네거는 제 팔에 붕대를 감아 주는 언데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메이드 차림을 하고 있는 언데드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런 언데드가 자신을 치료해 주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다잡으며, 제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꿈속의 그녀처럼, 지금의 카리나 역시 밤을 닮아 있었다. 지독하게도 깊은 밤을.
“……그리고.”
르네거는 언데드에게 다른 쪽 팔을 넘겨 주며 말했다.
“제 검은 어디 있습니까?”
그의 말에 카리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안전한 곳에.”
“이곳에 안전한 장소가 있기는 합니까?”
그의 날 선 목소리에, 카리나는 작게 웃었다. 읽던 책을 덮는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실까?”
그녀는 읽던 책을 덮고 르네거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치료해 주기 위해 데려왔고, 치료 후에 내보내 주겠다고 했지. 나갈 때 성검도 되돌려줄 거야.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잘해 줄 텐데. 성기사님께서는 내가 아포칼리타다웠으면 하시나?”
르네거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카리나의 말이 진실이라면, 자신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해야 함이 맞았다.
하나 그녀는 아포칼리타였다. 지난날 수천, 수만의 인간을 학살한 아포칼리타.
믿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 놈들이란 저런 식이지.]
르네거의 눈매가 사붓 굳었다.
난데없이 기어온 뱀이 사람처럼 말을 했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뱀을 주시했다.
“내 마물 친구야. 히론이라고 해.”
[너는 히론 님이라 부르거라.]
카리나는 히론을 손에 감으며 말했다.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함께 사는 동물들도 보일 거야. 놀라지는 마. 아, 물론 고양이는 네가 이미 괴롭혔지만 말이야.”
“……그건.”
“됐어. 어차피 성검에 홀려서 한 짓일 테니까.”
카리나의 말이 맞았다.
르네거는 이곳에 와 성검을 쥐었던 때부터 다시 깨어날 때까지의 기억이 희미했다.
이러한 기억 상실은 성검으로 전투를 치를 때에 항시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억만 없을 뿐 모든 것은 르네거 자신이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후 르네거는 기억을 잃은 상태로 숱한 칭송과 숱한 비난을 한꺼번에 받아야만 했다.
하여 때때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건만.
이를 바로 알아차리다니.
르네거는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성검이 워낙 못된 놈이잖니.”
그런 르네거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카리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성검에 휘둘리다 보면 너까지 피해를 입을 거야. 조심하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말…….”
-야옹!
이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성큼 들어온 고양이는 폴짝 뛰어 카리나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갸르릉거리며 그녀의 손에 머리를 댄다.
“누가 무자비하게 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되돌릴 수 있는 정도니까. 그렇지, 요루야?”
카리나는 뼈만 남은 고양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성검에 휘둘리다 보면 피해를 입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르네거는 제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는 고양이를 애써 모른 척하며 물었다.
“나에게 그런 걸 물어봐도 돼?”
카리나는 피식 조소했다.
“아니면 나를 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야?”
르네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리나와 몇 번 말을 주고받다 보니, 그녀의 대화 방식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들으면 화제를 틀었다. 마치 회피하는 것처럼.
그것이 마치 잡을 수 있지만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져, 르네거는 끝없는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붕대를 감은 손을 움켜쥐었다.
“왜 아포칼리타의 탑을 무너뜨린 것입니까?”
“글쎄.”
고양이를 내려놓은 카리나는 두 다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릎에 뺨을 대고, 르네거를 느슨하게 바라보았다.
“지겨워서?”
카리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낮게 웃었다.
“자유롭고 싶었거든. 더 이상 그 탑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그러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제집의 정경을 보라는 듯.
“자, 난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단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별다를 게 없는 가정집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커다란 소파와 책이 빼곡한 책장이 놓여 있고, 왼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면으로는 뒤 정원으로 나가는 입구가, 오른쪽으로는 작지만 부족함이 없는 식당이 있었다.
정말, 별다를 것 없는 집이었다. 아포칼리타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렇기에,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제가 본 아포칼리타는 살육에 미쳐 있는 괴물이었으므로, 이러한 평온함과는 결단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저는 절대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
“당신은 제 눈앞에서 수백의 인간을 학살한 괴물이니까요.”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 일이 있었나?”
[있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말해 줘야지, 히론.”
그녀는 히론의 코끝을 툭 치며 말했다. 다시 르네거를 바라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현재에 영향을 주면 안 되지.”
르네거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바득 이를 갈았다.
“그 과거에 죽어 버린 인간들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
“너희가 그렇게 믿는 신이 책임져 주겠지.”
“당신들은 신을 배반하는 존재이면서, 인간의 구원을 신에게 맡기는군요.”
“나는 딱히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아서. 그런 귀찮은 일은 신이 해야 하는 게 맞지.”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래. 난 아포칼리타였어.”
카리나는 무릎에 대었던 얼굴을 떼어 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르네거와 보다 가까이 마주한다.
“나는 살고자 죽인 거야.”
“…….”
“살고자 행한 일인데 그걸 죄라 하면, 내 목숨은 누가 책임져 주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달콤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게 나를 믿으라고 한 적 없어.”
르네거에게 천천히 다가온 카리나는 방금 전 치료를 마친 그의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믿음이란 알량해서, 말로 하는 믿음은 별 쓸모가 없거든.”
그녀는 르네거의 눈꺼풀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감촉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굳혔다.
“너는 그저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만 집중하면 돼.”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다는 욕망이 치달았다.
그녀의 차가운 체온을 더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왔다.
“그 후에 내보내 줄 테니, 그때가 되면 나를 믿을 수 있겠지.”
어쩌면 나는 뱀의 말에 홀려 버린 것이 아닐까.
르네거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내려 감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