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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3화 (13/135)

13화

아직 해가 뜨기 전.

밤과 아침의 경계. 하루와 하루의 경계.

마치 죽음과 삶의 경계인 것만 같아 좋았다.

새까만 날개를 활짝 펼쳤다. 높이 날아올랐다. 새벽 안개를 뚫고 끊임없이 날았다.

히론은 집에 남겨 두고 왔다.

르네거가 도망칠 수 없게 감시를 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결계를 쳐 두기는 했지만 그러해도 히론이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아무리 히론과 상극의 존재라 하지만,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 르네거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르네거 라템.’

사사사건 의심하고 드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나는 그의 앞에서 동료들을 죽인 살인자였으니까.

호의를 보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호감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얌전히 치료만 받고 꺼져 주길 바랄 뿐.

르네거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두어 번만 더 성검을 사용하면 죽어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곁에서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일의 손에 의해 죽어야 했다.

그래야 주인공이 자일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울 테니까.

나는 앞으로의 아포칼리타들이 어느 곳을 공격하고 무너뜨릴지 알고 있다. 자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일이 인간들을 공격할 때에 르네거를 밀어 넣어 두면 알아서 죽게 될 것이다.

잔인하다 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원작의 내용이 틀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아포칼리타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쯧.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비행을 멈췄다. 그리고 불에 타 굳어 있는 나무 위에 가뿐하게 앉았다. 파사삭, 검은 재가 떨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정경은 퍽 스산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치 멸망한 세계를 보는 것처럼 처참한 상태였다.

마탑은 무너졌고, 시체는 즐비했다. 사그라지지 않은 새하얀 불길 주변에는 마물이 득실거렸다.

이건 분명히…….

“샐러딘이네.”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성장하다니, 세월이 괜히 새삼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쩡해 보이는 시체는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뼈만 남아 있어도 그들의 힘을 빼 올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로 도약했다. 아니, 도약하려 했다.

“페넬로피!”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고개를 틀었다.

새하얀 불길 너머, 두 사람이 보였다. 나는 되도록 기척을 숨기며 그들에게 집중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소리를 지르고 있기는 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걱정이 실린 고함이었다.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팔랑거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남자와 여자는 데이펜 가문의 문양인 세계수가 새겨진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열 손가락에는 정령의 힘이 담긴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데이펜의 사람이라는 것인데.

나는 천천히 원작을 되짚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힌. 제발 나를 놔줘.”

붙잡힌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힌, 아힌.

많이 보았던 이름이다…… 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내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힌 데이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와 계약한 자.

주인공인 페넬로피 데이펜이 각성하기 전, 데이펜 가문을 이끌고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더불어…….

‘페넬로피의 네 남자 중 한 명이기도 했지.’

그는 집착 서브남의 포지션을 갖고 있는 이였다.

페넬로피를 위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럼과 동시에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속박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이였다.

지금 드러내는 음성에도 묘한 집념이 묻어 있지 않은가. 틀림없는 그였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페넬로피 데이펜이라는 소리일 텐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오묘한 보라색 머리칼과 자줏빛 눈은 원작에서의 외모 묘사와 똑같았다. 눈에 서려 있는 독기까지도.

아직 각성하기도 전일 텐데 저 정도로 위험한 기운을 띠고 있다니.

확실히, 무서운 인물이었다. 절대 저 여자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기척을 숨겼다.

“제발 그만해. 르네거가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

짐작건대 저들은 르네거의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온 듯싶었다.

하지만 르네거가 쓰러졌던 쿠히란 신전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오라버니가 살아서 캄바이트에 도움을 청하러 왔을지 어떻게 알아!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잖아.”

“그건 모르는 거야!”

아힌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의 은은한 은발이 퇴색되듯 빛을 잃었다.

“페넬로피. 제발 정신 차려.”

그는 페넬로피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르네거는 죽었어.”

아니, 살아 있는데. 난 머리를 긁적였다.

“시체를 찾지 못했다며. 오라버니의 흔적도 없다며!”

당연하지. 내 집에 있으니까.

괜히 무안해져 입을 꾹 다물었다.

“아포칼리타의 피가 닿으면 라템의 인간은 녹아 없어져 버려. 네 눈으로 봤잖아.”

“알고 있어.”

페넬로피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악을 썼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다를 거야.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르네거 오라버니만큼은 그러지 않을 거야.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그렇게 죽어 버릴 사람이 아니니까.”

“제발 현실을 직시해! 르네거 라템은 죽었어! 뼛조각조차 찾지 못하게 녹아 버려서 없어졌다고!”

그의 말은 퍽 잔인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3대 가문 중 아포칼리타와 가장 상성이 안 맞는 건 성력을 사용하는 라템이었다.

언급했듯 그들은 아포칼리타의 피에 닿으면 녹아내렸고, 아포칼리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원작에선 수세에 밀린 라템들이 자결하며 적인 아포칼리타에게 제 피를 콸콸 쏟아 붓는 장면도 나왔었다.

아아, 그 장면을 읽으며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지. 다시 생각해도 잔인한 묘사였다.

“……그래서.”

페넬로피는 띄엄띄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인정하면 뭐가 남는데?”

그녀의 눈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아니, 어쩌면 흔들리는 건 그녀의 눈뿐이 아닐 수 있었다.

몸이 흔들렸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라버니가 녹아버렸다,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인정하면 뭐가 남는데?”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현실을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 하나. 어느 쪽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시체조차 없으면…….”

페넬로피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소리가 희미했기에, 나는 조금 더 귀를 세웠다.

“오라버니가 존재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우리가 기억하고 있잖아.”

페넬로피는 헛웃음을 뱉었다. 조금 커다래진 목소리로 말한다.

“기억하면, 남아 있기라도 해?”

그녀는 이를 꽉 깨물며 말을 이었다.

“시체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가 이 세상에 남기는 게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거잖아. 살아 있었다는 흔적도 없게 되는 거잖아. 정말 그저, 사라지는 거잖아. 없어지는 거잖아.”

페넬로피는 손등으로 코끝을 닦았다.

“그래서 마지막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거야.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아힌은 내뱉던 숨을 씹어 삼켰다.

그의 자줏빛 눈에 불쾌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이해 못 해”

“……이해하려 하지만, 지금도 아포칼리타는 수많은 동료들을 죽이고 있어. 더 큰 피해가 오기 전에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려야지. 르네거도 그걸 바랄 거야.”

페넬로피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열을 품고 있는 숨이 들끓으며 흘러나왔다. 그녀는 홧홧한 시선으로 아힌을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의 입장을 함부로 말하지 마. 넌 그럴 자격 없으니까.”

“페넬로피! 너는 대체……!”

“네가 오라버니를 쿠히란에 보낸 거라는 걸 알아.”

아아, 맞아. 그러했지.

그랬기 때문에 페넬로피가 끝까지 아힌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더더욱 아힌은 집착했고.

나는 턱을 괸 채 그들을 응시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

페넬로피의 깊은 눈매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비빈 후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지금은 네 말을 따라야겠지. ……그래. 지금은.”

페넬로피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러곤 등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가자.”

그들은 이윽고 자리를 떠났다.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보며, 나는 괴고 있던 턱을 떼어 냈다. 어느새 해가 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다음에 어찌 되더라.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르네거의 죽음을 인정한 페넬로피는 드디어 전쟁의 여신의 힘을 받아 데이펜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연합군을 재정비해 아포칼리타와 대응한다.

그런 그들과 가장 먼저 전투를 하게 되는 형제는…….

‘루나.’

아버지를 가장 사랑함과 동시에 나를 가장 싫어하는 루나였다.

그녀는 강했으나, 연합군의 총공세를 당해 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결과로 그 전투에서 루나는 죽게 된다. 그 이후로 아포칼리타와 연합군이 잠깐의 휴전을 맺는다. 비록 얼마 못 가지만.

흐응, 이렇게 생각하니 나름 기분이 좋아졌다. 굳어 있던 다리를 쭉 내밀고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아포칼리타는 차차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수많은 인간이 죽어 나가는 수많은 전투 끝에, 인간들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아포칼리타는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까지 숨죽이며 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인간들이 승리하길 원했다.

지금까지는.

* * *

캄바이트의 마탑에는 꽤 괜찮은 시체들이 있었다.

개중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들도 있었으므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어둠의 주술에 속박했다.

이제 언제든지 그들을 소환해 부려먹을 수 있으리라.

‘한데…….’

이런 고위급 마법사들을 한 번에 죽여 버리다니.

샐러딘이 내 예상보다 더 강하게 성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샐러딘은, 날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아침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별문제 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도 무탈한 하루가 나는 좋았다.

별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차분해질 수 있는지, 새삼스레 느끼는 나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생각을 바꿨다. 들떴던 마음이 일순간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었다. 찢어진 결계가 손끝에 닿았다.

“……히론.”

나는 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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