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4화 (14/135)

14화

“히론!”

나는 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컴컴한 방 곳곳에 빛을 뿌리며 히론을 찾았다.

찢어진 결계는 르네거의 도망을 알려 주었기에, 가장 먼저 걱정되는 건 히론이었다.

그 인간이 어떻게 힘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면 내가 곁에 없는 히론은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히론! 어디 있어!”

하지만 아무리 뒤져 보아도 히론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쿵, 쿵.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손이 떨렸다. 머리가 핑 돌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히론은 나의 태고부터 지금까지, 부모이자 친구처럼 곁을 지켜 준 유일한 생명체다. 내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도 히론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자아를 포기해 버렸으리라.

그러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정말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남은 방으로 뛰어갔다.

“하아…….”

나는 문을 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히론은 똬리를 튼 채 잠에 들어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히론, 일어나.”

나는 그의 몸통을 잡으며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 보래도.”

목소리를 키우자 그제야 히론의 꼬리가 사붓 움직였다.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몸을 쭉 폈다. 새하얀 눈을 굴리며 나를 몽롱하게 바라본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

히론은 괜찮아 보였다.

목소리도 그대로였고, 몸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없었다.

하아.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일찍이라니. 벌써 해가 지는 때야.”

[뭐?]

히론은 빠르게 몸을 세웠다. 그리고 해가 져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이냐니.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그래.]

히론은 꼬리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 인간 놈은 계속 잠에 들어 있었고, 난 배가 고파서 평소처럼 마물을 먹었고.]

“바깥에 놓여 있는 마물을.”

[그렇다. 그것을 먹고 그 뒤에…… 이런.]

히론의 혀가 길쭉하게 뽑혔다.

[그 뒤에 잠에 들어 버렸다.]

그의 음성에 노기가 담겼다.

자신도 알아챈 것이리라. 저가 무언가에 취해 꼼짝없이 잠에 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인간은 어디 있느냐?]

르네거가 눈앞에 있다면 목덜미를 뚫어 버릴 것처럼 흉흉한 음성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내쉬며, 그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부드러운 비늘이 느껴지니 더욱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야 차분함을 되찾았다.

“나도 몰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히론 역시 내 팔을 따라 목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찾아야겠지.”

* * *

『뛰어라!』

성검의 전음이 크게 울렸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나 르네거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앞이 샛노랬지만, 팔과 다리가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달려 나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성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

카리나가 집을 나선 순간, 르네거는 잠에서 깨어났다.

성검의 전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와라.』

그는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성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카리나의 뱀이 보초를 서는 듯 집 안을 배회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어금니 안쪽에 숨겨 두었던 약을 꺼내 뱀의 먹이에 뿌렸다.

인간에게는 즉사에 이를 수 있는 독약이었으나, 저 마물에게는 그저 잠에 취하게 하는 정도이리라.

르네거의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뱀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르네거는 집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온갖 물건들을 꺼내고 던지는 통에 집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성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집을 뒤져 보아도 성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겨둔 걸까.

고민하던 그의 눈에 밝은 빛이 서렸다.

그의 정신과 교감을 하고 있는 성검이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자 빛을 발했다.

르네거는 계단 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창고의 문을 찾아냈다.

문에는 방어의 주술이 걸려 있었으나,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주술을 해제하고 성검을 꺼냈다.

『르네거!』

성검은 전에 없이 반가운 전음으로 소리쳤다. 르네거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뱉으며 성검을 바르쥐었다.

검의 힘이 전달됨과 동시에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항시 그래 왔던 탓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다. 그 계집이 얼마나 나를 괴롭게 했는지……!』

성검은 분을 참지 않고 드러냈다. 파르르 검신을 떨었다.

『그 계집과 무슨 대화를 했느냐?』

“예?”

『계집이 무슨 말을 했느냐는 말이다!』

르네거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카리나의 말을 떠올렸다.

-성검에 휘둘리다 보면 너까지 피해를 입을 거야.

설마, 그 말을 뜻하는 것인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다 하여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르네거는 그녀의 말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했다. 그는 두통이 찾아온 이마를 감싸며 간신히 대답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겠지?』

“……예.”

성검은 힘을 방출해 르네거의 몸 곳곳을 헤집었다.

르네거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가 거짓을 말할 리는 없으니……. 쯧. 되었다. 이제 일어나거라. 이 집에서 나가야지.』

르네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빛을 뽐내고 있는 성검을 바라 본다.

“나가지 않아도 괜찮을 듯합니다.”

『뭐?』

“그 아포칼리타는 저를 이용하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제가 힘이 회복될 때까지만 기다리다, 급습하면 이길 수 있을……!”

『멍청한 놈!』

성검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신의 종 주제에 아포칼리타의 도움을 받으려 하다니! 그 간악한 것에게 홀린 것이냐! 너는 나를 쥘 자격이 없다!』

성검의 힘이 더 거세게 밀려왔다.

흐윽.

르네거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손과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움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조금만 기다렸다가 급습을 하는 계획을 세운 것…….”

『닥쳐라!』

성검은 더 크게 발광했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라! 명령이다!』

누군가는 르네거를 성검의 주인이라 부를 테지만, 실은 틀린 말이었다.

르네거의 주인이 성검이었다.

바다신의 아들인 르네거는 바다신의 성물인 성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성검은 언제나 그를 조종했다.

『더 빠르게 뛰어라! 더!』

르네거는 턱 끝까지 치달은 숨을 삼키며 뛰었다. 그러나 속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몸이 더더욱 망가지고 있었으니까.

아포칼리타의 집을 둘러싼 결계는 그야말로 단단했다. 그것을 찢고 탈출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했다.

결과로 내상을 입었고, 그 탓에 지금의 르네거는 전쟁 직후의 몸 상태와 별다를 바 없이 망가졌다.

부러진 다리가 자꾸만 허청거렸다. 뼈가 살을 찌르는 것처럼 극악한 통증이 온몸에 가득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허억, 헉.

가파른 숨을 몰아쉰다.

『더 힘을 내야지!』

성검은 끊임없이 그를 재촉했다. 르네거는 앞을 보며 뛰고 또 뛰었다.

밤길은 스산했다.

근근이 들려오는 마물의 울음소리는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커다란 달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 뛴다.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이어 달빛의 도움도 끝이 났다. 급작스레 밀려온 먹구름이 달을 온전히 가렸기 때문이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코끝이 따끔거렸다. 이 피 냄새는 나의 것인가, 다른 이의 것인가. 르네거는 발을 천천히 멈추며 생각했다.

“허억, 헉…….”

그는 맺힌 땀을 닦으며 몸을 숙였다.

하얗게 빛나며 찬란한 금빛을 머금고 있는 머리칼이 쏟아지며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를 갈무리할 새가 없었다.

『르네거!』

챙!

르네거는 성검을 휘둘렀다.

검에 가로막힌 발톱은 더욱 날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르네거는 몸을 뒤로 구르며 자세를 벌렸다.

그리핀이었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달고 있는 마물인 그리핀은 르네거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포효하며 그를 위협한다.

만약 그리핀이 한 마리였다면 조금이나마 승리를 점쳐 볼 수 있었을 테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열한 마리.

르네거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핀은 수적 우위를 자랑했다.

“후우…….”

르네거는 검을 바르쥐었다.

패배가 뻔히 보였으나 얌전히 당해 줄 수는 없었다.

자신은 신의 뜻을 받드는, 라템이었으니까.

『모조리 죽여 버려라!』

챙!

르네거는 그대로 도약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