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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5화 (15/135)

15화

챙!

르네거는 그대로 도약했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퍼졌지만 아픔을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꿰에엑!

목을 찔린 그리핀은 울부짖었다.

같은 종족의 비명은 다른 그리핀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핀들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르네거를 겨눴다. 그들의 날카로운 부리가 르네거를 향했다.

르네거는 빠르게 몸을 굴려 그들을 피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윽!”

르네거는 부리에 찍힌 어깨를 붙잡으며 나뒹굴었다. 그리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쾅!

그리핀의 발톱이 르네거가 누워 있던 자리를 할퀴었다.

마치 화염구가 쏟아진 것처럼 움푹 파인 땅은 그들의 거센 힘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르네거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려 했으나, 그조차도 역부족이었다.

땅의 존재는 하늘의 존재를 따돌릴 수 없었다.

“하아…… 젠장.”

쿠웅! 그리핀의 단단한 날개가 르네거를 후려쳤다.

쿨럭!

르네거는 피를 토하며 몸을 웅크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사지가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르네거는 꿋꿋하게 일어났다.

그는 제 피가 묻어 있는 성검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힘을 주십시오.”

아직 성검이 힘을 주지 않았다. 그의 힘을 쓰기만 한다면 이 그리핀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르네거는 그렇게 판단했건만.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성검은 대답이 없었다. 연결이 끊긴 것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한데 대체 왜.

꿰엑!

달려든 그리핀의 부리가 르네거의 어깨를 관통했다.

곧이어 날아온 다른 그리핀의 발톱이 르네거의 팔을 쥐었다.

크흑!

르네거는 살점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졌다.

“왜…… 힘을…….”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몸에 힘이 빠져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큼 다가온 죽음이 그의 눈알을 덮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르네거는 조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살아남지를 않을 것을 그러했다.

아포칼리타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명예로웠을 것이다. 이깟 마물들에게 잡아먹히는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지 않은가.

선택은 후회를 만들고, 후회는 시간의 매정함을 탓하게 만든다.

흘러 버린 시간에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단지 거기까지.

지금의 르네거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꽤에엑!

그리핀의 깎아지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들으며 르네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은 시야 너머, 어두운 저 너머를 바라본다.

캄캄한 이면은 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익히 알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리나였다.

그녀의 고고한 눈이, 동시에 나른함을 머금고 있는 눈이, 스산함이 느껴지는 웃음이, 차분함이 넘실거렸던 말이, 모든 것이 떠올랐다. 마치 머릿속에 내내 각인된 것처럼.

-널 살려 줄게.

믿지 못할 말이었으나 어딘가 믿음이 가는 말이기도 했다. 아포칼리타를 믿는 것이 우습기도 했으나, 어찌 되었든.

만약 그녀가 다시 같은 말을 해 준다면, 르네거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달려드는 그리핀 떼에게 당하는 죽음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곧장 달려들 것 같았던 그리핀들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곧장 죽음에 다다를 것 같았으나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르네거는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걷혀 있었다. 고개를 내민 달이 새하얀 빛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그 아래, 허공에 뜬 채 돌로 굳어 버린 그리핀들이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르네거는 천천히 눈동자를 옮겼다.

그리고.

카리나를 볼 수 있었다.

* * *

“…….”

르네거는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역광으로 빛을 받은 터에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르네거는 희미한 숨을 뱉었다. 시선을 고정한다.

“르네거 라템.”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르네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그녀는 보란 듯이 웃으며 천천히 하강했다. 탁, 땅에 닿은 그녀는 르네거를 향해 느리게 다가왔다.

“어떻게 해 줘야, 네가 내 말을 들을까?”

카리나는 손을 뻗었다. 동시에 쿵! 굉음이 퍼졌다. 날아오른 채 굳어 있던 그리핀들이 모두 다 추락했다.

“너는 이런 곳에서 죽을 인간이 아니야.”

자일에게 죽어야 하는 몸이잖니.

카리나는 생각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조금씩 벌려지던 입술은, 이내 음성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벌려졌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는 오직 카리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 뚜렷한 시선을 비추고 있었다.

“저를 살려 두는 것이 진심이십니까?”

“내가 한 말 중에 진심이 아닌 게 있기나 할까.”

카리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르네거의 눈에 더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

르네거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발을 떼어 내 카리나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이 저를 살려 두는 이유가 저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발끝이 맞부딪힐 만큼 가까워졌다. 르네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제가 살아 있어야 하는 걸 테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카리나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멍청한 개새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기에 당황한 것일까. 르네거의 입술이 부드럽게 치켜 올라갔다.

“믿음은 알량한 것이라, 말로 하는 것은 쓸모가 없노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카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그렇다면 말이 아닌 것을 만들어 주셔야지요.”

뜨거운 체온이 밀려왔다. 자칫하면 살이 데일 것처럼, 그렇게도 뜨거운 기운이 카리나의 손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맹약을 걸어 주십시오.”

카리나는 돌연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그녀는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 사지를 넘나들었냐는 듯 싸늘해진 눈매가 돋보였다.

“피의 맹약을 말하는 거 맞니?”

“그렇습니다.”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걸 알고 있지 않아?”

카리나는 아무렇지 않음을 표방하며 그를 직시했다. 하지만.

“어차피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

르네거는 노후하는 짐승처럼 낮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기꺼이 당신의 피로 생을 마쳐도 좋습니다.”

그의 말에는 음절마다 힘이 있었다. 당장 쓰러져 기절해도 이상이 없는 몸뚱이인데도, 음성만큼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

“내가 거부하는 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대로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자살은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겠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

카리나는 헛숨을 내뱉었다.

“이거 단단히 미친놈이었네.”

카리나는 르네거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피의 맹약.

이는 본디 전쟁터에서 신뢰하지 않는 상대와 함께할 경우에 주로 쓰는 주술이다.

상대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 나의 죽음은 곧 상대의 죽음.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주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신뢰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 맹약은 3대 가문들 간에만 사용하는 주술이었다.

한데 아포칼리타인 나에게 협상의 패로 내밀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는데.’

카리나는 낮은 침음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견고했다.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는 듯이.

여기서 맹약을 거부한다면, 르네거는 주저하지 않고 자살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맹약을 걸어 준다면 이놈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일 텐데.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맹세의 조건은?”

“절 무사히 라템의 대신전까지 데려다주는 것.”

르네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포칼리타와의 맹약치고는 소소한데.”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다.

맹약을 거부하면, 르네거는 이곳에에서 죽는다. 그럼 내가 여주인공의 목표가 되어 버리겠지.

그러니…….

‘르네거를 데려다준 후, 자일이 라템의 대신전을 급습할 수 있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일의 손에 죽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나름대로 해 볼 만한 일이기도 했다.

‘짜증 나지만.’

후우.

카리나는 거친 숨을 뱉으며 턱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르네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렴.”

피의 맹약은 말 그대로 피를 섞어야만 이루어지는 주술인 만큼, 서로의 피를 뽑아 주사하는 방법을 주로 썼다. 하지만.

“난 내 피를 내어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카리나는 르네거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가까워진 얼굴. 그녀는 그의 뒷목을 움켜잡으며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윽…….”

“이쪽이 더 좋잖아?”

카리나는 그의 피를 삼키며 자신의 피를 밀어 넣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이어졌다. 곧, 싸한 느낌이 입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섞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됐겠지. 그렇게 생각한 카리나는 입술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르네거의 손이 더 빨랐다.

“읏…….”

그는 카리나의 뒷머리를 세게 움켜 잡았다. 그녀의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핥고, 또 핥으며 그녀에게로 깊숙이 들어갔다.

비릿한 피 향이 느껴졌다. 동시에 다디단 향기가 이어졌다. 그러며 질척한 기운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카리나는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입안에 맴돌고 있는 맹약의 흐름이 그들을 이어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거는 카리나와 더 가까이 몸을 밀착했다. 빈틈없이 맞춰진 그들의 몸은 마치 한 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카리나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며 귀와 뒷머리를 감쌌다.

“하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떼어 낸 그들은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저도.”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르네거였다.

“이쪽이 더 좋습니다.”

얼핏 보인 그의 얼굴은 지독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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