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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6화 (16/135)

16화

퍽!

카리나는 르네거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르네거는 그대로 쓰러져 넘어졌지만, 카리나는 조금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다. 되레 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볼 뿐.

“르네거.”

카리나는 쓰러져있는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난 주인을 함부로 무는 개는 키우지 않아.”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한 번만 더. 내게 허락 없이 손을 댄다면.”

카리나의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졌다.

“곱게 넘어가 주지 않을 거야.”

탁.

그녀는 르네거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곤 탈탈 털었다.

그런 카리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르네거는,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맹약이…….”

그는 손등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제대로 이뤄지기 전에 당신이 몸을 떼어 내는 것 같아 붙잡은 것뿐입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바로 넘기며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르네거의 뒤편으로 달이 떠 있다.

역광으로 쏟아지는 빛 덕분에 어둠에 가려져 있는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피부가 돋보였다. 붉은 피에 절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해도 그가 지닌 빛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었다.

르네거는 눈꺼풀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커다랗고 기다란 눈매 안에 담겨 있는 눈동자가 푸른빛을 냈다. 새까만 속눈썹이 잘게 떨린다.

“제 목숨을 걸고 맹약을 한 것이니까요.”

하.

카리나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거짓말하지 마.”

다분한 욕정이 담긴 입맞춤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 있을까.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르네거를 쏘아보았다.

“거짓말이라 하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그는 말하며 입술을 들어 올렸다. 옅게 웃는 그 모습은 지독하게도 아름다웠으나, 동시에 교묘했다.

“어차피…….”

그는 천천히 카리나에게로 다가왔다. 피가 묻어 있는 입술을 할짝이며 콧잔등을 살짝 찌푸린다.

“이제 절 죽이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는 웃었다. 그래. 맑게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너무도 해사해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절 죽이면 당신 역시 죽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건방진 태도는 봐줄 수 없다. 카리나는 다시 발로 그의 배를 걷어찼다.

“윽!”

“그렇게 됐네. 아쉽게도.”

그녀는 르네거의 배를 발로 짓누르며 다시금 멱살을 잡았다.

“한데 죽기 직전까지 때릴 수는 있거든.”

날이 선 겁박임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 그 하얀 얼굴을 양껏 일그러뜨리며 웃을 뿐.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때리십시오. 그러해도 전 죽지 않을 테니까요.”

르네거는 생긋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는 새까만 주술진이 그려져 있었다. 카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라템까지 살아서 간다면, 맹약은 풀릴 겁니다.”

르네거는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카리나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제 존재는 당신의 숙명이 되었고, 당신의 존재는 제 사명이 되었으니까요.”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카리나의 살에 닿았다. 하지만 살이 짓이겨지지 않는다.

피의 맹약을 맺었기에, 서로의 피에 해를 입지 않는 것이리라.

달큼한 향기가 올라왔다.

라템의 피가 품은 향.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달고 짙은 향.

카리나는 빠르게 손을 떼어 냈지만, 그럼에도 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짜증 나. 카리나는 미간을 더욱 깊게 좁혔다.

“내가.”

카리나는 그와 멀어졌다. 코끝에 맴도는 향을 손으로 휘젓는다.

“지금 널 죽일 수 없다 해도, 후에 널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야.”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예리하게 찢어진 동공은 르네거를 향해 독 니를번뜩였다.

“건방지게 굴지 마.”

쓰러져 있는 르네거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는 카리나의 기세에 기가 죽은 게 아니었다. 그저, 힘에 부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일 뿐.

“……생각했습니다.”

한참의 침묵을 이어가던 그는,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오기 전에, 당신을.”

그는 희미하게 꺼질 듯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핀 떼에 죽는 것보다 당신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명예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겨누었다. 그리고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저는.”

눈이 마주쳤다.

성검에 물들지 않은 그의 눈은 하염없이 청명했고, 한없이 새맑았다.

바다신의 후손이라 했던가. 그래서 저 두 눈에 바다를 담고 있는 것인가. 카리나는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며 그는 양 입술을 들어 올렸다. 무해한 미소. 카리나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이때였다.

-스스슷!

무언가가 바닥을 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르네거의 몸이 풀썩 쓰러져 버렸다. 축 처진 몸은 마치 죽은 자의 것처럼 보였다.

뭐야, 죽었니?

카리나는 더듬더듬 제 목을 만졌다.

[내가 했다.]

쓰러진 그의 팔을 타고 히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론은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입을 벌렸다.

[내게 약을 먹인 대가는 치르게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는 르네거를 한 번 더 세게 깨물었다.

카리나는 그제야 허심탄회하게 웃을 수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카리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앉혔다.

집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었다.

앞치마를 두른 언데드가 카리나에게로 찻잔을 내밀었다. 카리나는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는 집을 나가는 개새끼도 잡지 못하니?”

언데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제게 그런 말을 하느냐는 눈치였다.

됐다. 내가 뼈다귀에게 무슨 말을 하겠니.

카리나는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한 숨을 내뱉었다.

히론에게 물려 정신을 잃은 르네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저놈이 집을 나가지만 않았어도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카리나는 머리를 헝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애초에 다 죽어 가던 르네거를 발견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를 줍지만 않았어도 나는 여전히 평화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설마 원작이 비틀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카리나는 눈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아니. 아직까지는 괜찮다.

르네거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 살아 있는 것뿐.

자일을 유인해 르네거를 죽일 생각이니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

‘……괜찮을 거야.’

카리나는 숨을 차분하게 고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진 성검을 바라보았다.

“성검아.”

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카리나는 그 침묵을 기다려 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대답 안 하면 부숴 버린다.”

『……왜.』

성검은 빠르게 전음했다.

카리나는 눕혔던 몸을 일으키며 무릎에 팔꿈치를 대었다.

“넌 알고 있었니?”

『무얼 말하는 것이냐?』

“저 건방진 개새끼가 내게 맹약을 제안할 거라는 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

성검은 빽 소리쳤다.

『더불어 너희 같은 더러운 것들과 맹약이라니……! 수치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구나!』

“수치스러우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성검을 세게 바르쥔다.

“애초에 네가 저 인간을 꾀어내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일 텐데 말이야.”

『그건……!』

“내가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니?”

『내, 내가 네깟 것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나는 성검이다! 바다의 신이 직접 만든 성물이란 말이다!』

성검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카리나는 더욱 크게 조소했다.

“바다신의 성물이라는 게, 널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인간을 죽게 내버려 두니?”

성검은 그대로 굳었다. 만약 그에게 형체가 있었다면 동요가 관찰되었을 게 분명했다.

“저 인간이 네게 힘을 요청한 걸 알아. 한데 너는 거부했지.”

성검은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카리나는 그것을 꽉 짓누르며 이를 갈았다.

“그리핀에게 죽게 둘 심산이었지?”

『…….』

“그리고 남아 있는 생명력 모두를 뽑아 먹을 생각이었을 테고.”

성검은 대답지 않았으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쯧.

카리나는 혀를 차며 손을 되돌렸다.

“이런 속된 것이 성물이라 칭송받는 꼴이라니. 라템도 참 거지 같구나.”

성검은 여전히도 반발하지 못했다.

카리나는 눈을 찡그리며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히론의 말이었다.

[이 인간 놈은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 것 같구나.]

그는 르네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리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묵묵하게 동의했다.

“그러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의 맹약은, 정말로 위험한 짓이었으므로.

그가 죽을 수도 있다던 카리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라템의 피와 아포칼리타의 피는 상극이기 때문에, 주술만 아니었다면 그는 상대적으로 강한 카리나의 피에 녹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맹약의 선언은 그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결과로 주술이 완성되었다.

아주 조금만 어긋났어도 실패했을 주술이었다.

[죽는 걸 각오하고 맹약을 걸다니. 참 대단한 놈이군.]

“그건 아닐걸.”

카리나는 단호히 부정했다.

“저놈은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자기를 죽게 두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그런 도박을 한 것이겠지. 카리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꺼이 당신의 피로 생을 마쳐도 좋습니다.

기꺼이 생을 마치기는. 내가 피에 섞인 힘을 조절할 걸 알고 있던 주제에.

쳇.

카리나는 혀를 차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정말 귀찮게 됐어.”

[라템의 대신전까지 가게 되었으니, 귀찮을 법하지.]

“그것도 있지만…….”

카리나는 손에 턱을 괴며 말을 흐렸다. 성검에게로 눈을 돌린다.

“성검아.”

『왜 또 부르는 것이냐.』

성검은 고깝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카리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주인은 알고 있을까?”

『무얼 말하는 것이냐?』

성검의 말끝이 다소 떨렸다. 카리나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르네거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 네 주인은 모를 거야.”

르네거의 귓바퀴 아래의 살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아래로 퍼지는 것처럼, 까맣게 변색된 살은 그의 모든 완벽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포칼리타와 맺는 맹약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카리나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양 검지의 끝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곳이 뜨거웠다. 팔팔 끓는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아니, 팔팔 끓고 있는 것처럼.

“모르기에 이렇게 쉽게 일을 저지른 것이겠지.”

몸에 달뜬 열이 올라왔다.

이종족 간에 맺은 맹약의 가장 큰 부작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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