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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7화 (17/135)

17화

휘이잉.

대지와 대지가 맞닿는 곳에는 바람이 변화무쌍하게 흐른다.

죽어 버린 대지를 쓸고 온 바람은 시체의 기운을 품고 있었기에, 바싹 마른 잎사귀들이 허공을 긁으며 지나갔다.

이토록 황폐한 바람을 맞으며, 자일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지상을 걸었다.

발에 채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돌멩이를 느끼며, 발에 걸리는 탑의 잔해를 스치며, 묵묵히 걸어 나갔다.

마침내 그는 탑의 한 가운데에 당도했다.

그러나 일전만큼 고도가 높지 않았다.

이미 다 무너져 버린 탓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린 아포칼리타의 탑.

이제는 사라져 버린 과거.

자일 역시, 언젠가는 이곳을 무너뜨리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카리나가 먼저였다.

그녀는 자신을 앞서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일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잔해들은 이곳에 탑이 존재했다는 것만을 일러 줄 뿐 그것이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알려 주지 못했다.

자일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탑을 꺼냈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이었다.

외벽은 새까맸으며, 내벽 역시 그러했다.

탑의 가운데에는 용의 시체가 담긴 샹들리에가 있었고,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마물의 시체가 벽 곳곳에 걸려 있었다.

마물의 시체를 걷으면 그곳이 방이었다.

방, 이라고 부르기에는 심히 협소했으나 어찌 되었든 방, 이기는 했다.

그저 날카로운 쇠꼬챙이와 피가 묻어 있는 검, 실험에 쓰이는 마물의 시체들, 그리고 아버지가 뽑아 온 마물의 피가 즐비해 있는 곳이 바로 그들의 방, 이었다.

자일은 눈을 떴다.

아직 태양이 드높게 떠 있는 때이긴 했지만 그의 시야는 캄캄했다.

탑의 어두웠던 정경이 뇌리에 박혀 드러난 듯했다. 그는 가느다란 숨을 뱉었다.

자일은 몸을 숙였다. 그리고 대지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쾅!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은 빼곡히 널브러져 있던 탑의 잔해들을 한곳으로 밀쳐 냈다.

깨끗해진 대지. 그곳에서, 자일은 새로운 술식을 읊었다.

그의 주변을 따라 새빨간 색의 선이 퍼져 나갔다.

커다란 원, 그리고 그려지는 직선과 곡선.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며 움직이던 선은 자일의 발끝에 닿으며 멈춰 섰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새까만 숨이 홀러나왔다. 그의 입과 코와 눈과 귀에서 새까만 숨이 흘러나왔다.

마치 안개처럼 퍼져 나간 까만 연기는 그의 몸을 감춰 주었다. 곧이어.

쿠구궁!

대지가 흔들렸다. 그러며 무언가가 땅을 찢고 솟아올랐다.

쿠웅!

이내 흔들림이 멎었다.

자일은 그제야 바닥을 짚었던 손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저 멀리, 구름이 보였다.

저 멀리, 태양이 보였다.

일전만큼, 일전보다 더 높아진 고도.

자일은 낮게 비소했다. 그러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살점처럼 보이는 덩어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건 분명.

그는 살점을 주워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러자, 익숙한 기운이 그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자일은 비스듬하게 입술을 들어 올렸다.

카리나는 언제나 자신을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가 먼저 앞서 나갈 것이다.

그녀를 갖기 위해서.

촤악!

자일은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피를 품은 것처럼 붉은 날개가 보란 듯이 활짝 펼쳐졌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탑에서 뛰어내렸다. 메마른 대지를 향해 몸이 추락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대지. 그와 몸이 닿기 직전에 자일은 비상했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그는 한 지점을 향해 비행했다.

형제들을 부를 때였다.

* * *

르네거는 몸을 뒤척였다.

그는 온몸에 이는 통증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마치 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살에 박힌 듯한 느낌이었다.

“후우…….”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흐릿한 초점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깜빡, 깜빡.

몇 번 눈을 움직이던 그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집이다. 아마도 그녀가 날 옮긴 것이겠지.

살았다.

적인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한 대가로.

하지만 이 얼마나 배반적인 일이란 말인가? 르네거는 늦은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본디 죽음이란 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일이라 하였다.

죄를 지은 자는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선을 지닌 자는 신의 곁으로 가 영원을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자신은 성검의 주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죽은 후에 신의 곁으로 갈 것이라고, 그러니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나는 두려웠던 것인가.’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이는 처음 사지를 오갔을 때부터 유효했던 생각이었다.

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밀려오는 죄책감.

그렇기에 다시는 삶에 집착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건만…….

‘그 아포칼리타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르네거는 연달아 성호를 그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당신의 말을 거역한 저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어린 양을 부디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수적인 아포칼리타와 손을 잡은 것을…….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르네거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깍지 사이사이에 낀 손가락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를 올리는 와중에도, 르네거는 끼어드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카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깊은 입맞춤을 할 때,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던 표정이 떠올랐다.

항시 무심하고 무정했던 그녀가 당황하며 저를 밀쳐 내던 것이, 그 얼굴을 보면서 야릇한 배덕감을 느꼈던 자신이, 모두 다 떠올랐다.

‘……젠장.’

그는 모은 두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러한 감정은 가지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욕구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나는 신의 아들이니까.

부디 이 미숙한 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애걸하듯 기도를 마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절그럭.

그가 움직이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르네거는 빠르게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그는 제 발목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족쇄를 발견했다. 헛웃음을 뱉는다.

“일어났네?”

그녀의 목소리다.

르네거는 족쇄에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방문을 열고 다가오는 카리나를 바라본다.

“이 족쇄는 무엇입니까?”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리며 대답했다.

“네가 또 도망칠 것 같아서.”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게 단언하기에 전적이 있어서 말이지.”

르네거는 두 눈을 들어 올렸다. 빳빳하게 완성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 말이 참 중의적으로 들렸다. 카리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이제 와 도망친다면 어제 했던 짓거리가 아까워질 테니까.”

카리나는 족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스슷!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녹색 기운이 족쇄에 내리꽂혔다.

쿵.

그대로 돌이 된 족쇄는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르네거는 제 발목에 묻은 돌가루를 털며 새삼스러운 스산함을 느꼈다.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뒤로하고 의자를 잡아끌었다. 몸을 앉힌다.

“그래서.”

기다란 치마를 발끝으로 저으며, 왼 다리를 꼬아 올린다.

“소감이 어때?”

그녀는 손에 턱을 괴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 엇비슷한 시선이 르네거에게로 날아갔다.

“라템의 일족으로서, 정적인 아포칼리타와 맹약을 맺은 것에 대해서 말이야.”

르네거의 두꺼운 목젖이 움찔거렸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날렵한 턱 끝에 땀이 맺혔다.

“저를 불쾌하게 해 맹약을 풀려는 생각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피가 섞여 버린 이상, 저의 뜻대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나도 알아.”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정말 감당할 수 있나 싶어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르네거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무릎이 닿을 정도의 거리로 가, 그를 내려다본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카리나는 손을 뻗어 르네거의 뒷머리를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 속을 파고들며, 그의 뒷목을 더듬었다.

“너는 인간이나, 나는 인간이 아니지.”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훑으며 손끝으로 살을 간지럽혔다.

“이런 이종족 간에 맺어진 피의 맹약이 얼마만큼 잔혹한 것인지, 너는 모르고 있다는 뜻이야.”

르네거는 미동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의 얼굴에 달뜬 열이 올라왔다. 그의 숨이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다가오면서부터 풍기는 매혹적인 향은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걸음은 뜨거웠으며, 달궈진 열기는 그에게 전달돼 그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분명 이러한 적이 없었는데, 생각하는 것도 잠시.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손목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녀의 살에서 비롯된 체온과 향을 느낀다.

“바로 이런 의미야.”

카리나는 그의 하반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찾게 되고.”

그녀는 르네거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네가 나를 탐하게 된다는 의미.”

카리나는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뒷머리를 세게 움켜쥐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까맣게 올라와 있는 살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변색되었던 살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읏.

르네거의 벌려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카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책임져야 해, 르네거.”

르네거는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러한 욕구를 갖게 된 것인지, 왜 자신이 그녀에게 이렇게도 홀려 버린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아포칼리타라니. 아포칼리타와 자신이라니.

몇백 년에 걸친 숙적일진대,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이성에서 오는 것뿐이었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카리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위에 올라타, 어깨를 붙잡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욕망을 갖게 되었어.”

카리나는 그런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줄기 한 줄기 매혹적인 가시넝쿨이 저를 끌어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르네거는 그것을 차마 베어 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겠지.”

신이시여, 부디 저를 용서하소서.

그의 몸이 카리나의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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