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만둔다고?”
치료소의 주인, 시엘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커다랬다.
그를 쳐다보는 환자들의 시선이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놀란 눈으로 카리나를 볼 뿐이다.
“갑자기 왜……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시엘은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차분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별일은 아니에요. 그냥, 이사를 가려고요.”
“이사를? 이렇게 갑자기?”
“아포칼리타가 가까이 왔잖아요. 그들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서요.”
진실이었다. 구체적이지 않을 뿐.
르네거를 라템의 영역까지 데려다 줘야 했기에, 카리나는 치료소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을 옮겨야 했다. 라템의 인간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곳으로 가야 했으니까.
아, 귀찮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르네거와 맹약이 묶여 있지 않은가.
-당신이 저를 살려 두는 이유가 저를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보다 더 똑똑한 인간이었다. 그래. 인정한다. 르네거에게 방심했다는 것을.
르네거와 입을 맞추는 행위 자체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되레 기분이 좋을 정도로 몸이 달뜨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주인을 물어 버린 개를 얌전히 놓아줄 순 없지.’
이건 묘한 호승심이었다. 저가 무시한 인간에게 당했다는 것을 인정 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하지만 어차피 죽을 놈인걸.’
이렇게 생각하니 들끓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죽음은 곧 자신의 승리였기에, 카리나는 그렇게 생각을 바로잡았다.
“그러니까, 리나야.”
시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그의 말을 넘겨 들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지 말해줄 순 없어?”
“저도 잘 모르겠어서요.”
“……그래?”
시엘은 두 손을 모았다. 식은땀이 배어 나온 손을 맞대며 눈을 굴린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카리나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의 하얀 살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시엘의 눈매가 빳빳하게 굳었다.
“……리나야.”
시엘은 들끓는 숨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되물었다.
“혼자, 이사를 가는 거지?”
카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네. 혼자 가죠.”
“……그렇구나.”
시엘은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카리나의 목덜미에 닿은 그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 *
피곤해.
집에 두른 결계를 점검하는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우웅.
완성된 결계는 낮게 진동했다. 카리나는 결계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르네거가 결코 찢어 버릴 수 없게 말이다.
이렇게, 카리나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테니까, 겹겹이 결계를 쳐 놓을 필요는 없을 테다.
그녀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대문으로 몸을 들었다. 벌컥, 문을 열었다.
그녀가 집 안에 발을 딛자마자 어두웠던 실내가 환하게 밝혀졌다.
불이 붙은 등불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원래 같으면 히론이 가장 먼저 달려올 텐데.
히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히론?”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카리나는 불안해지려는 가슴을 억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히론, 어디 있어?”
홀을 넘어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때, 카리나는 식당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식당에 가까워짐과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풍겨졌다.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히론, 여기 있어?”
그녀를 반기는 건 히론뿐이 아니었다.
식탁 위에는 갖가지 요리가 놓여 있었다.
모두 다 인간들의 고급 식당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요리로써,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카리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막 전채 요리를 내려놓는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르네거는 의자를 당겨 몸을 앉혔다. 그리고 카리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배가 고파서요. 딱히 먹을 만한 게 없어서 만들었습니다.”
“히론은…….”
[여기 있다.]
카리나는 시선을 내렸다.
히론은 이제 막 식사를 끝낸 듯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배가 보였다.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히론, 넌 뱀이야. 돼지가 아니라.”
[맛있는 걸 어떡하나. 너도 먹어 보아라. 주방장 솜씨가 좋더구나.]
그녀는 헛웃음을 뱉었다.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이다.
카리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르네거의 앞에 마주 앉았다.
“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돼. 히론도 마찬가지고.”
“압니다.”
퉁명스러운 그녀의 말에도, 르네거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의 얼굴은 평안하고 다정했다. 아침의 정열적이었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포칼리타와의 전쟁에서 그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대신 마물을 잡아먹지.”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르네거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카리나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진짠데.
카리나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드셔 보십시오. 음식은 필요에 의해 먹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먹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카리나는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송장 같았는데, 지금은 꽤나 멀끔해진 상태였다.
라템 특유의 치유력 덕분인 듯했다. 사지가 잘리지만 않으면 회복이 된다 했던가. 이놈들도 인간 같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카리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눈앞의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음식에 독을 탔어도 소용없어. 난 독 같은 것에 죽지 않으니까.”
“당신이 죽으면 저도 죽는데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그러곤 스푼을 쥐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스프를 한 숟갈 떠먹는다.
고소한 향이 먼저 그녀를 반겼다. 혀에 감기는 크림이 부드러웠다. 목으로 넘어가는 찰나에 감칠맛이 느껴졌다.
맛은 있네. 카리나는 생각하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먹고 있어. 난 잠깐 방에 다녀올게.”
르네거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카리나는 제 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천을 갈아야 하거든.”
아침에 정신이 없어 천을 갈지 못했더니 피가 흠뻑 배어 나와 축축해진 터였다.
이 정도면 쓸모가 없어진 것 같아, 카리나는 천을 뜯듯 떼어 냈다.
피가 콸콸 쏟아졌다. 손수건으로 그를 틀어막는다.
“상처였습니까?”
르네거는 굳은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대충 힘을 불어 넣어 잠시나마 지혈을 시킨 후 손수건을 떼어 냈다.
“그럼 내가 장식으로 이걸 하고 다닐까?”
“어울려서요. 장식인 줄 알았습니다.”
……낯부끄러운 말도 할 줄 아네.
카리나는 잔기침을 뱉었다.
“어쩌다 다치신 겁니까? 꽤 깊어 보이는데요.”
카리나는 일어서는 대신 다리를 꼬며 깊게 몸을 앉혔다.
히론이 배불리 먹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의 호의는 보여 줘도 괜찮을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에 턱을 괴며 발끝을 까딱였다.
“아버지가.”
르네거의 숨이 멈춘 게 느껴졌다. 카리나는 보란 듯이 비소하며 말을 이었다.
“다 죽였다고 생각해서, 방심했지. 그 늙은 해골이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스친 게 다행이야. 관통당했으면 더 골치가 아팠을 거야.”
르네거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아포칼리타의 수장을 죽인 거로군요.”
그는 자조적이게 중얼거렸다. 카리나는 불쾌하다는 양 눈을 찌푸렸다.
“왜 내 말을 안 믿을까. 난 이제까지 진실만 말했어.”
르네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제가 치료해 드릴까요?”
그는 걱정이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어차피 우리의 피는 섞여 있지 않습니까. 하면 제 치유력이 들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리나는 원치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해.”
알량한 자존심일 수도 있었다.
아니, 뭐가 됐든 르네거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게 바로 카리나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었다.
“너는 이런 짓 하지 말고 네 몸이 낫는 것에만 집중해. 내일 떠날 거니까.”
르네거는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에 성검을 되돌려 주실 겁니까?”
“봐서.”
르네거는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 시선을 들어 올린다. 카리나를 직시한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의 푸르른 눈은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계속해 보고 있자면, 깊은 바다에 빠져 속절없이 질식될 것만 같았다. 카리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먼젓번, 성검에 대해서 하신 말이 있지요.”
르네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성검과 가까이하면 위험해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궁금해?”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팔짱을 끼며, 르네거와 조금 더 가까이 시선을 맞댄다.
“내 말을 믿으려고?”
“이제 와 당신이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재미없게.”
“말씀해 주십시오.”
카리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며 손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성검의 주인은 보통 십 년 주기로 바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전 주인의 시체를 본 적 있어?”
르네거의 푸른 눈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는 미동 없는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성검은 주인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놈이야. 그걸로 자신의 힘을 대체하지. 그러니까.”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카리나는 즐겁게 말을 이었다.
“성검의 주인들은 다 성검에 먹혀 버린다는 뜻이야.”
르네거의 얼굴이 굳었다. 그 굳어 버린 표정을 보며,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너도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