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20화 (20/135)

20화

‘너도 죽을 거야.’

카리나의 말을 끝으로, 식탁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퍽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흥미로움이 가득한 비소가 번들거렸다.

이렇게 르네거를 자극하다 보면, 하얗고 맑은 물에 검은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릴 때에 오는 쾌감이 느껴졌다.

굳건한 성기사의 성질을 긁는 것은 꽤 유쾌한 일이었다. 그의 견고한 믿음이 무너지는 걸 관찰하는 게 나름 즐거웠다.

고약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으나, 카리나에게는 단순한 유희일 뿐.

지독하게 조용히 살아왔던 지난 삼 년의 시간을 상쇄해 주는 듯한 즐거움.

카리나는 그렇게 르네거를 대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르네거의 눈에 얹힌 시름은 퍽 무거워 보였다.

“당신의 말은 라템의 교리에 반하는 말입니다만.”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템의 일족에 있어 성검은 그야말로 바다신의 현신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추앙하는 신의 성물이 인간의 생명력에 기생해 힘을 얻는 것이었다니.

라템의 기사인 그가 쉬이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카리나는 그의 혼란스러움을 나름대로 인정해 주었다.

“말했듯, 나는 거짓말 안 해.”

카리나는 하품을 하고 있는 히론의 턱 아래를 긁어 주며 말했다.

“이번에도 성검이 힘을 주지 않았잖아?”

그녀는 그리핀과의 전투를 언급했다. 르네거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성검은 네가 죽기를 바랐을 거야. 네가 죽은 후에 남은 힘을 긁어모으고 싶었겠지.”

르네거의 가느다랗고 기다란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리핀과의 전투 이후, 성검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카리나가 성검을 가져가는 그 순간까지도, 성검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정녕.’

내가 죽기를 바랐던 것인가.

르네거는 차분한 숨을 호흡하며 손을 말아 쥐었다.

“……왜.”

신앙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거는 ‘왜’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검은 바다신의 성물이 아닙니까. 충분히 다른 힘을 이용할 수 있을 텐데 왜 인간의 생명력을 그러모 으려는 것입니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카리나는 그런 르네거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이번에 성검을 쥐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라.”

맞는 말이다. 성검이 주인의 생명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주인을 죽게 만든다는 건 원작에서도 없던 내용이 아니었는가.

그럼 왜 원작에서는 언급이 없던 걸까. 카리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흘려 넘겼다.

“짐작건대 인간이 가진 생명이 가장 처절하고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히론을 쓰다듬던 그녀는, 이내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포칼리타들도 인간의 생명을 모으는 거지.”

르네거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처음 들었다는 듯 휘둥그레진 채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몰랐니?”

카리나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인간의 생명 천 개가 있으면, 나 같은 실험체를 한 개 만들 수 있어.”

실험체. 이는 신이 만든 생명의 법칙에 위배되는 악한 단어이다.

하지만 왜일까. 왜 이렇게도 그 말이 처연하게 들리는 것일까. 르네거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포칼리타가 신도들의 복수를 대신해 주었던 것이군요. 그렇게 죽인 인간들의 생명을 갈취하고자.”

“갈취라니. 나름 합리적인 방법이야.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쁜 인간들을 죽여 주고 있는 거라고.”

“그건…….”

르네거는 잠시 숨을 멈췄다. 커지려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어깨를 떨어뜨린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카리나는 피식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나 르네거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죄는 신의 앞에서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형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다 해서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의 교리에서는 보복을 금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죽은 후에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선하게 살아온 인간은 영생을 얻고 악하게 살아온 인간은 벌을 받을 테니까.

이러한 교리를 일평생 믿어 온 르네거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말이야.”

카리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두 손에 턱을 괴며 르네거를 바라본다.

“그럼 왜 라템은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을 죽이는 거야?”

르네거의 눈매가 굳었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교리를 받든 겁니다. 아포칼리타는 신이 아니니까요.”

“그래?”

카리나는 재차 실소를 내뱉었다.

어떤 답을 해 줄까. 어떤 답을 해야 저 신실한 성기사의 신앙에 금이 갈까. 그녀는 비죽 입술을 비틀었다.

“교리에선 분명 살인을 금하지 않니?”

그녀는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살인은 하지 말되, 주신을 섬기지 않는 인간들은 죽여도 괜찮다라……. 참 모순적이지 않아?”

허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지적에, 르네거는 숨을 가파르게 내뱉었다.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이니까요.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습니다.”

“어머.”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런 진부한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르네거의 눈매가 사붓 떨렸다. 그러나 카리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해 보자.”

짝.

그녀는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라템은 배신자를 처형하지.”

르네거는 숨을 삼켰다. 빠르게 반론한다.

“그건 아포칼리타로 변질한 이들을……!”

“데이펜이나 캄바이트의 신자가 되려는 이들도 죄를 물어 처형하잖니.”

카리나는 싸늘히 대꾸했다.

“모두 다 같은 신을 믿고 있는데도 말이야.”

피식.

그녀는 부러 소리 나게 비웃음을 뱉었다.

“그러니 대답해 볼래? 왜 라템은 같은 신을 믿는 인간들을 죽이는 걸까?”

르네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어떠한 답을 한들, 해답이 되지 못할 테니까.

그는 탁자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세게 바르쥐었다.

왜.

그는 또다시 신앙에 의문을 던졌다.

왜, 라템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가.

신께서는 아무 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의 말씀을 빗대어 같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르네거는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의문은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두통이 찾아왔다. 그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성검 역시 마찬가지야.”

카리나는 무자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치 흡혈귀처럼, 주인에게 달라 붙어 죽을 때까지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르네거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성검의 힘을 얻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했었으니까.

“그래서 죽게 된 성검의 주인만 해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천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르네거는 다시 한번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러한 죽음도 신의 뜻이라면 내가 할 말이 없지만 말이야.”

르네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꾹 감은 채 침음을 흘릴 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르네거는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허망해진 눈동자. 텅 비어 있는 그 시선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낮게 조소했다.

“……당신은 왜.”

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굳건했던 그의 신앙에 작은 파동이 일어났다.

“제가 교리를 의심하게 만드십니까.”

애걸하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런 그를 위로해 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아포칼리타와 손을 잡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르네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카리나를 바라볼 뿐. 묘하게 이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에게 홀려 있을 뿐.

그는 사붓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해 볼래?”

카리나는 히론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내 말을 믿고 있니?”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 애완동물이라 말하는 마물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는 손길을 관찰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언뜻 보면 사악한 뱀의 것처럼 보이나 특유의 다정함이 숨겨져 있는 시선을 관찰한다.

카리나는 아포칼리타였지만, 그렇다고 해 극악무도한 실험체는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진정한 아포칼리타였다면, 자신은 진즉 죽었으리라. 맹약이라는 것을 제안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으리라.

이제껏 목이 붙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다른 아포칼리타들과는 차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르네거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숨과 침을 함께 삼키는 듯했다. 카리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는 카리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목은 꼭 치료하십시오.”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걸음은 이상하리만큼 힘이 없었다. 마치 넋을 놓은 사람의 것처럼.

“흐음.”

카리나는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이며 비음을 내었다.

“꽤 재미있는데.”

킥킥.

그녀는 즐거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 *

방으로 돌아온 르네거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감아지지 않았다.

생생하게 깨어 있는 정신은 그의 모든 과거를 꺼내기에 이르렀다.

르네거는, 태어난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나타난 인간이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이는 라템의 수장으로, 아침 일찍 해변가 산책을 할 때에 모래 위에 뉘여 있는 르네거를 보았다고 한다.

그 작은 갓난아이가 파도를 견디며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었노라고.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노라고. 그리고 아이의 주변에 푸른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노라고. 그러니 이 아이는,

바다신의 아들이라고.

수장의 추측대로, 르네거는 신의 아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 즈음 성검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가 성검을 쓰러뜨렸으니까.

날이 서 있는 성검의 위로 몸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마치, 신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르네거는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

말, 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생각, 이라는 것을 온전히 하기도 전에 말이다.

성검의 주인이라는 직책은 마치 그에게 내려진 사명과도 같은 것, 필연적인 것이었으므로, 르네거는 묵묵히 그에 임하며 살아왔다.

주신을 추앙했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걸음마를 떼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이면 주신의 동상 앞으로 가 그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그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 왜 라템은 아포칼리타의 신자들을 죽이는 거야? 왜 라템은 같은 신을 믿는 인간들을 죽이는 걸까?

-성검 역시 마찬가지야. 마치 흡혈귀처럼, 주인에게 달라붙어 죽을 때까지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카리나의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은, 이제껏 자신이 믿어 왔던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부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을 떨쳐 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라템은, 신은 그러지 않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분명…….

‘나 역시 의구심을 품은 것이지.’

르네거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이마에 손등을 대었다. 숨을 차분하게 내쉬려 노력한다.

문득, 그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카리나와 맺은 맹약에서 비롯된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맹약의 증표이자, 그녀가 나를 살려 준 행위에 대한 증거.

카리나는 나를 살렸다.

그에 비해.

성검은. 그리고 신은.

나를 구해 주었는가.

나의 생명을 지켜 주었는가.

“……젠장.”

아니. 나는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바다신의 아들이자 성검의 주인.

결코 신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하면 안 되는 것.

르네거는 자꾸만 피어오르는 생각을 접어 내리며 침대 속에 몸을 파묻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맹목적인 믿음에 의문이 생긴 순간, 그 믿음은 깨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4장 타락의 징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