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늦은 밤.
결국 잠에 들지 못한 르네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마음이 들끓는 건 카리나와의 대화 때문이었으므로, 그녀와 더 말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르네거는 갸웃하며 히론이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카리나 님은 나가셨습니까?”
[그래.]
두꺼운 책을 펼쳐 놓은 채 그 앞에 앉아 있던 히론이 대답해 주었다.
“언제 돌아오실까요?”
[해가 뜨기 전에는 오겠지.]
“……그렇군요.”
르네거는 아쉬운 숨을 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히론을 빗겨 소파에 몸을 앉힌다.
힐끗, 히론을 바라본다.
제정신일 때 뱀과 둘이 남아 있던 적은 없었는데.
르네거는 묘한 어색함을 느끼며 히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히론은 책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그는 혀를 날름거리며 다음 장, 그 다음 장,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 마물은 아닌 것 같다. 르네거는 히론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나는 네 애완동물이 아니다.]
르네거의 시선을 느끼고 있던 것일까. 히론은 책에 두었던 눈알을 들어 올리며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따위로 불쾌하게 본다면, 네놈을 삼켜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쐐액.
그의 거친 숨소리가 높게 다가왔다. 르네거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히론은 혀를 날름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르네거의 얼굴과 몸을 몇 번이고 훑어본 후, 이내 갈라진 혀를 집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르네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꼬장꼬장한 마물이 자신의 생각을 알아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한 웃음을 머금으며 턱을 당겼다.
“여러 가지가 궁금합니다만…….”
그는 히론과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카리나 님의 관계가 가장 궁금합니다.”
[히론 님이라고 부르래도.]
“네, 히론 님.”
르네거는 다시 크게 웃었다.
이 작은 마물이 늙은이 말투를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마물과 대화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우스운 것일까.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의 웃음은 히론에게 기꺼운 것이 아니었다.
쐐액.
히론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번뜩였다.
[웃는 것이 재수 없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자중해 보겠습니다.”
[그런 고분고분한 태도도 재수 없고.]
쯧.
히론은 송곳니를 날카롭게 세웠다.
[라템 놈답지 않게 능글맞은 것이 참으로 보기 싫구나.]
“어쩌겠습니까.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난 것을.”
[더 재수 없군.]
히론은 방울이 달린 꼬리를 파르르 떨며 노후했다.
하지만 르네거는 겁을 먹지 않았다. 어차피 히론은 자신을 위협만 할 게 분명했으므로.
카리나와 자신은 목숨을 공유하고 있는 바, 이 마물은 절대 자신을 해할 수 없다. 르네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의 확신은 옳았다.
히론은 노후했던 숨을 들이켜곤 차분하게 똬리를 틀었다.
[나와 카리나의 관계를 묻는다면…….]
그는 먼 곳을 향해 눈을 돌리며 말했다. 답을 찾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카리나의 몸을 통해 봉인에서 깨어난 마물이다.]
“봉인이요?”
[수천 년 전, 나는 봉인되었지. 하지만 카리나가 태어남으로 인해 봉인이 풀렸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알고 있는 마물이라 하면 이지가 없어 오직 본능만 따르는 괴물뿐이었다.
하지만 히론은 달랐다. 말을 하고, 생각을 하며, 본능을 억제할 줄 알았다. 마치 인간처럼. 그렇기에…….
“저는 히론 님이 아포칼리타에 의해 창조된 마물인 줄 알았습니다.”
아포칼리타가 만들어 낸 마물인 줄 알고 있었는데. 봉인이라니. 르네거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습군.]
히론은 크게 조소했다.
[아포칼리타가 만들어 내는 마물 실험체들은 나에게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는 꼬리를 파르르 떨며 몸을 세웠다.
[나는 고대 마물이니 말이다.]
고대 마물.
신이 강림하기 전 세상의 지배자.
하지만 인간이 등장하며 신에 의해 멸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히론이 고대 마물이라니, 그렇다면 어떤…….
[나 같은 존재를 바실리스크라 하더군.]
“…….”
르네거는 벌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히론의 자그마한 몸집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목청을 틔웠다.
“그런 것치고는 몸이 작으신 것 같은…….”
[일부러 줄여 놓은 거다. 원래 크기였다면 네놈은 내 한 입 거리도 안 돼.]
흥.
히론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르네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어깨를 말았다.
콜록.
잔기침을 내뱉으며 웃음기를 정돈한다. 다시 히론을 응시한다.
“그렇다면 다른 고대 마물 중에 히론 님과 같은 존재도 있습니까?”
[고대 마물은 나를 제외하고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알려줄 것 같으냐?]
히론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르네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말씀하신 봉인의 뜻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누가 고대 마물을 봉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히론은 그런 르네거를 빤히 쳐다보다,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무언가를 상기한다는 듯이, 몇천 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는 듯이.
[그래. 고대 마물을 봉인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존재는…….]
피식. 히론은 헛웃음을 뱉었다.
[신밖에 없지.]
르네거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하지만 히론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전쟁의 여신의 노여움을 받아 봉인되었다.]
르네거의 눈매가 사붓 굳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히론의 옆얼 굴을 주시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질문에, 히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르네거와 눈을 마주친다.
바다신의 아들답게, 그의 새파란 눈은 바다를 품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은 흐릿한, 하지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히론은 천천히 기억을 되살렸다.
* * *
온통 회색빛의 세상이다, 고 카리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어둠에 물들어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 위에 손을 얹는다.
나무껍질이 우수수 뜯겨 나갔다. 그 가냘픈 생명의 흔적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사붓 조소했다.
이곳은 데이펜의 영역, 정령의 숲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포칼리타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멸망해 버린, 죽음의 숲이다.
푸르렀던 나무들은 잎사귀를 잃은 채 무너지고 있었고, 꽃들은 짓밟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생긋했던 숲길은 뒤틀려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점점이 핏자국이 이어졌다. 카리나는 그 핏방울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시체의 산이 보였다.
켜켜이 쌓여 있는 죽은 인간들. 그리고 빛을 잃어버린 정령들.
카리나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둠에 잠식된 것처럼 전신이 새까매진 시체들이었다.
이런 흔적을 남기는 아포칼리타는 단 한 명.
‘루나.’
카리나는 오묘한 생각이 담긴 시선을 갈무리하며, 차분한 숨을 내쉬었다.
원작에서, 루나는 기이할 정도로 데이펜의 정령에 집착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아이이기에 빛을 생명으로 쓰는 정령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카리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뭐가 됐든 상관은 없지.’
루나가 정령을 어떤 이유로 싫어하건, 카리나에게 있어 큰 이유는 아니었다.
루나가 데이펜만을 공격하는 것은 원작에서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이러다 여주인공인 페넬로피 데이펜에게 당하겠지. 원작과 같은 흐름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전에 자신은…….
어둠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제 곁을 지킬 군단을 만들어야 함이 옳았다.
“Sperr Tür weit auf.”
카리나가 주문을 외자, 대지가 비틀렸다.
인간의 피와 정령의 살점이 남아 있는 땅은 갈라지고 또 갈라지며 그 아래 본연의 대지를 끌어냈다.
어둠의 대지. 죽은 자들의 혼이 모여 있는 곳.
쿠우웅!
거대한 소리가 나며 융기하던 대지가 멈췄다. 갈라진 땅에서는 새까만 어둠이 솟구치듯 올라왔다.
세계 가장 아래에서 솟아오른 어둠은 마치 먹잇감을 찾는 것처럼 몸을 기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카리나는 그 어둠 위에 발을 올렸다.
그 즉시, 어둠이 뭉쳐 몰려와 카리나의 발끝을 거떻게 물들였다.
발, 발목, 종아리, 허벅지, 복부, 가슴, 그리고 끝끝내 목덜미를 타고 얼굴까지 올라온 어둠은 카리나의 모든 것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카리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탁,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피융!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언제 살이 물들었냐는 듯, 본래의 하얀 살결을 되찾은 카리나는 시체의 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옮기는 걸음마다 어둠이 깊게 눌러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짙어진 어둠이 요동쳤다.
“…….”
카리나는 시체의 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과 동시에 바닥에 깔려 있던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높게 솟구쳤다. 그리고 카리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쏴아아.
시체의 산은 어둠에 잠식되었다.
아드득, 아드득.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무심한 시선을 두며 요동치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어둠이 옅어졌다. 그리고 그 얇아진 틈을 타 가느다란 팔이 불쑥 올라왔다.
씨익.
카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희열에 찬 표정을 지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언데드를 지켜보았다.
“정령으로도 언데드를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카리나는 중얼거리며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게 다가오고 있는 한 마리의 언데드를 바라보았다.
“성공했네.”
쐐에엑!
언데드는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노후했다. 그러나 카리나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아니, 공격하지 못한다. 이미 그의 주인이 카리나가 되었으므로.
“이쪽은 모두 다 물의 정령인가 봐.”
물은 별 쓸모가 없을 텐데, 아쉬워라.
쿠구궁!
다시금 대지가 흔들렸다.
흐려지고 있던 어둠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갈라진 땅의 틈으로 몸을 비집었다.
“후우…….”
카리나는 야트막한 숨을 뱉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온 게 느껴졌다.
어쩐지, 목덜미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눈을 찌푸린다.
약해졌다.
그래. 확실히 자신은 약해졌다.
카리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죽어 버린 정경처럼, 회색이 되어 썩어 버린 살점을 내려다본다.
“쯧.”
카리나는 손을 갈무리하며 혀를 찼다.
이 목에 난 상처만 없어도 괜찮아질 것 같은데. 빌어먹을 리치 같으니라고. 목덜미를 더듬는다.
-제가 치료해 드릴까요?
순간, 르네거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바득 이를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이미 피가 섞여 있는 이상 그의 치료술을 받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라템의 치유력은 대단했으니, 효과가 좋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카리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소 타인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굳센 자존심 때문도 있었으나, 궁극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에게 휘말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게 말려 저도 모르게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더 골려 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젯밤, 르네거의 파리해졌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조소를 흘렸다.
신실한 성기사가 신을 의심하는 걸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정말 신을 배반하게 되면.
‘재미있지 않을까.’
카리나는 킥킥 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르네거와 자신은 마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끌려가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이제 돌아가야지.”
카리나는 히론이 없는 것을 아쉬워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도약하려 했다.
-꿰에엑!
느닷없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빠르게 몸을 뒤로 틀었다.
커다란 독수리의 날개가 보였다. 그보다도 더 커다란 사자의 몸이 보였다.
‘그리핀.’
챙!
카리나는 그리핀의 부리를 피하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빠르게 사방을 둘러본다.
‘루나인가?’
힘을 펼쳐 루나의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루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그리핀의 단독 행동이라는 것일 텐데.
카리나는 걸음을 정돈하며 두 다리를 곧추세웠다.
꿰에엑!
그리핀은 다시 한번 포효하며 카리나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핀이 점점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카리나는 일말의 요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리핀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뿐.
그리핀의 발톱이 카리나의 여린 살에 닿으려는 그 순간.
카리나의 동공이 찢어졌다.
연두색 홍채는 흰자 전체를 덮으며 섬뜩하게 발광했다. 검게 찢긴 동공은 그리핀에게 꽂혀 있었다.
쿠웅!
그리핀은 그대로 쓰러졌다. 딱딱한 돌이 되어 버린 채.
“아, 눈 아파.”
카리나는 눈을 벅벅 비비며 미간을 좁혔다.
루나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이 그리핀은 정찰병 정도인 것 같았다.
다행인가. 그래. 다행이었다. 루나와 마주쳤다간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더럽게 피곤하네.”
카리나는 머리를 헝클며 발을 내디뎠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녀의 시선이 그리핀의 발에 닿았다.
발목에는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카리나는 다소 떨리는 손길로 쪽지를 낚아챘다.
구겨져 있는 쪽지에 적혀 있는 말은 매우 명료했다.
[오랜만이야.]
루나의 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