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과거를 아느냐?]
히론은 아득한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의 신과 고대 마물만이 존재했던 이 세계를 알고 있냐는 말이다.]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성서라.]
히론은 피식 헛숨을 뱉었다. 고개를 내젓는다.
[기록은 기록한 자의 뜻대로 쓰여 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성서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싶었으나 르네거는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히론의 다음 말이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과거, 이 세계에는 너희가 알고 있는 신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신이 살고 있었다. 셀 수가 없었지. 마치 인간처럼…….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신족이라 불렀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르네거는 잠자코 경청했다.
[어느 날, 바다신은 한 존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고르곤 일족의 여인이었지.]
히론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물가에 서 참방거리던 모습을,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해맑게 웃던 모습을, 저의 목을 안아 주며 다독여 주던 모습을…… 히론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그 당시 고대 마물은 신족과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바다신을 거부했다.]
“…….”
[그러나 어쩔 수 없이도…… 바다신의 끝없는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열고 만다. 바다신을 받아들인 그녀는 기꺼이 그와 함께했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못했다. 전쟁의 여신의 신전이었으니.]
전쟁의 여신이라면 페넬로피의 어머니라 칭해지는 신이 아니던가. 르네거는 생각을 더듬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그 말을 하는 히론의 목소리는 어딘가 처연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허탈한 음성. 르네거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전쟁의 여신은 분노했다. 하지만 같은 신에게 저주를 내릴 수는 없었지. 그래서.]
히론의 꼬리가 사붓 떨렸다.
[그 여인은 전쟁의 여신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히론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쐐엑, 쐑.
가파른 숨은 그의 격양된 마음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메두사.]
“…….”
[카리나의 모체가 되는 고대 마물이다.]
르네거의 눈매가 굳었다. 휘둥그레진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포칼리타가 고대 마물과 인간을 결합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대 마물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못했다. 한데…….
바다신의 연인이었던 존재에서 카리나가 비롯되었다니.
르네거는 생각을 바로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바다신이 왜 인간의 생명력을 쓰느냐 물었지.]
르네거는 아까 전, 카리나에게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신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히론의 검은 눈이 사붓 가늘어졌다.
[괴물이 된 고르곤 여인은 결국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녀의 죽음에 슬퍼한 바다신은 저승까지 쫓아갔으나, 결국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
[그래서 전쟁의 여신과 거래를 제안한다. 자신의 힘을 넘기는 대신, 그녀를 되살려 달라고.]
르네거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오묘한 감정이 그의 가슴 안에서 치달았다. 주먹을 세게 바르쥔다.
“……그 거래는, 이루어졌습니까?”
[그래. 그러하여 바다신은 약해졌지.]
르네거는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허무하고, 처량한.
대체 왜 이런 기분이 찾아왔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허탈하지 않느냐?]
르네거는 반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걸 대체 어떻게. 그리 질문하는 듯했다.
[당연히 무상하겠지. 신의 사랑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니.]
르네거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히론의 말이 맞았다.
신의 사랑 때문에, 고작 그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수천의 인간이 희생되고 있었다는 것에…… 그리고 그런 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에…….
커다란 회의감이 찾아왔다. 짓눌린 신앙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해도 이제 네가 가진 의문은 다 풀리지 않았느냐.]
르네거는 시선을 들었다. 히론을 바라본다.
“그래서, 메두사는 살아났습니까?”
히론은 재차 조소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카리나의 모체가 메두사라고.]
“그 뜻은…….”
[그래. 메두사는 그대로 죽었다. 다시 살아날 수 없었지. 전쟁의 여신은 생명을 관장하지 않으니.]
“하지만 전쟁의 여신은 바다신의 힘을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거짓이었다.]
히론이 품고 있던 처연한 기운이 사라졌다. 빈자리에 분노가 내려앉았다. 넘실거리는 노기는 히론의 검은 두 눈을 꽉 움켜쥐었다.
[전쟁의 여신은 거짓말로 바다신을 꾀어내고, 힘만 받은 후 도망쳤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덕분에 바다신은 바다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놈이지. 미련하게도.]
히론의 말이 끝마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르네거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바다신이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인간을 저버린 것도 놀라웠지만,
전쟁의 여신이 바다신을 배신한 것도 놀라웠다.
“왜…….”
르네거는 띄엄띄엄 말문을 틔웠다.
“전쟁의 여신께서, 신께서, 신이 대체 어떻게 거짓말을 한다는 말입니까?”
[인간은 신에게서 비롯되었지. 인간의 무기인 거짓을 어찌 신이 쓰지 못할 것이란 말이냐.]
르네거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두 손 위에 이마를 얹었다.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펄펄 열이 끓는 것만 같았다.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는 것도,
성검이 인간의 생명력을 갈취한다는 것도,
그것이 바다신의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도,
전쟁의 여신이 바다신을 저버린 것도…… 모두 다.
르네거는 침음을 흘리며 어깨를 웅크렸다.
괴롭다.
저가 믿고 있던 신앙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신앙이 무너지니 이제껏 살아온 삶이 무너졌고, 삶이 무너지니 자아가 무너졌다. 그는 혼란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히론은 그런 르네거를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너희 같은 인간들은 그렇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르네거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파묻혀 있을 뿐.
[네가 믿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려 했을 뿐이니.]
히론은 쭉 폈던 몸을 끌어당겼다. 파리를 틀며 목을 빳빳하게 세운다.
그러며 르네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바다신의 기운을 품고 있는 그를, 어쩌면 증오하고 있는 시선으로.
[그래…….]
히론은 자조적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네놈이 카리나에게 끌리는 건 필연일 수도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르네거의 고개가 그제야 들려졌다. 그는 멍하니 히론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바다신의 후손이니, 바다신이 사랑한 여인과 결합한 카리나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
르네거는 침묵했다.
반박할 말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히론의 말에 동조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1차 신마전쟁 때 마주했던 카리나를 이제껏 기억 속에 담고 있었던 그였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묘한 끌림에 매료됐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밀어낼 수 없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게 모두 다…….
‘아니, 아니.’
르네거는 고개를 저었다.
히론의 말은 뱀의 꾐일 뿐이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아포칼리타이자 마물. 충분히 거짓을 꾸며 낼 수 있는 것이다.
‘라템으로 돌아가면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르네거는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이때였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카리나 님일까요?”
[글쎄.]
카리나였다면 문을 두드리지 않고 들어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구지.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생경한 사람이 서 있었다.
* * *
르네거가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것은 검은 머리칼의 사내였다.
보다 작은 체형과 새하얀 얼굴, 흐릿한 이목구비는 그의 존재감을 옅게 드러냈다.
이 집을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르네거는 문을 몸으로 막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구십니까?”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며 그의 면면을 훑는다. 검은 눈동자에 짐작하기 힘든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리나는 안에 있나요?”
리나라 하면 카리나를 뜻하는 것일 테다. 카리나를 찾아온 손님인 듯했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왜? 르네거는 묘한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은 잠시 외출 중입니다. 용건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르네거는 정중히 그를 거절했다. 그러나 남자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리나가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될까요?”
“누구신지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 남자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태도만 놓는다면 무해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상하리만큼 기이한 찝찝함은 르네거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왜일까.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를 응시했다.
“저는…….”
그는 그런 르네거를 피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리나가 일하는 치료소의 원장입니다.”
그는 카리나가 일하는 치료소의 원장, 시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