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는 카리나가 일하는 치료소의 원장, 시엘이었다.
시엘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 카리나가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등 뒤에 숨겼던 꽃다발을 꾹 움켜쥐었다.
리나가 치료소를 그만둔다고 말했던 순간에, 시엘은 그녀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에게 무심했으나 적어도 자신에게는 상냥했다.
모두의 관심을 거부했으나 자신의 말만큼은 잘 따랐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도 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떠난다 말을 한 건, 자신을 붙잡아 주기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시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찾아왔다. 함께하기 위해서.
하지만 집에 찾아오니 그녀 대신에 낯선 남자가 자신을 반겼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퍽 흉흉했다. 마치 경계하는 것처럼…….
‘설마.’
시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리나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긴 것이 이 남자였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열이 올라왔다. 머리가 아찔했다.
왜, 왜, 왜. 그녀는 나를 버리고 이 남자를 만나는가.
내가 부족한가? 아니, 나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에 비해 모자란 것은 없으리라.
‘그러니 내가 마음을 고백하면…….’
리나가 받아 주리라. 시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들끓으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시엘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리나에게 직접 말할 게 있어서요. 기다리겠습니다.”
르네거는 잠시 침묵했다.
카리나가 치료소에서 일을 한다고? 왜?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직장의 동료가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것이 이해가 되는 행동인가? 거기에 꽃까지 든 채…….
‘젠장.’
르네거는 사붓 미간을 좁혔다.
이건 카리나의 일이다. 내가 참견할 바가 아니야.
그는 애써 생각을 지우며 숨을 몰아쉬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집 안을 바라본다. 소파에 앉아 있던 히론이 계단을 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르네거는 그제야 문을 막고 있던 몸을 비켰다.
“들어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시엘은 꽃을 앞으로 안으며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르네거가 등을 보이자 시엘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르네거를 탐색하는 것처럼, 그를 뚫어져라 주시한다.
정말 카리나가 이 남자를 만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볼 게 있다고. 아니,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시엘의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그런데…….”
르네거가 안내해 준 소파에 몸을 앉힌 시엘은 곧장 말문을 텄다.
“누구신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아. 르네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카…… 아니, 그분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신세요.”
시엘은 비스듬하게 조소했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쓸 만한 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리나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겠지.
능력 없는 놈. 시엘은 그렇게 르네거를 판단 내렸다.
“그런데…….”
이런 시엘의 생각을 모르는 르네거는, 저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분과 같이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죠.”
“그럼 언제부터 함께하신 겁니까?”
질문의 의미를 헤아리며, 시엘은 다시금 승리감이 만연한 조소를 머금었다.
뭐야, 이제 보니 리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잖아.
그럼 더더욱 리나와 만나는 사이는 아니겠군.
시엘은 턱을 들어 올렸다. 비스듬하게 시선을 내려 르네거를 내려다본다.
우월감이 들었다.
내가 너보다 그녀를 더 잘 알고 있다는 승리감.
하늘을 찌르게 올라간 콧대는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엘은 상냥했던 미소를 지우고 그 자리에 비릿한 비소를 덧씌웠다.
“일 년이 넘었죠.”
르네거의 눈이 커졌다.
아포칼리타가 치료소에서 일을 했다고? 일 년이나?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에 놀란 것이건만, 시엘은 그가 자신에게 주눅이 든 것이라 판단했다. 더욱 크게 비웃는다.
“열사병으로 쓰러진 촌장님의 아이를 리나가 치료해 주었죠. 그 아름다운 마음에 반했고요.”
반했다니? 르네거는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시엘은 들고 있던 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꽃은 리나의 것입니다.”
가시가 남아 있는 넝쿨로 새빨간 장미를 감싼 형태의 꽃다발이었다.
마치 카리나를 닮은 듯한 형태다. 르네거는 그렇게 생각했다.
“곧 이사를 간다 해서, 그 전에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고백을, 한다는 뜻인가.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바싹 힘을 주었다.
그럴 수 있다.
카리나는 아포칼리타를 벗어났다 했으므로, 인간 사회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을 만나…… 결혼을, 할 수도 있는 것일 테지.
한데 왜. 왜 이렇게도.
‘불쾌한 것인지.’
이상한 감각이었다. 텁텁하고, 짜증 나는. 그리 기껍지 않은.
그러면서도 이 남자를 거슬려 하는 자기 자신도 불쾌했다.
르네거는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의 가슴을 자극했다.
“한데 리나가 많이 늦네요.”
그런 르네거의 변화를 알아챈 것일까. 시엘은 부러 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이렇게 늦는 아이가 아닌데 말이죠.”
시엘은 생긋 웃으며 말을 마쳤지만, 르네거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이상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항변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나는 카리나와 매일 입맞춤을 하는 사이라고, 그 누구보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고 있노라고, 그리 말을 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 행동은 모두 다, 맹약 때문이었으니까.
카리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거두어 준 것이니까.
‘눈앞의 이 남자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르네거는 주먹을 세게 바르쥐었다. 이전보다 거세진 불쾌함이 그의 정신을 잠식했다. 자극된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때였다.
-쿵!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히론이 있는 방에서 난 소리였다. 르네거는 빠르게 고개를 틀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시엘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계단 위를 바라본다. 정확히 소리가 난 방을 쳐다본다.
“리나가 안에 있나요?”
르네거는 목 뒤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요. 그분은 외출하셨습니다.”
“그럼 이건 무슨 소린가요? 누가 낸 건데요?”
르네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마 뱀이 낸 소리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그의 침묵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듯, 시엘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가 봐야겠어요.”
“안 됩니다.”
르네거는 계단을 오르려는 그를 막으며 말했다.
시엘이 방문을 열었다간 히론을 들킬 터. 아포칼리타라는 존재를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 아니던가.
하지만 속내를 모르는 시엘로서는 르네거의 태도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왜 안 되는 건가요?”
“……위층은 그분의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아아.”
시엘은 피식 입꼬리를 틀었다.
“그러니까 저는 올라가도 되겠네요.”
그는 그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카리나의 손님이니만큼 무력을 쓸 수도 없는 노릇. 르네거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짓입니까!”
시엘은 붙잡힌 손을 불쾌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분이 당신을 만나기 원치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하? 시엘은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 없어요.”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르네거는 순간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저리 단호하게 말을 할 만큼, 카리나와 그는 가까운 사이인 것인가.
다시금 가슴팍이 찌르르 아파 왔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묵직한 통증이 그를 지배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시엘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리나야!”
젠장.
르네거는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끝에 서 있는 시엘의 앞을 가로막는다.
“내려가십시오.”
“비키세요.”
“내려가라 말씀드렸습니다.”
“비키라고!”
시엘은 르네거의 가슴을 세게 밀쳤다. 그러나 르네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더 짜증이 올라온 듯, 시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크게 소리쳤다.
“너는 고작 리나에게 빌붙어 있는 신세겠지만, 나는 리나와 아주 깊은 관계야. 네가 나를 막을 권리는 없어.”
르네거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한 듯, 시엘은 크게 웃으며 다시금 그를 밀쳤다.
“비켜!”
하지만 그의 조악한 힘은 르네거를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힘의 반동으로 시엘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
시엘은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계단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한다. 몸이 점점 더 뒤로 기울었다.
“잠깐……!”
르네거는 시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지 못했다. 거리가 있던 것도 아닌데, 허공을 휘젓던 시엘의 손은 르네거에게 닿지 못했다.
쾅!
그는 계단에 쓰러져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쿵!
그의 머리가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
이게 대체.
르네거는 뻗고 있던 손을 되돌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계단 아래, 조금의 미동도 없는 남자를 바라본다. 뒤집혀진 눈을 본다.
죽은 것인가.
르네거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잘게 떨었다. 경련하는 손을 거두어 얼굴을 쓸어내린다. 축축함이 묻어났다.
집은 고요했다.
공기가 들끓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적요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
르네거는 비틀거리며 난간을 짚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러한 이유는 단 하나.
-당연히 무상하겠지. 신의 사랑 때문에 인간의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니.
자신은 신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고작 사랑 하나 때문에 인간들을 저버렸노라 힐난하지 않았던가.
한데…….
‘나는.’
과연, 내 손끝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던가.
모를 일이다.
그를 붙잡지 못한 것인지, 붙잡지 않은 것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르네거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꺼운 목젖이 움직이며 긴장 섞인 숨이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때, 어느새 다가온 히론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는 르네거를 향해 한껏 아가리를 찢으며 크게 웃어 주었다.
[바다신의 사랑도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피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