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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24화 (24/135)

24화

분명 늦지 않은 밤 시간 즈음에 집을 나왔는데, 지금은 벌써 동이 트는 새벽이 되어 버렸다.

이게 모두 다 갑작스레 나타난 그리핀 때문이라고, 카리나는 터덜터 덜 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이야.]

그 쪽지는 분명 루나였다.

루나, 루나.

나를 가장 싫어했던 형제.

마주치면 분명 죽이겠다고 달려들 텐데.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귀찮음이 앞서 들었다.

탑을 떠난 지가 벌써 삼 년이다.

평온한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 마당에 전투라니.

이건 너무 극한의 상황이 아닌가. 카리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루나는 여주인공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괜한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도망치자.”

카리나는 빠르게 판단했다.

루나를 혐오하다시피 싫어하는 샐러딘이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판단이었으나, 그녀는 카리나였다.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성가신 일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조용히 도망을 치는 게 모두에게 편안한 길일 터였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아, 피곤해.’

당장이라도 침대에 들어가 잠에 들고 싶었다.

그렇게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피 냄새?”

비릿한 피 향이 코를 찔렀다. 이건 분명 인간의 냄새였다.

설마. 르네거가 죽었나?

카리나는 제 목을 더듬거렸다. 르네거가 죽었다면 자신도 죽을 테니까.

“오셨습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르네거는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피 냄새는 누구의 것이라는 말인가.

카리나는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제가.”

르네거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무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카리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카리나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발을 내디딜수록 피 냄새는 짙게 풍겼다. 별로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이렇게 피 냄새가 나는 와중에 죄를 지었다는 말을 하다니. 살인을 했다는 뜻인가.

카리나는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누굴 죽였는데?”

르네거는 대답 대신 옆으로 걸음을 물렀다.

그가 비킨 자리, 계단 아래에 쓰러져 있는 한 인간이 보였다.

“시엘?”

시엘이었다니. 카리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엘이 죽은 것보다, 그가 내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대체 왜?

생각하던 카리나는, 오늘 아침에 시엘이 자신에게 보였던 시선을 떠올렸다.

분명 오묘하고 끈적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

카리나는 입술을 사붓 깨물었다.

“사고였습니다.”

“그래 보이긴 하네.”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변명하지 않아도 돼.”

“……변명이라.”

흐려지는 말끝에, 카리나는 르네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저녁에 보았을 때와는 다소 결이 달랐다.

단 몇 시간의 차이건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낌이 색달랐다.

전에는 티끌이 없는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면, 지금은…….

‘검은 물감이 칠해진 것 같아.’

카리나는 손끝에 맺히려는 어둠을 갈무리하며 르네거와 마주 섰다.

“시엘이 왜 이곳에 온 건데?”

“당신을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르네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 말?”

르네거는 대답 대신 소파 앞, 탁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걸 가져왔더군요.”

그곳에는 만개한 장미꽃다발이 있었다. 카리나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꽃을 들어 올린다. 향긋한 냄새가 풍겼지만, 그건 잠시였다. 이미 집 안을 감싸고 있는 피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다.

“버려야겠네.”

툭.

카리나는 팽개치듯 꽃다발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에 르네거는 다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셨습니까?”

르네거는 차분히 물었다. 하지만 그 침착한 말투에 묘한 집념이 묻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왜지. 카리나는 의뭉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인간이잖아.”

카리나는 그렇게 일축했다. 그러며 시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 년가량 얼굴을 맞대며 일했던 인간이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린 모습을 보니 무언가 마음이 이상했다. 좋지 않은 기분.

그러나 카리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죽어 버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없지 않은가.

카리나는 시엘에게 두었던 시선을 무심하게 떼어 냈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 뭐였대?”

르네거는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사실대로 그가 당신에게 고백을 하러 왔노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카리나는…….

‘연민을 느낄까.’

르네거는 손을 말아 쥐었다. 거짓된 말이 혀끝에 닿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카리나는 그럼 됐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껏 입 밖으로 거짓을 내 본 적이 극히 드물었던 르네거였다. 거짓은 삿된 것이라는 교리를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 부끄러움도 없이.

이상했다.

카리나가 시엘에게 연민을 가진다 한들, 저가 피해 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더 나아가 카리나가 시엘과 가까운 사이였다 한들, 저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데…….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카리나가 시엘을 안타까이 여기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를 바랐다.

이런 감정은,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겪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별다른 건 없었지? 이게 끝?”

르네거는 낮게 조소했다.

카리나의 이런 아포칼리타스러운 면모가 지독하게 소름 끼쳤다. 그러나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됐어.”

카리나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르네거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쯧.

그녀는 짧게 혀를 찼다.

“죄책감 갖지 마. 사고였다며.”

달라진 점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몇 시간 전의 르네거와 지금의 르네거는 퍽 다른 느낌을 주었다.

카리나는 이 차이가 르네거의 죄책감이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이리 말을 한 것이건만.

“……하.”

르네거는 되레 헛웃음을 뱉었다.

왜? 카리나는 미간을 깊게 좁혔다.

“왜 웃니?”

르네거는 입가에 피어 올린 웃음을 그대로 유지하며 대답했다.

“사고가 아니었다면요?”

그는 성큼 카리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저 남자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구하지 않은 것이라면요?”

르네거는 제 손끝에 머뭇거림이 남아 있던 것을 상기하며 말했다.

“제가 정말…… 저 남자를 죽인 것이라면.”

“그건 네 선택이야.”

“살인을 선택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 아포칼리타 앞에서 죄를 논하자는 거니?”

카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르네거.”

그의 턱을 쓰다듬는다. 휘발된 식은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목덜미까지 손을 내린다. 움푹 파인 쇄골을 손끝으로 훑었다.

“나쁜 인간은 죽어도 돼.”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이 드는데…….”

“…….”

“너는 어떠니?”

성기사인 르네거를 자극하고자 한 말이었다.

그가 말했듯, 신의 교리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살생을 금하는 것이었으니까.

한데, 르네거의 태도가 이상했다.

왈칵 반박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이상하게도 침묵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보아 수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러니, 너?

카리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템의 사람들은 대부분 예의를 중시하지요.”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카리나는 그를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귀를 세웠다.

“서로 간의 언쟁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생겨도, 신에게 기도를 할 뿐입니다. 인간끼리의 다툼, 더 나아가 살생은 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니까요.”

르네거의 금색 머리칼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나는, 은빛이 도는 금색 머리칼.

저러한 색은 신의 아들이라는 증표였기에, 그는 신실한 성자였다. 성자여야만 했다.

“저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만…….”

르네거는 말끝을 흐렸다.

이미 그는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라템의 부정한 살생과, 성검이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조차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인간을 버렸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알아 버린 이상,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르네거는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어긋나 내려오는 시선. 그 끝에는 일평생 숙적이었던 아포칼리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무릎을 굽혀 카리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당신은 바다신의 반려의 환생입니까?”

“……히론이 이야기했니?”

카리나는 눈을 돌리며 히론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히론은 없었다. 진즉 도망친 모양이리라.

“대답해 주십시오.”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다시금 그와 눈을 마주한 카리나는, 시선을 반쯤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난 대답해 줄 수 없어.”

사실 나도 믿지 못하니까.

카리나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손을 바르쥐었다.

이곳은 모든 이들이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며 카리나 역시 신이 죽인 마물의 시체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계가 책 속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카리나는 그렇게 회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는.”

르네거의 청명한 목소리가 띄엄띄엄하게 들려왔다.

“당신이 그 환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손을 내려 카리나의 입술을 더듬었다. 뜨거운 감촉이 살에 닿았다. 마치 그 부분만 화상을 입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야, 제가 당신에게 끌리는 것에 대한 정당성이 생길 테니까요.”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

왜 내가 나가 있던 그 몇 시간 만에 변해 버린 것일까.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꺼운 것도 사실이었다.

카리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르네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실한 얼굴을 바라보며, 금이 가 있는 신념을 관찰한다.

“고민해 보았습니다.”

르네거는 카리나와 완전하게 밀착했다.

발끝이 닿았다. 그리고 손이 닿았다. 서로의 숨이 얽힐 정도로, 가까이 마주 섰다.

“당신의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

“그래서, 결론을 내렸니?”

“예.”

그는 카리나의 손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눈을 들어 올렸다.

푸르른 색채가 그녀를 반겼다. 그 색에 사사로이 물들어 버리는 느낌이 찾아왔다.

“당신은 제 생명을 위해 기꺼이 당신을 희생해 주었지요.”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뜨거웠다. 카리나는 그와 비슷한 온도의 숨을 뱉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을 믿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한 것.”

그는 카리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누군가의 신이 되기에, 당신은 모자람이 없을 듯합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녀의 귓가로 다가간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는 전일 자신이 남겼던 흔적을 더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피가 부족합니다.”

그의 음성은 달콤했다.

꿀에 꾀이는 벌의 심정이 이러한 것일까.

카리나는 그의 흐려지는 음성을 더듬으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르네거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변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제 목숨보다도 신을 사랑하고 추앙해 몸을 내던지던 신관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인간.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

더 이상, 선하지 않은 인간이 된 것이다.

“난 정말 뼛속까지 아포칼리타인가 봐.”

그렇기에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야만 했다.

“신성한 사람을 타락시켜 버리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녀는 솟구치는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며, 르네거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더 해 봐.”

그녀는 르네거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할짝이는 소리가 낮게 퍼졌다.

“혹시 아니, 내가 네게 더 많은 것을 알려 줄지?”

말을 끝으로, 르네거는 카리나를 옥죄듯 끌어안았다.

르네거는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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