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화려한 달빛과 근근한 별빛이 까마 득한 어둠을 비춰 주고 있는 때였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괴성과도 같은 마물의 울부짖음이 크게 들리는 때.
“흐응.”
루나는 나무의 꼭대기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즐거운 비음을 흘리고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는 희석되지 않은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루나에게 있어 꽤나 오랜만에 다가오는 기꺼운 감정이기도 했다.
3년 전, 탑이 무너진 이후 정신을 놓고 사방을 헤맸던 루나였다.
아버지를 찾고자 안전 영역을 벗어나 대륙 곳곳을 뒤졌다.
3대 가문의 인간들에게 쫓기고 또 쫓겨도, 그들에게 수없이 많은 공격을 받아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져도, 아버지를 찾을 수만 있으면 족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다. 카리나 그 빌어먹을 계집이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다.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루나는 반쯤 미쳐 버린 채 세월을 낭비했다.
하지만 시간은 슬픔을 희석시켜 주는 법.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루나는 슬픔 대신 분노라는 거대한 감정을 집약시켜 품고 있는 중이었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아포칼리타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배신자.
아버지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 주었는가? 그녀의 편의를 얼마나 많이 봐주었던가?
얼마나, 그녀를 아꼈던가.
한데 카리나가 어떻게 감히 아포칼리타를 배신할 수 있는가.
“이유는 중요하지 않지.”
루나는 툭 중얼거림을 뱉으며 발을 까딱거리던 행위를 멈췄다.
배신자는 죽어야 마땅했다.
그래. 정말 죽여 버려야 했다.
카리나의 영혼까지 깡그리 씹어 먹어야 조금이나마 이 분노가 가라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차 성장도 마쳤겠다, 다른 형제들의 마나핵도 빼앗았겠다, 자신은 아포칼리타의 탑에 살 때의 약한 실험체가 더 이상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그녀를 죽일 수 있으리라.
치민 격노의 화살은 과녁의 한가운데를 조준했다. 루나는 카리나를 놓칠 생각이 결코 없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루나는 우수수 흔들리는 숲의 저 너머를 응시했다.
까만 점처럼 보이는 한 인영을 바라본다. 제게로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피의 것처럼 새빨간 머리칼과 눈을, 혈색이 없이 새하얗기만 한 얼굴을, 그의 등 뒤에 활짝 펴져 있는 붉은 날개를 바라본다.
“자일 오라버니.”
루나는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이며 그를 반겼다.
자일에게 손을 뻗었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저 날개를 접고 허공에 자리를 고정할 뿐.
피, 루나는 볼멘소리를 내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오랜만에 루나를 보는 건데도 그럴 거야? 루나가 안 보고 싶었어?”
자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덤덤한 시선만을 보낼 뿐이다.
변한 게 없구나.
루나는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내리며 생각했다.
“때가 되었다.”
자일은 그런 루나에게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말했다.
“돌아오도록.”
그러며 날개를 다시 활짝 펼쳤다. 살점을 녹여 버리는 독성을 지닌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 피를 한 방울이라도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루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한 명씩 만나면서 형제들을 모으는 건 정말 힘든 일일 거라고 루나는 생각해.”
그녀의 말에, 길을 떠나려던 자일의 시선이 반쯤 돌아왔다. 루나는 생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많은 형제들이 아포칼리타를 찾아갔겠지?”
자일이 아포칼리타의 탑을 재건했다는 건 형제들 사이에 이미 퍼져 있는 이야기였다.
이렇듯 첩첩산중에 처박혀 있는 루나 역시도 들어서 알고 있는 바, 많은 형제들이 자일을 따랐으리라 판단되었다.
하지만.
“그런데 카리나 언니는?”
단 한 명.
자일이 그토록 원하고 갈망하는 존재는 그의 곁에 가지 않았으리라.
“언니는 어디 있어? 알고 있어?”
루나는 비죽이 웃으며 말했다.
쏴아아.
밀려온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자일의 붉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너.”
자일은 몸을 틀었다.
“찾았군.”
그의 눈매에 홧홧한 기색이 맺혔다.
죽어 버린 피처럼 칙칙했던 붉은 눈동자에 화기가 돌았다. 날름거리는 화마가 그녀에게 꽂혔다.
“카리나는 어디 있나?”
자일은 루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러나 루나는 그의 손길을 가볍게 뿌리쳤다.
순식간에 제 손에서 빠져나간 루나를 보며, 자일은 미간을 좁혔다.
“오라버니는 항상 언니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표정을 짓더라.”
루나는 구겨진 옷을 탈탈 털며 말했다.
“그렇게 언니가 좋아?”
가까이 다가온 자일에게는 인간의 악취가 희미하게 배여 있었다.
어딘가에서 또 전쟁을 하고 온 것일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는 기색이라니.
루나는 자일의 강함을 좋아했다.
자일의 꿋꿋함을 존경했으며, 고고한 오만을 동경했다.
그래서, 이런 자일의 평정을 깨뜨리는 카리나가 더더욱 싫었다.
“어쩐다. 언니는 오라버니를 좋아하지 않을 텐데.”
자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루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어차피 오라버니는 언니의 피가 좋은 거잖아. 다른 걸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루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루나가 시체를 가져오면 박제해 줄래? 피는 이 병에 잊지 않고 담아 올게.”
자일은 다시 한번 루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번에는 그녀가 도망칠 수 없게, 뒷목을 단단하게 결박한다. 그의 숨이 뜨겁게 노후했다.
“카리나는 어디 있나?”
“루나는 무서운 얼굴이 싫어.”
“카리나는 어디에 있느냐 물었다.”
“루나가 대답해 줄 리 없다는 걸 알잖아.”
탁, 루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동을 한 루나는 자일의 뒤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저건 분명 다른 형제의 능력일 텐데.
“시체는 최대한 보존해 볼게. 다만 팔다리 한둘쯤 없을 순 있어.”
루나는 그리핀의 등에 탄 채 발을 굴렀다. 그러며 해사하게 웃었다.
“루나는 뱀을 해부할 때가 가장 즐겁더라고.”
들려오던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분명 맹수에게 잡아먹힌 것이리라.
최상위 포식자는, 결코 뱀이 아니었다.
* * *
“읏…….”
카리나는 깊은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휘청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준다. 정신이 핑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르네거는 멀쩡해 보였다.
그는 입술에 묻은 피를 할짝이며, 나른한 시선으로 카리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리나는 그러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
카리나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져.”
그 말에, 르네거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는 그였다.
“그런 말을 들으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뭘 분발해?”
“더 건방져질 수 있도록요.”
카리나는 그의 만연한 미소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사실, 원작에서 가장 적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르네거 라템이었다.
그저 여주인공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실한 인물이라는 정도의 설명밖에 없었다. 일찍 죽어 버린 인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카리나는 르네거가 당최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분명 제게 이를 세우던 성기사였는데, 지금은…….
잘 알 수가 없었다.
특정적인 무엇이라 명시하기에는 르네거를 본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변하고 있었다.
신성했던 성기사에서, 무언가로.
그 끝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카리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를 느꼈다.
‘끝까지…….’
가 버리면? 카리나는 아랫입술 안쪽 살을 핥으며 잇새를 벌렸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르네거의 말이었다.
그는 카리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내리며, 그녀를 비스듬하게 바라본다.
“더 하고 싶으십니까?”
카리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막으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러 자극을 주었다.
“그건 네가 바라고 있는 거 아니야?”
르네거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카리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그는 카리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자분거리며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더 해도 괜찮습니까?”
이것 봐라.
카리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넘어가 주진 않는다. 그의 어깨를 밀어낸다.
“안 돼.”
그의 뜨거웠던 숨이 떠나니 허전한 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텅 비어 버린 듯한 감정을 느끼며, 카리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침 일찍 떠날 거야.”
“갑자기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
르네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느냐, 그리 묻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리나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포칼리타의 형제가 나를 찾거든. 싸우기 귀찮으니 도망치려는 거야-와 같은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카리나는 부러 말을 생략했다.
“라템의 영역까지는 나흘이면 도착할 수 있겠지.”
나흘…….
그 말을 읊조리던 르네거는, 다시 눈동자에 이채를 드리우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때가 되면 헤어지게 될까요?”
카리나 역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유순한 눈매에 새겨져 있는 감정들을 추측해 본다. 그녀의 입꼬리가 번듯하게 비틀렸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카리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천천히 더듬었다.
“말해 봐.”
그녀는 천천히 손을 올려 르네거의 가슴을 더듬었다.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르네거는 돌연 미간을 좁혔다. 휙,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말한다 한들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는 까득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살벌한 기운이 풍겼지만, 카리나는 웃었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악취미입니다, 그런 것.”
탁, 그는 카리나의 손을 놓아주며 눈을 홀겼다.
카리나는 흘리는 웃음을 주워 담으며,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싫은 거야?”
르네거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유속이 느린 강물처럼, 차분하고도 투명한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 문득,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다. 반달을 그리며 접히는 두 눈은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해사하고 맑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카리나의 뺨에 얼굴을 대었다. 그녀에게 머리를 비비며, 작게 속삭인다.
“그런 면을 좋아한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카리나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그는, 이내 몸을 일으킨 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요.”
그때까지도, 카리나는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건방져.
그렇지만, 왜인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