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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26화 (26/135)

26화

으드득.

사람의 덩치보다 더 커진 히론이 시엘을 삼키는 소리였다.

카리나는 그런 히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때에는 가까이 지냈던 인간이건만, 그를 지켜보는 카리나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일말의 동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연민이라는 건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카리나는 다리를 꼬며 손에 턱을 괴었다.

“르네거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더라.”

쿨럭.

히론은 큰 기침을 내며 몸통을 꿈틀거렸다. 카리나는 그런 그를 무심히 응시했다.

“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금기야. 알고 있지 않아?”

그 말에 히론은 허겁지겁 시엘의 몸을 모두 다 삼켰다. 컥, 컥, 기침을 하던 그는 카리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놈은 바다신의 후손.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일 필요는 없었어.”

[라템 놈들에게 전해 듣는 것보단 나았겠지.]

카리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귀찮아지잖아.”

[무엇이?]

“저 건방진 개가.”

카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본디 깨끗한 물을 더럽히는 건 다량의 흙탕물이 아니었다.

한 방울.

단 한 방울의 흙탕물만 떨어져도, 그 물은 더 이상 깨끗한 것이 아니게 된다.

르네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고결해 보일 정도로 무결했던 성기사였으나, 지금은…….

‘한 방울이 과했던 건가.’

카리나는 슬쩍 웃으며 젖혔던 고개를 들었다.

[귀찮아질 거라 말하는 것 치고는 재미있어 하는 것 같던데 말이다.]

“삼 년 동안 얌전히 살았으니까, 이 정도의 유희는 즐겨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유희라…….]

히론은 말을 흐리며 카리나를 쏘아보았다.

[적당히 하거라. 약해 빠진 인간을 네 옆에 두고 있는 건 영 마음에 안 드니까.]

히론의 날 선 말에, 카리나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난 지금도 충분히 적당해.”

재미있긴 하지만, 선을 넘을 생각은 없거든. 카리나는 손을 휘저었다.

“다 먹었으면 들어가. 내일 나가야 하니까.”

히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검은 눈알을 번뜩인다.

[한데, 왜 갑자기 떠나려는 것이냐?]

아, 히론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

카리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쪽지를 꺼냈다.

“루나가 날 찾았어.”

히론은 그녀가 건넨 쪽지를 살펴보았다.

‘오랜만이야.’라니, 참 고약한 그리핀다웠다.

[그래서 설마 도망을 친다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라.]

히론은 노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 잡종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느냐! 한 번의 개안이면 죽어 버릴 텐데, 왜 싸우지 않고 도망치겠다는 말이냐?]

“그게…….”

카리나는 입맛을 다시며 히론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귀찮아서.”

쐐액.

히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히론은 독이 든 송곳니를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넌 가끔 보면 내가 화를 내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럴 리 있겠어. 히론이 화를 내면 무서운걸.”

[징그러우니 저리 가라.]

타박에, 카리나는 히론에게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그의 비늘을 툭툭 건드리며 눈치를 살핀다.

“물론 네 말대로 루나를 죽일 수 있지. 내가 루나에게 질 리는 없잖아.”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러한 감각은 아까 전 루나의 쪽지를 보았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지기만 했다. 괜한 소름이 돋았다.

“뭔가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무엇이?]

“잘 모르겠는데, 뭔가 찝찝해서 그래.”

[자일 때문이더냐?]

자일?

카리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 미친놈 이름이 왜 나와?”

그녀는 왈칵 성을 냈지만, 히론은 익숙한 양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계집이 너를 찾아냈다면 분명 자일 놈에게 말을 했을 터. 그놈이 쫓아올까 걱정하고 있는 것 아니더냐?]

“…….”

카리나는 눈을 찡그렸다.

히론의 말이 얼추 맞았다. 그녀가 자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도 맞았고.

하지만.

“루나는 내 위치를 자일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확신하느냐?]

“그럼. 걔는 날 직접 죽이고 싶어 하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자일이 저를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라템에 갈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다고, 그렇게 카리나는 판단했다.

[그러니까 맞서 싸워야지 않겠느냐! 너는 적이 있는데도 도망을 치는……!]

“말했잖아. 귀찮다고.”

[아, 뒷목이 당기는구나.]

“너한테 뒷목이라는 게 있기는 있어?”

쐐액.

히론은 독니를 날카롭게 뽑으며 노후했다. 민망해진 카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계집이 알고 있는 이상, 자일이 널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알아.”

[그러니 그 목의 상처를 치료하란 말이다! 힘을 찾을 생각을 해야지!]

“왜 자꾸 소리를 질러. 귀 아프게.”

[카리나!]

“알았어, 알았어. 고려해 볼게.”

카리나는 두 손을 뻗어 아래로 내렸다. 히론을 진정시키며, 그와 눈을 마주친다.

“어차피 루나는 당장 나를 찾아오지 않을 거야. 최대한 시간을 벌어 보자. 그 시간에 르네거를 라템에 버리고 나오는 거야.”

[…….]

“그렇게 일이 끝나면 다시 먼 곳으로 가자.”

카리나는 히론의 몸통을 꼭 안았다. 히론은 혀를 찼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뺨을 핥아 주었다.

“가서, 우리끼리 평화롭게 살자.”

히론이 드러내는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며, 카리나는 눈을 지그시 내리 감았다.

“나는 그것만 바라고 있어.”

바람이 질 새 없이 불어왔다.

틈새로 밀려오는 바람은 마나핵이 박힌 그녀의 척추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 * *

삼 년가량 살던 집이었기에, 막상 떠나려 하니 아쉬움이 앞서 들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정을 붙이고 사는 건 카리나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평범한 인간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피어오르는 아쉬움을 접어 내리며 아무렇지 않음을 표방했다.

앞으로도 많이 겪게 될 터인데, 첫 경험을 서운함으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사실 준비할 건 없었지만. 르네거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는 남루했던 옷 대신, 카리나가 구해다 준 옷을 입은 상태였다.

평범한 하얀 셔츠와, 평범한 검은 가죽 바지. 평범하게 무릎까지 올라오는 워커. 모두 다 길거리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옷들이건만.

“잘 어울리네.”

르네거가 입으니 이상하리만큼 평범하지 않았다.

하얀 셔츠는 치수가 맞지 않는지 가슴 부근이 팽팽했다. 고된 검술로 다져진 몸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죽 바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수는 적당한 듯 보였으나, 재질이 가죽이니만큼 허벅지 근육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흐음. 이렇게 보니 몸이 좋기는 하네.

카리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생각했다.

“그렇습니까? 평상복은 처음인지라.”

르네거는 어색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며 웃었다.

위로 치켜 올라간 크고 긴 눈매는 사납기 짝이 없는 그였지만, 웃는 얼굴만큼은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웃을 때마다 움푹 파이는 입술 주변의 보조개도 꽤나 귀엽게 보였다.

내가 저 부분을 핥아 본 적이 있었던가.

카리나는 불쑥 치솟은 욕구를 느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르네거.”

카리나는 그의 뺨에 손을 얹은 채 눈을 마주쳤다.

“단추가 풀렸잖니.”

그녀는 풀린 단추를 잠가 주며 나른하게 웃었다. 손과 스친 살에 정전기가 올라왔다.

“……아. 감사합니다.”

얼핏 쳐다보니 르네거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전날 그렇게 덤벼들 때는 언제고, 이런 스킨십에 부끄러워하다니.

역시 어리긴 어리네. 카리나는 피식 조소했다.

“그리고, 이거.”

그녀는 들고 있던 성검을 건넸다.

느닷없는 행동이었기에, 르네거는 엉겁결에 성검을 받아 들었다. 놀란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본다.

“나갈 때 준다고 했잖아.”

아. 르네거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잠시 좁혔다.

얼마 가지 않아, 다물려져 있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당신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요.”

그는 눈을 들어 올리며 카리나를 직시했다.

햇볕 아래에서 보니, 그의 푸른 눈이 조금 더 명확하게 보였다.

더 청명해 보였고, 더 깨끗해 보였다.

불순물 한 점도 없는 영롱한 바다.

카리나는 귓가에 맴도는 파도 소리를 애써 떨치며 시선을 돌렸다.

“이러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어떡하려 그러니.”

빈정거리는 말이었으나, 르네거는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의 진실이 있으니, 그것도 믿게 되겠지요.”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기울인다.

“너무 쉽게 나를 믿는 거 아니야?”

그녀의 긴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새하얀 얼굴과, 새까만 머리칼이 대비되어 각기의 색을 더 찬란하게 뽐냈다.

르네거는 아무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 아래는 깊게 요동치고 있는 상태였다.

“조심해. 내가 잡아먹을지도 모르니까.”

카리나는 코를 찌푸리며 이를 앙다물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보여, 르네거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간다.

“과연 그럴까요?”

그는 카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가 할 수도 있는 일일 텐데요.”

카리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하루가 갈수록 달라지는구나. 생각하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성검이 듣는다. 싫어할걸.”

르네거는 그제야 성검을 인식했다.

제 손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성검이다.

자신이 라템의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그런데…….

감흥이 없었다.

성검을 쉴 때마다 느꼈던 벅차오름과, 기쁨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성검이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르네거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검을 허리에 찼다.

“가자.”

카리나는 제 어깨에 앉아 잠에 들어 있는 히론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르네거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햇볕이 뜨거웠다. 역광으로 쏟아지는 햇빛은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시선을 내려 몇 번 눈을 비빈 후에야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하늘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그리핀 떼를.

* * *

그리핀의 떼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건.

“조심하십시오!”

르네거는 빠르게 카리나를 잡아당겼다. 카리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르네거는 성검을 빼 든 채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아니, 그보다 더 많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르네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성검을 바르쥔다.

“뭘 하는 거야?”

그런 르네거의 어깨를 잡은 건 카리나였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히론을 팔에 감은 채 르네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핀 몇 마리에도 힘겨워했던 게 너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르네거를 비웃으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르네거는 턱에 단단한 힘을 주었다. 성검을 더 세게 붙든다.

“그때에는 성검의 힘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검의 힘을 받으면 넌 죽어.”

카리나는 그런 그를 밀쳐 냈다.

“비켜. 살고 싶으면.”

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르네거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리핀 떼가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카리나는 비죽 입술을 틀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수밖에.

촤악!

그녀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나왔다. 동시에 거센 바람이 물밀 듯 밀려왔다.

모든 것들을 쓸어버릴 것처럼 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카리나가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휘이잉!

그녀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도약했다. 르네거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기에 르네거는.

“…….”

비참한 현실에 두 주먹을 바르쥘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어떻게든 꿋꿋하게 참아 낸다. 여기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꼴 사나운 것이 없으리라.

카리나는 강했다.

그리고 자신은 약했다.

그녀는 불멸의 삶을 사나, 자신은 금세라도 꺼질 듯한 삶을 살고 있다.

카리나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다 하여, 그녀와 자신이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포칼리타이자 최강자였고, 자신은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이렇게는.

『오랜만이구나, 르네거.』

느닷없이 나타난 성검의 전음이 머릿속을 채웠다.

『힘을 갖고 싶으냐?』

성검은 푸른빛을 발하며 기세 좋게 발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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